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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세상마주보기] 차갑고도 찬란한 봄 - 박주희

신아미디어 2018. 5. 11. 08:19

"마른 꽃잎을 주워들고 밖으로 나간다. 부는 바람에 꽃잎을 맡긴다. 빛이 바랜 먼 시간보다 생의 갖은 색으로 가득한 지금 여기에서 내 색을 발하리라. 아직 쌀쌀하기는 해도 햇살이 마음을 간질인다. 동장군에게 기가 눌린 생명이 살며시 기지개를 켠다. 꽃샘추위가 곧 밀어닥칠 테지만 젖은 마음을 말려줄 명주바람은 금방 태산을 넘어 나타날 거다. 봄이 저 멀리서 무심히 오고 있다."






   차갑고도 찬란한 봄    -    박주희

   책 한 권을 뽑아 든다. 책갈피에서 마른 꽃잎 몇 장이 떨어진다. 생생하던 어느 해의 봄은 녹이 슨 듯하다. 손편지를 쓸 때 함께 보내려던 고운 계절의 기운은 온데간데없다. 꽃잎은 쌓인 시간과 좁은 책 사이 공간에 눌려 삶의 색이 바랬다. 하지만 생의 절정에 있던 꽃이 철쭉 꽃비로 내리던 날의 풍경을 펼쳐낸다. 책장에 넣어 둔 책을 읽던 그즈음의 세월이 내게로 온다.
   만우절이었다. 죽어가던 심장이 심장충격기로 다시 살아났다. 중환자실에서 한 달을 지냈다. 일반실로 옮겼다. 다시 시골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초긴장했던 가족들은 이제 병원에 있는 아버님을 보러 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찰나여서 더 아름답다던 봄이 유난히 길었다. 혀가 말려 들어가는 환자를 보고 장례 절차를 얘기하던 그 봄이 거짓말처럼 지나고 있었다.
   삼 년이 갔다. 그리고 다시 봄이었다. 새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어머니가 살다 큰아들에게 물려줄 집이기에 돈과 시간을 최대한 들였다. 시골에 짓는 집치고 작지만 고급이었다. 조경에도 신경을 썼다. 앞마당에는 반송과 화초를 심고 뒷마당은 텃밭으로 두었다. 시어머니는 화사한 꽃을 좋아하는 대로 분홍 철쭉과 꽃잔디를 사다 자리를 내주었다. 전에 살던 집에서 캐온 화초도 한 자리 제대로 차지했다.
   새집을 짓기 전에는 마을 중간에 살았다. 슬레이트 지붕 얹은 낡은 집이었다. 오십 년 넘게 시부모님이 함께한 삶의 터전이었다. 1960년대는 나라 전체가 넉넉하지 않았다. 간신히 하천 옆 국유지를 얻어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버님은 하루 세끼 밥은 굶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형제 중에 둘째라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이 없었다. 알음으로 동네 어느 집안의 시사時祀 논밭을 부쳐 끼니를 이었다. 쌀 걱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둘 자식이 늘자 생활이 넉넉한 친척에게 돈을 빌려 소 장사를 시작했다. 당신의 소가 송아지도 낳았다. 돈이 모이는 대로 땅을 샀다. 인삼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자식들 시집 장가 밑천을 마련한 후 부리던 시사 논밭을 정리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나는 시집와서 십오 년을 그 집에서 보냈다. 아궁이에 불 때는 방도 있었다.
   삼 년 만의 귀가였다. 새집 단장을 마치고 아버님을 모셔왔다. 하반신 마비에 알코올성 치매인 환자를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다. 도시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주말마다 집에 들렀다. 그래도 연로한 어머님이 아버님을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특히 술을 밥 먹듯이 하는 아버님을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치매는 악화되어 자신의 이야기 속에 살았다. 며칠 입원했었는데 병원비 그만 쓰고 일하러 가야 한다, 건강해져서 의사가 퇴원하라고 했다, 목발만 짚으면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걸을 수 있다고 했지만, 환자의 말은 벽에 부딪혀 주변 사람 가슴으로 튈 뿐이었다.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허공에 던져지는 말로 나날이 모두가 지쳐갔다. 시아버지는 삼 개월을 새집에서 살고 병원으로 다시 보내졌다.
   일흔 후반의 아버님이 병실에 누워 있다. 일곱 번의 봄을 병상에서 맞는다. 이번 봄은 가뭄이 심하다. 갈라지는 땅 사이에서 의연하게 꽃은 피고 지고 연일 소식을 전한다. 병실에 있는 환자에게도 세상일이 함께하는지 눈에 띄게 마른다. 이가 빠지고 식사를 잘하지 못하더니 뼈에 살 거죽이 걸쳐있다. 눈만 퀭하다. 오늘이 어느 계절, 무슨 달에 며칠인지조차 모르건만, 자식들을 잊지 않고 반겨주는 게 신기하다. 인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오늘도 집에 관해 묻는다. 기억이 어떻게 재편되었는지 새집에서 묵고 간 시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보상받아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는 그 시점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옛집은 하천복개공사로 벌써 허물어져 야외 운동기구가 설치된 지 오래건만 아버님은 그 집 마루에서 말을 하는 듯하다.
   옛집 이야기를 들은 횟수가 족히 열 번은 된다. 한 시간 면회하는 내내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맴돈다. 처음에는 길었던 줄거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짧아지지만, 전체 줄기는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기승전결에 빈틈이 없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안 일흔의 노인은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된다. 지루해진 가족들은 열한 번째 순서에서는 이야기를 마침내 끊어버린다. 과거와 현재, 헌 집과 새집 사이의 기억이 뒤엉켜 아버님도 방문객도 똑같은 질문과 대답을 반복할 뿐이다. 새집에 관한 사실을 전하고 사진을 보여줘도 몇 초만 유효하다. 시아버지에게 시간은 옛집으로만 구체화 된다. 청장년이었던 아버님은 면회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할 때가 되어야 현재의 노인으로 돌아온다. 또 새집을 짓기로 했냐고 묻는다. 대답 대신 잘 계시라는 말을 놓고 뒤돌아선다.
   돌아 나오는 길은 누구에게나 쓸쓸하다. 등지고 나오는 순간이라면 어디서든 가슴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을 병실에 놔두고 문을 나서는 가족은 매번 이 상황이 낯설다. 건장하던 때로 몸은 돌아갈 수 없지만, 생각은 수천수만 번 젊은 시절로 갈 수 있는 노인이 현실로 돌아오는 일도 퀭한 눈만큼 황량하다.
   아버님을 면회하고 온 날은 그의 삶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현재 삶이 희망이기는 할까. 희로애락을 무엇으로 느낄까. 죽음에 대한 생각도 있는 것일까. 아파도 지금 여기를 살며 시간의 결을 타고 흐르는 게 사는 행복일 텐데 아버님에게는 이제 그런 삶이 없어 보인다. 지난 시공간 속에만 있는 패기와 젊음을 곱씹을 뿐이다. 그 시간이 아버님에게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처자식에게 의지하고 싶은 존재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으로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넉넉하게 사셨을 테니. 잘살기 위한 목표를 이뤄가던 그 시절이 빛나서 자꾸만 찾아가는 것이려니 짐작한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바랜다. 사실을 받아들일 당시에는 원색으로 선명하던 것들이 일 분, 한 시간, 하루를 품으며 내가 남기고 싶은 색으로만 기억의 창고에 보관된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작동해서 포토샵 처리를 한 사진처럼 그럴듯하게 새겨진다. 그래서 힘든 시간도 흘러가면 아름답게 여겨진다. 하루를 살아내느라 고달픈 나날에 과거로 건너간 시간을 덧대면 오늘의 삶까지 행복해진다. 이것이 절대자가 인간에게 베푸는 시간의 마술이다. 기억을 관장하는 뇌가 고장 난 이들에게는 언제나 행복하라는 특별한 주문이 덧붙는다.
   늘 행복하지는 않아도 아버님에게 새집에서의 추억이 생기면 좋겠다. 새집에서 건강하게 일 년 정도 지내며 지난 시간을 안주로 삼아 적당히 술 드시다 유택幽宅에 드시면 싶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과한 일이다. 가부장적인 아버님 시중에 어머님은 힘겨울 거다. 다만 평생 고생한 아버님이 병실이 아닌 집에서 생을 마감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실현되지 않을 바람을 일으킨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여러 번 체험한 이로써 아버님 사후에 주변인 모두가 후회할 일이 최소화되기를 바라기에 그리 생각해본다.
   마른 꽃잎을 주워들고 밖으로 나간다. 부는 바람에 꽃잎을 맡긴다. 빛이 바랜 먼 시간보다 생의 갖은 색으로 가득한 지금 여기에서 내 색을 발하리라. 아직 쌀쌀하기는 해도 햇살이 마음을 간질인다. 동장군에게 기가 눌린 생명이 살며시 기지개를 켠다. 꽃샘추위가 곧 밀어닥칠 테지만 젖은 마음을 말려줄 명주바람은 금방 태산을 넘어 나타날 거다.
   봄이 저 멀리서 무심히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