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화창한 봄 사월에 느닷없이 닥쳤던 무서운 해일은 멀리멀리 사라져 가는가. 그래도 상처를 흔적으로 남기면서 차츰 봄날이 다가왔다. 뉴스가 올해 ‘경칩’은 유난히 따뜻하다고 했다. 새소리 들리고 볼록볼록 꽃봉오리 부푸는 봄날이 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이젠 다 내려놓고, 남편이 내 곁에서 오래오래 같이 늙어가길 바라는 이 마음에도 봄날이 활짝 피겠다."
봄날 - 정영숙
꽃이 피지 않는 봄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이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간 남편이 나를 불렀다. 내 사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쩍 얼굴에 살이 빠지고 기침감기가 잘 낫지 않아 걱정하던 차여서 달려갔다. 남편은 입원을 해야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의사를 만나러 가는 남편을 따라갔다.
‘결과를 알 수 없음.’ 걸어놓은 사진 옆에 쓰인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머리가 멍해지면서 ‘뭐지?’ 싶었다. 의사는 내시경검사를 하지 못했다면서 큰 종양이 가득한 사진을 보여줬다. 암일 것이라 했다. 빨리 수술하지 않으면 장이 막힐 수도 있다고 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나 보던 상황이 바로 내게 일어나고 있었다.
얼굴이 핼쓱해진 남편이 의사에게 떠듬떠듬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검진을 해마다 받았지만 내시경 검사는 못 했다고. 병원에 예약만 해놓곤 시간을 못 냈다고. 참담해지는 남편의 표정이 지지직 연기를 내며 내 심장에 낙인 되었다. 후회가 온몸을 휘감았다.
남편 몰래 담당 의사를 찾아갔다. 자녀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부르면 곧 올 수 있습니까? 담당의는 무엇을 암시라도 하듯 물었다. 붙들고 있던 평정심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몸이 물먹은 솜뭉치처럼 처졌다. 애써 담담하려는 남편에게 퉁퉁 부은 얼굴을 보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병원에서는 서울로 갈지 여기서 수술할지를 빨리 정하라고 했다. 형제들과 의논해서 서울에 있는 A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급하다고 했지만 나흘을 더 기다려야 했다. 병원보다 집이 더 편할 것 같다는 남편의 말에 사흘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해 줘야 할지,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거운 누름돌이 가슴에 얹혀 있었다. 남편은 죽을 먹으면서 이틀을 지냈다. 깊은 밤에 속이 갑갑하다 했다. 장이 막힌 것 같다며 힘들어 했다.
대학병원 응급실로 갈 준비를 하는데 지금 이 현실이 꿈처럼 아득했다. 옷을 갈아입는 남편의 등에 기대며 서서 말했다. ‘이게 꿈이면 좋겠어. 꿈이 아닐까.’ 떨리는 내 목소리가 귀에 설었다. 남편은 옷을 입다가 말없이 고개를 든 채 깊은 한숨만 내뱉었다. 평소라면 또 쓸데없는 걱정 한다며 큰소리로 나무랄 텐데. 그러면 난 안심이 될 텐데.
앰뷸런스를 불렀다. 이곳에선 더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코에 호스를 넣어 응급처치를 하면서 걸으라고 했다. 몇 시간을 걸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A병원의 예약일은 내일이다. 내일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시동생부부가 남편 곁을 지키는 동안 짐을 챙기기 위해 집으로 왔다. 꼬박 밤을 샜는데도 피곤하지도, 새벽 3시에 혼자 밤길을 걸어도 무섭지도 않았다. 손이 떨리고 마음만 자꾸 후들후들 후들댔다.
어둠을 뚫고 4시간여를 달렸다. 서울의 날이 밝아왔다. A병원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겁이 났다. 낯선 병원에서 나 혼자서 잘할 수 있을까. 무사히 입원이나 할 수 있을까. 휠체어에 남편을 태우고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가르쳐 줘도 어디가 어딘지도 몰라 휠체어를 밀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배정된 응급실로 갔으나 환자가 너무 많아 자리조차 없었다.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응급실 침대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휠체어에 앉은 채로 하루 꼬박 그 길고도 길었던 기다림을 잘 견뎌주었다. 다행히 자정 넘은 시각에 일인 실이나마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만만 해도 살았구나 싶었다.
입원한 지 나흘 만에 남편은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미뤄질까 얼마나 마음 졸였던가.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수술이 잘됐는지, 나는 의사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회복을 기다려 첫 미음을 먹었다. 뭐가 잘못됐을까, 몸에 열이 오르고 구토를 했다. 다시 금식에 들어갔다. 열흘 넘게 음식을 먹지 못해 체중이 급격히 빠져나갔다. 걸으라고 했다. 시간마다 걸었다. 아니 걸어야만 했다. 병원의 긴 복도를 걷고 또 걸었다. 차츰 링거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만큼 남편의 걸음걸이가 조금씩 회복되었다.
남편의 병기는 2기 후반이었다. 다행히 전이된 곳은 없는 것으로 판명 났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그러나 항암치료는 필요하다고 했다. 불안을 안고 입원한 지 보름 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될 줄 알았다. 근데 퇴원한 지 사흘이 되던 날 장폐색증이 오고 말았다. 남편은 복통에 시달렸다. 또 대학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코에 호스를 넣고 밤새 걸었다. 그게 치료였다. 나아질 기미가 없자 의사는 서울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다시 처음처럼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로 달렸다. 뜨는 해를 보면서 병원에 도착했다. 서서 걸으라고 했다. 긴 병원 복도를 또 걷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 상황이 납득이 안 가는지 의욕이 없어 보였다. “이런 거란 말이지…. 앞으로도 이럴 거란 말이지.” 혼잣말을 하면서 낙담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절망과 희망을 오가면서 이 복도를 걸었을 것인가. 뒤를 따라 걸어야 했던 사람의 기도는 또 얼마나 간절했을 것인가. 따라 걷는 그 복도는 나도 모르게 기도하게 한다.
“숙아… 니가 고생이 많다.”
생뚱맞게도, 창가에 앉아 잠시 쉬던 남편이 나를 돌아보면서 쓸쓸히 웃었다. 어쩌면 웃음과 울음은 동질의 것인지 모른다. 짐짓 못들은 척 얼굴을 돌렸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병원 정원엔 생기 가득한 초록과 봄꽃이 어우러져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일주일 만에야 장이 풀렸다. A병원의 한 병동에 남편과 나의 잊지 못할 많은 사연들을 남겨두고 열흘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천 리 길 서울을 오고 가면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잔인한 봄은 길었다. 바람은 목이 메어 지나가고.
그 화창한 봄 사월에 느닷없이 닥쳤던 무서운 해일은 멀리멀리 사라져 가는가. 그래도 상처를 흔적으로 남기면서 차츰 봄날이 다가왔다. 뉴스가 올해 ‘경칩’은 유난히 따뜻하다고 했다. 새소리 들리고 볼록볼록 꽃봉오리 부푸는 봄날이 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이젠 다 내려놓고, 남편이 내 곁에서 오래오래 같이 늙어가길 바라는 이 마음에도 봄날이 활짝 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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