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인자의 수필은 인간이 살면서 고뇌하게 되는 일련의 문제들을 조용히 끄집어내어 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얻은 결론은 함께 어우러지고 같이 호흡하며 사는 삶이 가치 있음이다. 즉, 포용하고[圓] 버무리고[融] 만나고[會] 소통하고[通]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내는 작가의 삶의 태도이다. 포용을 위해서는 직선적 사고에서 벗어나 원형적 사고를 해야 하고, 두 개념의 버무림에는 녹여서 하나가 되게 하는 융합이 요구됨을 말하고 있다. 또 현대사회에서는 만남의 패러다임도 잡종교배의 다양함과 풋풋함이 넘쳐나야 하고, 세상만물과의 소통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배려가 요구됨을 드러내고 있다. 심인자의 수필에는 심인자가 있다. 우리는 그래서 그의 수필을 즐겨 읽는다."
원융회통圓融會通의 궤적,그 의미를 찾아서 - 강돈묵
- 심인자의 ≪왼손을 위하여≫의 경우
1. 들어가기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통섭 이론과는 달리 이어령은 한국사회에 적합한 규명을 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음식물을 함께 어울리게 하는 ‘비빔밥문화’, 모든 걸 버무려 한입에 넣는 ‘보쌈문화’처럼 섞고 버무리는 게 통섭”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통섭이론을 ‘원만하게 포용하고(圓) 버무리고[融] 만나고[會] 소통하는[通]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정신’이라고 ≪젊음의 탄생≫에서 강조한다. 한국 문화는 하나 이상의 것이 녹아서 하나가 되는 융합의 시대를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하는 그는 통섭에서 필요한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정신’을 교육의 현장에서 적용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포용하는(圓) 정신은 선형에서 원형으로 바뀌는 패러다임이다. 21세기가 그동안의 20세기까지와 전혀 다른 새로운 변혁을 일으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직선적 사고에서 원형적, 순환적 사고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일 것이다.
버무리는[融] 정신에서는 우리 교육의 변혁을 요구한다. 그는 우리 교육은 앞으로 이중적 사고-노동인간과 놀이인간의 두 인간관이 이항 대립을 넘어 하나의 융합한 총체적인 가치의 사고 체계로 전환하고,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항 대립 체계에서 이항 융합 체계로 교육 패러다임을 바꿔 나갈 때, 질 들뢰즈의 초월론적 지평이 나타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초월론적 지평은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자기와 타자라는 구별 이전의 상태이다.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불을 끄고 떡을 썰고 글씨를 쓰는 반복적이고 균일한 노동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은 그러한 관습과 관행의 조건 반사적이고 기계적인 행동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황홀한 깨달음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圓과 융融 다음에 오는 방법은 바로 만남의 패러다임, 즉 회會의 정신이다.
학교는 순종교배의 순수함을 보전하려는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잡종교배의 다양함과 풋풋함이 넘쳐 나는 새로운 실험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제일을 정해 놓고 그것만을 추구하던 교육은 이제 의미를 상실했고, 모든 사람이 서로 포용하고 버무려서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피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끝으로 소통[通]의 정신은 커뮤니케이션의 뉴 패러다임을 요구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의식주의 생산 양식에만 마음을 팔아 애써 동물로부터 분리된 인간만의 미디어 환경을 만들어내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동물적 상태에 머물게 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범람해도 일대 일의 퍼스널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선생과 학생,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 단절은 개인의 얼굴을 상실한 익명의 대중사회로의 필연적인 귀결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서양의 닫힌 세계관이 아니라 동양의 열린 세계관으로 서로 포용하고 버무리고 만나고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원융회통’의 정신이다.
2. 심인자의 수필세계
심인자는 2006년 여름, 첫 번째 수필집 ≪야누스의 얼굴≫을 상재하고, 이번에 두 번째 수필집 ≪왼손을 위하여≫를 독자들 앞에 내놓았다. 남의 눈을 현혹시키는 발칙함이 없이 언제나 고요하면서도 심안으로 세상을 읽어내려는 작가의 진지함이 전편에 걸쳐 돋보인다. 그 진지함의 기저에는 작가만이 갖는 세상읽기와 해석하기가 내재되어 있어 독자들의 가슴에 촉촉이 잦아든다.
수필이 작가의 삶이듯이 이 책 역시 작가 심인자의 살아 숨 쉬는 모습이다. 이 책에는 작가 심인자가 있다. 책명인 ‘왼손을 위하여’에서 보듯 그는 현란한 몸짓보다는 약자의 그늘진 삶에 끝없는 애정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고 대처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고 있다. 요란한 것만이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며 말없이 아픔을 삭이는 삶도 나름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 심인자가 세상을 어떻게 더불어 넘나들고 있는지, 또 어떻게 세상을 읽어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정신에 의탁해 본다.
2-1. 포용(圓)의 궤적
정보화 시대는 그 이전의 긴 세월 동안의 인식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는 엄청난 변혁을 선물하였다. 모든 것의 길은 하나이고, 그 길을 따라 질주하는 것만이 최선이던 때에는 직선만이 요구됐다. 교통법규도 직진 우선이고, 오로지 목적지를 향한 직선적 사고만이 있었다. 한 치의 느림도 용납할 수 없는 최단의 길이인 직선만을 선호하던 사고는 21세기를 맞자 원형적, 순환적 사고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심인자의 수필세계에서는 직선적 사고와 원형적 사고가 어떤 모습을 하고 독자 앞에 나타날까. 정보화 시대의 삶은 어찌 보면 질주만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오로지 편리와 빠름만이 가치의 척도가 되어 있다. 인간의 사고는 물론 사물의 가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마트폰의 출현은 인간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판이한 다른 세계로 옮겨 놓았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인간의 기억력에 차단기를 내리게 하고 두뇌 활동의 정지를 초래했다. 심인자는 여기에 조용히 반기를 들고 좀 늦고 불편해도 인간성 회복을 희원한다.
이젠 그를 떼어 놓으려 한다. 처음엔 그를 놓쳐 서운하고 아쉽고 절실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침묵할지 모를 그이기에 온전히 맡기기가 두렵다. 그 덕분에 편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다시 그가 침묵한다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날, 그에게서 겨우 돌려받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의 연락처를 머릿속으로 넣는 작업을 한다. 여전히 숫자들이 숨바꼭질하듯 나타나고 숨기를 반복하지만 하나하나 찾아내어 꼭꼭 묶어둔다. 얼마가 걸리더라도 이 작업을 계속하며 문명의 이기를 서서히 멀리할 참이다.
-<일곱째 날>에서
늘 편리하게 사용하던 폰이 고장 나서 수리하러 보낸 일주일의 삶을 그렸다. 기계는 언젠가는 생명을 다하여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작가는 놓이게 된다. 불편을 감수하면서 기계의 노예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역력하다. 그 이유는 너무나 폰에 의존하다 보니,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지인의 전화번호 하나가 없더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작가의 순환적 사고는 비록 불편은 있어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고의 변환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현격한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 작가는 좀 늦더라도 포용하는 자세로 세상살이를 도모할 필요성 앞에 숙연해 있다.
중심은 어떤 사물의 가운뎃자리를 찾는 것이다. 난 중심을 잡는 게 아니다. 한가운데가 아닌 한쪽으로 치우쳤더라도 그에 맞는 균형을 잡고자 함이다. 리모컨 속에 든 여러 가지 부품들의 무게를 일일이 알지 못해 번번이 애를 먹듯, 아이들도 그렇다. 속을 다 알았다고 하지만 아니다. 깊은 속은 꼭꼭 숨어 있어 나름 고민하고 무게를 제대로 가늠해야 한다. 고만고만한 키에 얼굴도 비슷비슷해서 그 녀석이 그 녀석 같다. 그래서 아이들 전체가 아니라 개개인 하나하나에게 균형을 맞춰줘야 함이다.
-<균형잡기>에서
이렇게 어떤 것이든 포용하고자 한다면 원형적이고 순환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는 작가의 동양적인 열린 세계관이 있어야 가능하다. 아무리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 해도 용도가 없는 곳에서는 그 가치를 정당히 얻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귀한 작물이라 해도 잔디밭 안에서는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어떠한 것을 포용하려면 그것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이것이 포용의 출발점이다. 상대를 인정해줌으로써 그의 존재가치가 빛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위의 <균형잡기>에서 작가는 아이들의 교육의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아이들마다 가지고 있는 특성과 가치를 인정하고 신뢰해 주어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이를 포용하기 위해서 더러는 간지럼을 태우기도 해야 하고, 목소리를 바닥까지 깔고 말없이 있어야 함도 고백한다. 이게 포용하는 삶의 지혜이다.
오른손은 벌써부터 흥분되나 봐. 당연히 귀하디귀한 오른손 차지일 테니까. 왼손은 별 기대도 하지 않아. 이런, 이변이 일어났어. 주인이 풀죽어 있는 왼손을 살짝 잡아당기는 거야. 그리곤 마디 굵은 약지 손가락에 끼워주는 것 있지. 그때 오른손의 미세한 떨림을 봤어. 얄밉기만 하던 오른손에게 그 순간 어찌나 미안하던지. 영광을 누리는 건 당연히 오른손일 거라 생각했거든.
왼손의 우울함은 깨끗이 사라졌어. 그간의 노고를 단번에 보상받았기 때문이지. 주인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에 비하면 거칠어 형편없지만, 약지에 껴진 보석 반지가 그 허물을 다 덮어주더라고.
-<왼손을 위하여>에서
대열에서 앞서가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꼴찌도 나름은 소중한 가치가 있다. 언제나 앞에 서서 자랑하고 있는 오른손이지만, 반지를 하사받고 사랑을 받게 되는 것은 왼손이다. 평소에 오른손의 재능과 역할에 기죽어 살던 왼손, 늘 부러움으로 바라보기만 하던 왼손. 그러다 보니 늘 오른손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산다. 그 왼손의 나약함에 작가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포용을 위해서는 약자를 끌어안는 포용이 필요하지만, 더러는 약자가 강자에게 베풀어야 하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여하튼 포용(圓)의 정신은 직선적 사고가 아니고 원형적, 순환적 사고이기에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2-2. 버무림(融)의 궤적
어찌되었든 지금까지의 우리의 사회는 일하는 사람을 요구했다. 팍팍한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오로지 일하는 노동인간을 육성했고, 그것만이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였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노동인간과 놀이인간을 동시에 요구하는 사회로 옮겨 왔다. 이렇게 노동을 할 수 있으면서도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이중적 사고를 하는 인간이길 원하는 사회가 되었다. 여기서 요구된 것이 버무리는[融] 정신이다. 우리 사회는 노동인간과 놀이인간의 두 인간관이 이항 대립을 넘어 하나의 융합한 총체적인 가치의 사고 체계로 전환하기를 요구한다. 이항 대립 체계에서 이항 융합 체계로, 교육 패러다임을 바꿔 나갈 때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 자기와 타자라는 구별 이전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심인자의 수필에서는 노동할 수 있는 힘과 그 힘의 부재를 채우기 위한 왕성한 에너지의 갈망, 아我와 비아非我의 갈등을 통한 버무림[融]의 정신을 보여준다.
<바꿀 수 없는 부품>에서 보면 자명종이 건전지가 다 소모되어 식구 모두가 늦잠을 자게 되고, 출근시간에 늦어 소란을 피우게 된다. 손가락만한 건전지가 이토록 세상을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노동의 힘이 이만큼 커다란 위력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새 건전지로 인해 노동력을 얻자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하는 자명종. 작가는 여기서 나이 들어 쇠약해지는 자신의 몸을 발견한다. 머지않아 자명종처럼 느닷없이 멈춰버리는 날이 자신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예측을 한다. 그때 고장 난 부품을 갈아끼우면 다시 노동하는 기계처럼 자신도 그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손상된 몸의 부품을 슈퍼에서 갈아끼울 수 있는 날이 오길 희원하며 왕성한 건전지로 바꾸겠다는 생각에 젖는다.
이런 세상이 온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다. 아픈 이를 통증 없이 단번에 뽑아버리고 대형 마트에 가서 사온 새 치아를 건전지 교체하듯 바꿔 끼는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장 난 기계는 새 부품을 끼우면 되지만 사람은 그럴 수가 없으니. 급변하는 의술의 발달로 장기 이식도 일부 가능하다지만, 그게 그리 쉬우며 모든 환자에게 다 통하는 일이던가.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나이를 먹어가니 이젠 내 몸에 대해서도 조심스럽다. 여기저기 덜컥거리며 고장이 나려 해 조금만 이상이 느껴져도 무섭고 두려움이 앞선다.
-<바꿀 수 없는 부품>에서
<작은따옴표>에서는 대립되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자의식이 버무려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산다. 그 말도 날이 선 채 우렁차게 퍼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속으로 삭이고 마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후자의 길을 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밖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후탈이 없다는 지론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을 대부분 가슴으로 달래다 보니, 작은따옴표가 되더라고 실토한다. 이 글에서는 말하고 싶은 바를 참아내는 ‘아’와 참기를 거부하는 ‘비아’ 사이에 무던히 갈등한다. 결국 이 두 갈등요소를 잘 버무려야 삶이 원만하다. 그래야 가지고 있는 감정이 순화되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삶을 효과적으로 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점차 ‘작은따옴표’의 사용이 줄어들고 있음을 탄식한다.
작은따옴표가 주는 묘미를 안다면 무작정 쏘아대는 화살로 생채기 내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너무 화나서 심장이 멎어버릴 정도로 힘들 때는 참지 말고 표현하는 거야. 나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도와 줘.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지. 내 눈물 좀 닦아 줘. 감당하기 버거워. 미워서 다신 안 보고 싶을 때도 있잖아. 당분간 내 앞에 안 보이면 좋겠어. 그동안 노력해서 그 마음 없애 볼게.
감정은 정말 한순간인 것 같다. 그 시기만 잘 넘기면 격한 감정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던가. 작은따옴표 속에서 마음껏 쏟아내 보길 권한다. 정말 힘들 땐 그의 힘을 빌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미세한 감정의 움직임을 상대방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터이니. 작은따옴표 속을 아무도 들춰볼 수는 진정 없을 터이니 말이다.
-<작은따옴표>에서
이와 같이 대립되는 두 개념을 함께 버무리게 되면 많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이 같은 점을 심인자는 ‘노동인간’과 ‘놀이인간’의 버무림, ‘아’와 ‘비아’를 버무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2-3. 만남[會]의 궤적
선형에서 원형으로, 즉 직선적 사고에서 원형적, 순환적 사고로 바꾸는 패러다임인 포용하기[圓]와 노동인간과 놀이인간의 두 인간관이 이항 대립을 넘어 하나의 융합한 총체적인 가치의 사고 체계로 전환하는 버무리기[融]가 된 다음에는 바로 만남의 패러다임, 즉 회會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작금의 현상은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 모두가 함께하는 다양한 만남의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제일주의만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순종교배를 통한 엘리트주의였다면, 요즈음은 잡종교배로 다양함과 풋풋함에 가치를 두는 때가 되었다. 구성체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홀함이 없도록 배려한다.
여기서 요구된 것이 모든 것의 만남[會]의 정신이다. 혼자 잘나면 된다는 의식에서, 함께 공유하여야 하고 같이 힘을 모아 집대성하는 것에 가치의 척도를 둔 것이다.
심인자의 <둘부터>에는 이런 정신이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 ‘하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둘 이상이 모여야 한다. 반드시 ‘둘’이 아니고 ‘둘 이상’이라 한 것은 ‘만남’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명료하게 나타낸 것이다.
작가는 어떤 물건을 사든 반드시 둘 이상이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나는 무가치하기에 그렇다. 그리고 가까운 곳을 다녀와도 혼자는 삼간다. 시장을 나가면서도 같이 갈 사람을 구하고, 그러다 자기 혼자임에 외로워한다. 시장 한복판에서 골동품을 구경하더라도 두 개를 찾는다. 마음에 드는 항아리를 하나 고르고는 또 하나를 찾는데, 다른 사람이 집어간다. 결국 항아리를 포기하고 접시로 방향 전환을 한다. 접시는 둘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은 ‘모이다’, ‘만나다[會]’의 개념과 일치한다. 아무리 포용하고 잘 버무려도 함께하지 않으면 큰 힘을 얻을 수 없음이다.
언제부터인가 숫자 하나를 싫어하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가 아닌가. 그래도 난 하나가 싫다. 아무리 귀하고 예뻐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는 외로워서이다. 기댈 데가 없어서이다. 꼭 둘을 고집하는 게 아니다. 둘 이상이면 된다. 둘부터 힘이 난다. 서로 기댈 수 있고, 채워 줄 수 있어서 좋다.
-<둘부터>에서
<곰 인형과 하모니카>는 학창시절의 친구를 중년이 되어 만나는 이야기다. 고교시절 그 친구는 작가에게 하모니카를 선물하였다. 본인도 답례로 곰 인형을 선물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려 한다. 한데 작가에게는 그 친구에게 늘 뒤처졌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서 늘 같이 있으면서도 시기의 대상이었다. 졸업 후에 각자의 길을 갔고, 가정을 꾸렸다.
그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어떤 옷을 입을까 갈등한다. 값비싼 외투에, 짧은 스커트, 고급 구두, 거기에 손에는 귀금속까지 걸치고 나온 자신과는 다르게 친구는 헐렁한 티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화장기 없는 민낯이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 작가는 낙담하고 만다. 만남에는 시기와 질투가 곁들여서는 안 됨을 절감한 것이다. 만남이 진정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 신뢰하고 믿으며 같은 만남의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끄러웠다. 그녀를 친구라 생각하면서도 늘 나보다 앞서 있는 경쟁자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알 리 없었다. 오늘 그 애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사사건건 경쟁했던 자신을 나무란다. 한 껍질 벗어 던지고 나니 몸이 가볍다. 비로소 그녀를 사심 없이 내 가슴에 품는다.
-<곰 인형과 하모니카>에서
만남의 패러다임에는 현실에서만 국한할 필요는 없다. 비록 상대가 내 곁에 없다손 치더라도 그가 내 가슴에 있으면 엄연히 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부부이거나 혈족이면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바다 찾기>에서는 세상을 떠난 남편을 만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다. 술을 즐기고 가정에 등한했던 남편에 지친 어머니가 바닷가에 나가 자신의 한을 토하는 것으로만 알았던 바다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젠 어머니가 바다에 나가지 않으려니 했는데, 오히려 바다에 나가는 일이 잦다.
바다는 어머니가 그리운 남편을 만나는 장소였던 것이다. 살아생전 속을 끓이던 남편이었지만, 떠난 남편을 생각하면 미안함만이 앞서는 게 아내이다. 남편이 그리우면 혼자 바닷가에 나가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었던 것이다.
만남은 현실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의식 속에 뚜렷이 남아 있다면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장소는 상대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더욱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기에 작가는 어머니를 추억하며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고 미운 정 고운 정을 헤아리게 된다.
그리움 때문이었다. 바다에서 아버질 만나고 있었다. 잘 해준 기억보다 못해준 아쉬움이 새록새록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이 걸리고 저것이 눈에 밟혀 미안함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 분에겐 전혀 사랑이 없는 줄 알았다. 수많은 날들을 우리들에게 보인 건 다정함보다 일방적인 아버지의 호통뿐이었으니. 아버진 당연히 어머닐 미워한다 생각했고, 어머니 또한 그런 아버지에게 무슨 사랑이 남았을까 했다.
-<바다 찾기>에서
심인자의 수필에는 원圓과 융融 다음에 오는 만남의 패러다임이 잡종교배의 다양함과 풋풋함이 넘쳐 남을 볼 수 있다. 제 일을 정해 놓고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서로 포용하고 버무려서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2-4. 소통[通]의 궤적
소통의 문제가 요즘처럼 대두된 적이 있을까. 통신 기기의 발달로 감정이 실린 소통보다는 기계적인 소통이 사람의 감정을 앗아가기에 더욱 문제가 되는지도 모른다. 과학의 힘으로 소통[通]의 도구는 다양해졌지만, 현실에 맞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뉴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범람해도 일대 일의 퍼스널 커뮤니케이션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선생과 학생, 부모와 자녀 간의 소통 단절은 개인의 얼굴을 상실한 익명의 대중사회로의 필연적인 귀결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면 심인자의 수필에 나타난 소통은 어떠한가. 그 역시 소통의 어려움을 풀기 위해 ‘술’을 동원하기도 한다. 시집온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소통은 지난한 걸림돌이 있다. 아무리 편하게 해 주셔도 며느리에게는 모두가 부담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평소에 뵈올 때도 겨우 두 마디 하시던 시아버님. 그분이 술이 된 날은 며느리에게 말수가 많아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오고 갈 말이 아닌 것도 끼어든다.
평소 같으면 긴장되어 몸가짐이 불편했던 며느리도 시아버지의 취중 발언이 싫지가 않다. 그것은 진심이 내재해 있기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소통에는 그만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온전한 소통이 될 수 있다. 자못 통신기기에 의존하여 멀어질 수 있었던 사이도 술의 힘을 빌려 원활하게 지탱되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었다.
평소 아버님은 내게 딱 두 마디만 하셨다. “오는가? 조심히 가거라.” 하지만 술을 드신 날은 달랐다. 자리끼를 떠 아버님 방에 가면 인기척에 깨어 나를 불러 앉히셨다.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는지. 아이들 안부부터 시작하여 길게는 친척들 근황에 텔레비전의 주요 뉴스거리까지 끝이 없었다. 그런데도 싫지가 않았다. 솔직한 아버님의 마음을 보았던 것이다. 거짓으로 하시는 게 아니라 평소 마음에 두셨던 자식 걱정, 손주 사랑, 친척들의 근황을 술의 힘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술은 아버님과 나를 이어주는 소통의 통로가 되었다. 어머님의 극구 만류에도 아버님의 술 한 병을 챙기는 일은 끊어지지 않았다.
-<술을 품다>에서
소통에는 사람과 사람간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사람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사람과 무생물간에도 소통은 정확히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 간에는 상대의 처지를 헤아려주는 자세가 중요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배려도 반드시 요구된다. 대화를 나누는 양측의 입장에 상하가 있다면 더욱 배려를 해 주는 것이 현명하다. 또 상대의 수준에 맞는 배려가 있을 때 소통의 효과는 배가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과 동물간의 소통에는 감정의 전달에 지난한 어려움이 있다. 자신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식물은 제 감정을 자유자재로 표현하지 못하기에 섣불리 속단했다가는 위험의 늪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고양이의 눈>의 작중화자는 고양이다. 고양이가 인간 가까이 살면서 사람과의 소통을 갈망하고 있다.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아줌마는 고양이를 무서워서 기피한다. 하지만 두 객체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고양이다. 즉 진정한 마음을 알지 못하면 상대에게도 충분히 고통을 안기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고양이의 진실한 마음을 알면 인간과도 소통이 가능하다. 사람과 사람은 자신의 의중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있기에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소통의 어려움은 짐승과 사람 사이보다 더욱 크게 작용한다. 작가는 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줌만 여태껏 마음을 열지 않고 살았대.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알려하지 않았대. 오해한 적도 참 많았대. 본인의 잣대로만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로 재어왔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했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슬프게 했을까 반성한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대. 그리고 깨닫게 해줘서 참 고맙대.
-<고양이의 눈>에서
심인자의 수필에 나타난 소통의 개념은 확실하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이 되면 서로의 간격이 좁혀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의 노력으로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라 함께 노력해야 이룰 수 있는 경지이다.
소통의 문제는 사람만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물과의 소통도 요구되기에 상대를 이해하려는 배려가 간절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매사에 있어서 참고 인내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소통에 의해 다양한 것들을 포용하여 새로운 힘으로 활용할 때가 되었다.
3. 나가기
심인자의 수필세계를 ‘원융회통’의 정신에 의탁하여 살펴보았다. 오늘날처럼 하나 이상의 것이 녹아서 하나가 되는 융합의 시대를 잃어버린 한국문화에 비쳐보면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한 작가의 세계가 한 시대를 읽는 가늠자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인자의 수필은 인간이 살면서 고뇌하게 되는 일련의 문제들을 조용히 끄집어내어 나름의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얻은 결론은 함께 어우러지고 같이 호흡하며 사는 삶이 가치 있음이다. 즉, 포용하고[圓] 버무리고[融] 만나고[會] 소통하고[通] 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내는 작가의 삶의 태도이다.
포용을 위해서는 직선적 사고에서 벗어나 원형적 사고를 해야 하고, 두 개념의 버무림에는 녹여서 하나가 되게 하는 융합이 요구됨을 말하고 있다. 또 현대사회에서는 만남의 패러다임도 잡종교배의 다양함과 풋풋함이 넘쳐나야 하고, 세상만물과의 소통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배려가 요구됨을 드러내고 있다.
심인자의 수필에는 심인자가 있다. 우리는 그래서 그의 수필을 즐겨 읽는다.
강돈묵 -------------------------------------------------------------
거제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수필가. 거제대학교 교무,학생,교학,평생교육원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문인저작권옹호위원회 위원. 호서 문학상, 신곡문학상 대상, 거제문화상, 새한국문학상 본상, 문학시대 문학 대상 수상. 수필집: ≪러브레터와 로비레터≫, ≪놓아주기 연습≫, ≪흔들리는 계절≫, ≪감주와 설탕물≫(선집). 평론집: ≪본질 찾기와 수필 쓰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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