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정신은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고 있다. 정신의 올바른 배설문화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언젠간 도서관의 등불이 꺼질지도 모른다. 배설 통로가 막히면 몸이 병들 듯 정신의 배설통로가 막히면 정신 또한 사망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혼에 불이 꺼진 깜깜한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다. 먼저 육신이 살아야 정신도 살찌울 수 있으니, 큰 사명을 가지고 그걸로 위안 삼으라 다독여줘야겠다."
도서관장과 분뇨처리장 - 양미경
K시에 사는 조카가 전화를 해왔다. 남편은 공무원인데, 얼마 전 도서관장에서 분뇨처리장으로 발령을 받아 속이 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도서관은 깨끗한 사무실에서 항시 책과 가까이할 수 있으니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부서라 생각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분뇨처리장 발령이라니, 당황했던 모양이다.
하수종말처리장이나 분뇨처리장은 도시가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소이다. 만일 도시의 그 많은 오폐수를 이들 장소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도시는 어떻게 될까. 먹지 않고는 보름도 견딜 수 있지만 볼일 보지 않고는 하루도 못 버티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다.
모든 생물은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신진대사가 기본이다. 우리 몸은 섭취한 음식물에서 에너지를 태운 뒤 신진대사를 통해 찌꺼기를 배출한다. 이 찌꺼기가 배출되지 않으면 새로운 에너지를 생성할 수 없으니 그 다음이야 말해 무엇 하리. 그런 의미에서 분뇨처리장은 우리들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책임지는 중차대한 기관이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이십여 년 전, 금강산을 관광할 적의 일이다. 소변은 마려운데 그 어디에도 화장실이 보이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한 발자국도 옮겨놓지 못할 지경에 이르러 나는 어머니와 함께 숲 사이로 숨어들었다. 공안요원의 날카로운 두 눈이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배설 못한 고통이 더 컸었으니까.
생명환경의 유지를 위해 분뇨처리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정신의 생명유지를 위해서도 도서관은 필요하다. 달리 생각하면 도서관은 또 다른 의미에서 정신의 하수종말처리장은 아니겠는가.
문자가 만들어진 이래 인간의 지혜가 담긴 것이 책이고, 그 책을 집대성 해둔 곳이 도서관이다. 역사·정치·법률·예술 등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의 정신적 신진대사가 도서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로, 생각은 바로 창조의 신진대사 과정이다. 음식물이 대사과정에서 에너지를 추출하고 육신을 살찌운다면, 생각은 정신을 살찌운 또 다른 신진대사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그 같은 발판 위에 세워졌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도서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출판사는 지혜의 보고였던 백과사전출판에서부터 손을 떼고 있다고 한다. 국내 최대 출판사였던 동아 출판사의 도산도 백과사전을 제작하면서 받은 어마어마한 손실 때문이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사전들을 비치하고 있었다. 백과사전을 서가에 보유하고 있다면 꽤 지적인 가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백과사전을 찾지 않는다. 컴퓨터 검색창에다 정보를 요구하면 순식간에 수십 개가 튀어나오는 세상인데 두꺼운 책장을 침 묻혀 뒤질 필요가 무에 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내가 사는 통영에도 70년 전통을 자랑하던 서점이 지난해 문을 닫았다. 서점이 폐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자신도 공모자의 한 사람만 같았고, 일거에 자존심이 무너진 것 같은 생각에 한동안 허탈했었다.
요즘 도서관은 한산하고 하수종말처리장은 잘 돌아간다. 몸뚱이는 살아있고 영혼은 죽은 상태라면 지나친 표현일는지. 정신이 죽고 육신만 살아있다면 좀비에 가깝다. 죄의식 없이 아무 짓이나 저지르는 존재가 좀비다. 벌써 그런 조짐을 우리는 묻지 마 살인, 늘어나는 10대들의 범죄, 교육 받았다는 부유층의 ‘갑질’ 등등 여러 자리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의 정신은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고 있다. 정신의 올바른 배설문화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언젠간 도서관의 등불이 꺼질지도 모른다. 배설 통로가 막히면 몸이 병들 듯 정신의 배설통로가 막히면 정신 또한 사망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영혼에 불이 꺼진 깜깜한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다. 먼저 육신이 살아야 정신도 살찌울 수 있으니, 큰 사명을 가지고 그걸로 위안 삼으라 다독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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