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삶의 시간을 켜켜이 안고 동해남부선 기차는 오늘도 무던히 철길을 달린다. 기차 좌석에 앉아 열차 바퀴가 레일에서 꿈틀하며 움직이는 순간을 느껴보았는지…. 무시로 동해남부선 기차에 오를 때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씌어졌다.…혼자만의 여행은 모든 점에서 내 창작의 집이다.”"
동해남부선, 사라지는 길을 따라(下) / 글·사진 김나현
기차가 서지 않는 서생역
월내역과 남창역 사이, 지금은 기차가 서지 않는 서생역이 있다. 울산 옹기박물관, 진하해수욕장에 들렀다가 서생포왜성을 탐방하고 오는 길에 예정에 없이 들렀다. ‘서생역’이라 적힌 녹슨 철 구조물 간판이 그곳에 서생역이 있었음을 일러준다. 간이역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 역엔 두어 채 있는 민가에서 몇 발자국 앞으로 기차가 지난다. 역사도 없고, 역무원도 없다. 인적 끊긴 휑한 간이대합실엔 썰렁한 바람이 머물고 마른 낙엽만 뒹군다. 기차 소리를 평생 듣고 살았다는 할머니 한 분이 대합실 주변에 쌓인 낙엽을 기역자로 허리 접어 쓴다. 이런 모습도 철길이 있어 하나의 그림으로 눈에 담긴다. 이런 역에서는 낡은 역 표지판 옆에 서서 달리는 기차의 창밖 풍경으로 손 흔들고 싶어진다.
철길 바로 아래, 낡은 양옥 2층에 붙은 색 바랜 ‘도미 다방’이란 글씨마저 정겨운 서생역.
빠른 철로에 조는 손님아/이 시골 이 뎡거장 행여 이즐라/한가하고 그립고 쓸쓸한 시골 사람의/드나드는 이 뎡거장 행여 이즐라
김영랑의 이런 시가 생각나는 역….
옹기마을이 가까운 남창역
기차는 다른 구간에는 없는 터널을 두 개나 지나고서야 남창역에 들어선다. 기차여행을 하며 역전마다 장이 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창·덕하·호계·경주·안강역 주변에는 지금도 장이 선다. 남창역에서 내린 것이 두 번째다. 처음엔 외고산 옹기 마을에 가기 위해서였고, 이번엔 남창 오일장에 갈 목적이다. 3·8장인 남창장은 부전 시장 규모의 시장을 칸막이 없이 펼쳐놓은 듯 넓다. 없는 물건이 있을까. 의류며 생선과 육류, 건어물과 약재, 곡식과 채소를 비롯해 시장 명물인 뻥튀기며 냉국수, 돼지국밥 등등. 100년 가까운 전통의 이 장에는 먼 데서도 기차를 타고 와 전을 펼치는 장꾼이 많다. 20리 밖에서 왔다는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한테서 토실한 영천 생땅콩을 사고, 기장에서 온 아저씨 가게에서는 통통한 쥐포를 샀다. 점심으로 4천 원짜리 난전 냉국수를 먹고 역으로 돌아 나왔다. 시장 입구 천막집 뻥튀기 가게 주인은 뜨거운 날씨에 개점휴업 상태로 올 때부터 낮잠만 자고 있다.
기와지붕이 고풍스러운 불국사역
경부선 직지사역이나 경전선 다솔사역처럼 사찰 이름을 딴 불국사역. 1시간 50분쯤 걸려 불국사역에 내리면 색다른 역 모습에 여행 온 실감이 난다. 기와지붕을 한 역 건물이 천년고도 경주답다. 여기서는 경주 시내 어디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여름 기온이 강도를 슬슬 더해갈 무렵 힐튼호텔 우양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이중섭 전’을 보러 갔다 나오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후려치는 비에 대책 없이 운동화 속까지 흥건히 젖어 불국사역으로 돌아왔다. 역 앞 소문난 갈비국숫집에서 갈비국수를 먹으며 옷이 젖은 줄도 잠시 잊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잔치국수에 곁들여 나오는 야들야들한 양념 갈비구이는 자칫 서운할 속을 든든하게 채워준다. 밥때엔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야 할 만큼 손님이 몰리는 이곳을 맛의 집으로 추천한다.
불국사역이지만 불국사가 그리 가깝지는 않다. 역 앞에서 버스를 타면 20분여 걸린다. 도심에서 다소곳이 물러앉아 처음 봐도 소꿉친구의 고향 집처럼 푸근한 불국사역!
성동 시장 앞 경주역
부산에서 경주까지 승용차로야 한 시간 거리다. 그러나 눈과 가슴이 시원해지는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동해남부선을 타면 된다. 친구와 동행한 날, 경주 해장국을 먹으려고 팔우정 삼거리로 가는 길을 행인에게 물었는데 길 안내뿐 아니라 음식 대접까지 푸짐하게 받았다. 이런 뜬금없는 마주침이 여행 기분을 한껏 부추긴다. 역 앞으로 5분여 걸어가면 팔우정 삼거리가 나오고 그곳에 해장국 거리가 있다. 경주 별미인 메밀묵콩나물해장국을 파는 식당이 밀집해 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고 메밀묵과 콩나물, 해초류로 끓여 그 맛이 맑고 개운하다. 자투리 시간이 나면 역 건너 성동 재래시장을 돌아보자. 물론 저녁 장을 미리 봐서 기차를 타는 것도 무한자유 아니겠는가. 그러나 경주에 와서 역사의 흔적을 탐방하지 않으면 헛배 부른 거나 다름없을 터. 버스로 갈아타고 남산 삼릉 쪽으로 올라 산에 널린 불교유적 군을 탐방하고 돌아와도 충분하다. 혼자서면 어떠랴. 이웃 동네 마실가듯 경주 가는 기차에 훌쩍 앉아보자.
칸나 꽃 붉게 타는 안강역
편안하고 편안하다는 안강역은 그 이름에서 간이역 느낌이 물씬 난다. 역무원 없는 역에 하루 두어 번 완행열차가 저 혼자 서고 떠나는 역 같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그만 길이 끝나버린다. 순간 당황스러운데 저만치 높은 곳에 ‘안강역’이라는 간판이 조그맣게 보인다. 길이 끝난 게 아니라 목적지에 다다른 거였다. 2층 대합실로 올라가니 밋밋한 외관이 무색하게 기차역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막 비질한 오래된 한옥 마당에 들어선 듯 내부가 정갈하다. 여러 역의 승차장을 가보았지만, 이곳만큼 기찻길이 놓인 풍경이 잘 어울리는 곳은 없었던 것 같다. 철로를 따라 새빨간 칸나 꽃이 태양에 맞서 정열을 발산하고 있다.
안강 장날인 4·9일을 비켜서 인가. 마침 대합실이 비어 있어 역무원에게 말 걸기가 수월하다. 최용석 역장은 질문에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남창 장날의 붐비던 남창역이 생각나 “이곳은 한가하다.”라고 말을 건네자, 이곳도 장날이면 그만큼 붐빈다고 말한다. 남창장보다 세배는 클 거라니 슬몃 궁금해진다. 기차가 지금은 하루 2회 운행하지만, 한때는 8회나 운행할 만큼 이용객이 많았단다. 30년 전 안강역에 근무할 당시 하루 이용객이 삼천 명에 달했다며 머나먼 전설처럼 얘기한다. 통학생을 비롯해 장을 보러 가거나 장을 펼치러 가는 이들로 기차역은 늘 붐볐다고. 역의 역사에 그의 이름도 기록되어야지 싶었다.
경주 양동민속마을이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바로 차를 몰아 양동마을도 돌아보았다. 가보고 싶었던 곳을 이렇게 느닷없이 가게 될 줄이야. 바로 자유로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날 오천 원짜리 갈비국수를 먹으러 굳이 불국사역으로 향했다.
동해남부선 종점 포항역
드디어 종착역이다. 동해남부선을 제대로 둘러보자고 시작한 여름이 벌써 저만치 물러갔다. 종점이라는 말이 꽤 낭만을 부추긴다. 이제 발길을 어디로 향할까. 죽도시장, 구룡포, 보경사…. 선택은 자유다. 여기는 동해남부선이 끝난 곳. 일단 역 앞 광장으로 나간다.
무수한 삶의 시간을 켜켜이 안고 동해남부선 기차는 오늘도 무던히 철길을 달린다. 기차 좌석에 앉아 열차 바퀴가 레일에서 꿈틀하며 움직이는 순간을 느껴보았는지…. 무시로 동해남부선 기차에 오를 때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소설의 대부분은 여행지에서 씌어졌다.…혼자만의 여행은 모든 점에서 내 창작의 집이다.”
김나현 -------------------------------------------------
김나현님은 여행작가. 《수필과비평》, 《여행작가》로 등단, 《문학도시》취재기자, 수필집 《바람의 말》, 《화색이 돌다》 시집《달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