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봄을 좋아하고 신록을 쫓아 산을 찾아다니는 생물학자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루터기에 앉아서 사색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학도이지만 수필과 연리지가 되어 연둣빛 봄을 노래하고 있으니 매우 즐겁다. 또한 도시에서 살면서 시선은 자연과 벗하며 호연지기를 즐기고 있으니 영웅호걸이나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 나이 들면서 봄이 짧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지만 그래도 나는 연초록 봄이 좋다. 금수강산의 봄이 좋다."
금수강산의 봄 - 임 동 옥
신록예찬 / 이양하
봄·여름·가을·겨울 두루 사시를 두고 자연이 우리에게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도 그 혜택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우거진 이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 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 하지 아니한가.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놓은 듯이 옷을 훨훨 털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나의 자리래야 솔밭 사이에 있는 겨우 걸터앉을 만한 조그마한 소나무 그루터기에 지나지 못하지만 오고 가는 여러 동료가 나의 자리라고 명명하여 주고 또 나 자신이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솔잎 사이로 흐느끼는 하늘을 우러러볼 때 하루 동안에도 가장 기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므로 시간의 여유 있는 때마다 나는 한 큰 특권이나 차지하는 듯이 이 자리를 찾아 올라와 하염없이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물론 나에게 멀리 군속을 떠나 고고한 가운데 처하기를 원하는 선골이 있다거나 또는 나의 성미가 남달리 괴팍하여 사람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의 하나요, 또 사람이란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역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사람으로서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사람 사이에 살고 사람 사이에서 울고 웃고 부대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 -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있고 황홀한 신록이 모든 산, 모든 언덕을 덮는 이때 기쁨의 속삭임이 하늘과 땅, 나무와 나무, 풀잎과 풀잎 사이에 은밀히 수수되고, 그들의 기쁨의 노래가 금시에라도 우렁차게 터져나와 산과 들을 흔들 듯한 이러한 때를 당하면, 나는 곁에 비록 친한 동무가 있고 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자연에 곁눈을 팔지 아니할 수 없으며, 그의 기쁨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사람이란 -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에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칠정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데 마음의 영일을 갖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하고 어떻게 저속한 것인지 결국은 이 대자연의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조화를 깨뜨리는 한 오점, 또는 한 젊음밖에 되어 보이지 아니하여, 될 수 있으면 이러한 때를 타 잠깐 동안이나마 사람을 떠나 사람의 일을 잊고 풀과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한 가지로 숨 쉬고 느끼고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사실 이즈음에 신록에는 우리 사람의 마음에 참다운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앉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의 모든 티끌 - 나의 모든 욕망과 굴욕, 고통과 곤란 - 이 하나하나 사라지는 다음 순간, 별과 바람과 하늘과 풀이 그의 기쁨과 노래를 가지고 나의 빈 머리에, 가슴에, 머리에 고이고이 들어앉는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이다.
주객일체·물심일여, 황홀하다 할까, 현요하다 할까, 무념무상·무장무애,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와 유열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과 모든 읍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앙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게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이 없다.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 새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하며, 삼복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람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 청춘시대 - 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 시대는 신록에 있어서 불행히 짧다.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혹 2, 3주일을 셀 수 있으나, 어떤 나무에 있어서는 불과 3, 4일이 되지 못하여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 예컨대 이러한 고귀한 순간의 단풍 또는 낙엽송을 보라. 그것이 드물다 하면 이즈음의 섶, 밤, 버들 또는 임간에 있는 이름 없는 이 풀 저 풀을 보라, 그의 청신한 자색, 그의 보드라운 감촉의 극치의 하나가 아니며, 또 우리가 충심으로 찬미하고 감사할 만한 자연의 아름다운 혜택의 하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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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천리금수강산이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의 가르침이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보이는 방장산은 금수강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나무 숲을 제외하면 너덜겅과 민둥산뿐이었다. 왜 선생님은 금수강산이라고 하시는가? 이 금수강산은 대학시절까지 선생님이 내게 안겨 준 께적지근한 숙제였다.
금수강산에 대한 의문은 1990년대에 풀렸다. 법으로 소나무만 보존하던 시절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잡목으로 취급하였다. 당시 잡목은 땔감으로 여겨 누구나 베어갈 수 있었다. 땔감으로 나무들을 베어낸 방장산은 매년 새 맹아지萌芽枝만 나오니 녹음이나 단풍으로 물들지 않는 침묵의 숲이었다. 섬지역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 야외실습으로 찾았던 보길도 격자봉도 칠십 년대에는 다복솔만 있어서 이를 피해 황토 땅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국민소득이 증가하면서 도회지뿐만 아니라 시골마을까지 취사나 난방용 연료가 나무에서 연탄으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잡목들은 차츰 숲을 이루어서 ‘비단에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산천’으로 변하였다. 금수강산은 한 그루의 나무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얽히고설킨 초록 숲이 요체要諦다.
숲은 색으로 노래한다. 슈바르츠발트의 폭포는 흑록黑綠의 독일가문비나무가 울창한 검은 숲이라고 외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자작나무 우거진 백록白綠 숲이라고 재잘대며 달린다. 우리나라 금강소나무 숲은 적록赤綠이라고 속삭이고 봄이 되면 삼천리금수강산에는 신록과 계곡물과 새들이 합창을 한다. 초록 자연은 생명 그 자체다.
초록에도 변화가 있다. 가장 연한 초록 잎들이 사오월 맑은 하늘에 수를 놓으면 봄이고, 가장 짙은 초록이 천둥번개와 먹구름을 몰고 오면 여름이며,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날들이 가을이다. 소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사색한 이양하 교수는 <신록예찬>에서 “초록에 한하여 청탁이 없고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고 하였으나 연한 초록을 더 좋아하셨던 것 같다.
봄은 신록의 계절이다. 신록이 나를 부른다. 고로 나는 봄이 좋다. 메마른 땅에서 솟아난 새싹을 보라. 마른 가지에서 피어난 연초록의 잎을 보라. 멀리 떨어져서 만산에 피어나는 푸른 잎들과 봄꽃을 보라. 그 연둣빛 기운과 향연은 나에게는 설렘이고 오늘의 에너지다.
오월 초 산길로 드라이브를 가보자. 심금을 울리지 않는 산 어디 있더냐? 숲 속 어디쯤에서 그루터기에 앉아 앞을 바라보자.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에도 신록”을 맛볼 것이다.” 연한 초록의 담박한 아름다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연둣빛 숲 속에 듬성듬성 벚꽃으로 채색을 하면 내 마음은 들떠 이내 소풍을 간다. 세속에서 일탈하는 순간을 맛본다. 한마디로 신록에 청량한 울렁증이 인다. 바로 완연한 금수강산의 향연에 빠져들고 만다.
이런 날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신록을 찾아보자. 또한 “주머니에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는” 자도 봄의 숲길을 찾아볼 일이다. 빈한한 자는 부자가 된 듯하고 욕심꾸러기는 마음을 하나쯤 비울 수 있을 것이다. 신록은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초록 숲은 피톤치드로 치유의 능력이 있다. 초록 중에서 연초록은 꿈이고 희망이며 장밋빛 미래의 단초다. 삼천리금수강산에 신록의 봄이오니 개개인은 힘이 솟고 나라는 부국이 되었다. 이래서 나는 연둣빛 봄이 좋고 봄날에 산을 자주 찾아간다. 계절이 바뀌면 연둣빛 점퍼를 입거나 초록빛 와이셔츠를 즐겨 입으면서 자연을 음미하기도 한다.
나는 봄을 좋아하고 신록을 쫓아 산을 찾아다니는 생물학자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루터기에 앉아서 사색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학도이지만 수필과 연리지가 되어 연둣빛 봄을 노래하고 있으니 매우 즐겁다. 또한 도시에서 살면서 시선은 자연과 벗하며 호연지기를 즐기고 있으니 영웅호걸이나 부귀영화가 부럽지 않다.
나이 들면서 봄이 짧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지만 그래도 나는 연초록 봄이 좋다.
금수강산의 봄이 좋다.
임동옥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계룡산의 아침이슬은 약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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