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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4년 12월호, 제158호 신인상 수상작] 달빛 산책 - 정둘시

신아미디어 2014. 12. 7. 12:06

"달빛을 등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작은 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기웃거리던 동네 사람들,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아니 사돈끼리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을 부러워하고 아무 탈 없이 살아온 우리 부부를 대견해한다. 어렵게 맺은 인연에 흠이라도 남을까, 남들에게 웃음거리라도 될까, 노심초사한 세월을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둥근 달에게 물어본다. 너는 보았느냐고. 달빛에 들킬까 종종대던 그날의 설렘이 그리워져 하늘을 올려다보건만, 무심한 달님은 그저 웃어만 준다."

 

 

 

 

 

 

 

 달빛 산책        정둘시


   달빛이 문고리를 흔드는 추석 전야다. 여느 해처럼 차례 음식을 장만하느라 몸은 천근만근 무겁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늘 마음속으로 그리던 달빛 산책을 꼭 나가볼 요량으로 서둘러 설거지를 끝냈다. 숨 가쁜 일상 속에서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추억 하나가 가슴 한 귀퉁이에 오롯이 남아 별빛처럼 반짝이기 때문이다.
   추수를 앞둔 들판 위로 가로등이라도 밝힌 것처럼 달빛이 쏟아져 흐르고 있다. 오늘은 동구 밖을 향해서 나가는 걸음이지만, 그날은 마을을 향해 들어오고 있는 길이었다. 결혼을 앞둔 명절이라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참이었다. 마을 입구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내가 사는 곳, 오른쪽 길은 남편이 사는 동네이다. 길을 따라 양 갈래로 나누어졌을 뿐, 한 마을이나 다름없어 우리의 만남은 늘 조심스러웠으며 양쪽 집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갈림길 앞까지 마중 나온 예비 시누이와 오른쪽 길로 향한다. 혹여, 남의 눈에 뜨이기라도 할까 걸음을 재촉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 소리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추석을 맞아 고향으로 오는 사람들이다. 한가위를 하루 앞둔 날이니 하얀 달빛이 더없이 환하다. 그 밝은 달빛이 나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아 마음은 조마조마해진다. 어디 세상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었던가.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등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애야, 옆에 가는 아가씨는 누군데.”
   “같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인데 집이 너무 멀어 우리 집에서 추석을 쇠기로 했어.”
   같은 동네에 사는 중학교 동창이 호기심 가득 찬 질문을 해대니 예비 시누이는 당황해서 궁색한 변명을 한다.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발끝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고개를 숙이고 걸을 뿐이다.
   결혼 날짜까지 정해졌으니 돌아서서 아는 체해버릴까도 싶었지만, 한 동네 혼사인데다 예비시누이의 거짓말까지 보태졌으니 뒤돌아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가슴속에서는 콩이 한 됫박이나 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아뿔싸, 이 일을 또 어쩌나. 오토바이를 탄 그이가 달빛보다 몇 배나 밝은 라이트를 켜고 마중을 나온 것이 아닌가. 그리 넓지 않은 동구 밖 길이 대낮처럼 환해지니 도리 없이 얼굴이 드러나고 말았다.
   “아하, 이런 사이였구나. 감쪽같이 몰랐었네.”
   친구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뛴다.
   결혼식장을 두고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하객들이 모두 한 동네 사람들이라 버스를 대절해서 도회로 갈 이유가 없다며, 읍사무소 강당에서 하라고 한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한겨울에 난방도 안 되고 피아노도 없는 읍사무소 강당이라니. 그때 서글펐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샹들리에가 눈부신 시내 예식장에서의 결혼식도, 눈물을 머금고 제주도 신혼여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시집으로 가던 날은 또 어떠했던가. 가까운 거리이니 만큼 걸어서 가라느니, 경운기를 타고 가라느니,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래도 시집가는 첫날이니만큼 택시를 타기로 했다. 읍내에서 이십 분을 달려온 택시가 채 오 분도 안 되어 시댁에 도착해 버리던 우스운 기억도 생생하다.
   옛날 어른들은 한 동네 혼사는 삼 대가 덕을 쌓아야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만큼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알 뿐 아니라, 조그마한 감정이나 앙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기에 나온 말일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양가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여차하면 동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상황이니, 삼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언행을 조심하였을 것이다. 과거 삼대의 좋은 감정이 조상님 덕이었다면, 다가올 후대의 인심은 양가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후덕함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과제로 주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들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갈림길에서 여물지 못한 딸이 걸어간 길을 바라보았을 아버지를 떠올려 본다. 어둑해질 무렵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릴 때면, 저려오는 가슴은 둘째 딸을 위한 기도로 간절하였으리라. 어머니 또한 딸 부잣집 딸이 한 동네로 시집가서 딸을 낳으면 어찌하나 미리 마음고생을 하셨다. 나만 시집을 간 것이 아니라 부모님까지 시집살이하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같은 들에서 농사를 지으니 손 하나가 아쉬운 농번기에도 나에게만은 농사일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셨다. 부족함이 많은 며느리였지만 밖에 나가면 소소한 부분까지 칭찬과 자랑을 아끼지 않으심도 잘 안다. 햇과일을 수확하면 제일 먼저 친정집으로 보내주시고, 두 분 아버님은 손자와 외손자의 재롱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나누셨다.
   아니나 다를까 결혼하고 보니 나날이 염려했던 것처럼 만사가 조심스럽고 잘해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등 뒤에 계신 친정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늘 어깨를 짓누르고, 이래저래 말 못할 사연들은 가슴에 생채기로 남았다. 그럴 때면 한 동네에서 사랑했다던 갑순이와 갑돌이를 생각해보곤 했다. 갑순이는 정말 마음이 변해서 갑돌이를 떠난 것일까. 일찌감치 철이 든 갑순이가 나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억지 섞인 상상을 해본 적도 많았다.
   달빛을 등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십 년 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작은 틈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기웃거리던 동네 사람들,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아니 사돈끼리 친근하게 지내는 모습을 부러워하고 아무 탈 없이 살아온 우리 부부를 대견해한다. 어렵게 맺은 인연에 흠이라도 남을까, 남들에게 웃음거리라도 될까, 노심초사한 세월을 아득히 높은 곳에 있는 둥근 달에게 물어본다. 너는 보았느냐고.
   달빛에 들킬까 종종대던 그날의 설렘이 그리워져 하늘을 올려다보건만, 무심한 달님은 그저 웃어만 준다.

 

 

 

정둘시  -------------------------------------------
   경남 함안 출생. 마산대학교 백남오 수필창작교실에서 공부 중. 현재 세원공인중개사무소 운영.

 

 

당선소감


   한창 바쁜 시간에 접한 당선소식이었던지라 너무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울림이 커지는 마음 소리를 안고 하동행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습니다. 강물을 마주 보며 주체할 수 없는 이 기쁨과 억눌러 놓았던 나의 소박한 꿈에 대하여, 조곤조곤 이야기하고 싶어서입니다.
   미숙한 글을 밤새워 쓰다듬고 어루만집니다.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새벽을 책상 앞에서 맞이할 때면, 노곤함은 잊은 채 진정으로 행복하였습니다.
   들머리를 찾지 못해 헤매던 문학의 오솔길로 따뜻하게 이끌어 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함께 어우러져 즐겁게 공부했던 문우님들의 격려와 사랑에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글공부를 핑계로 수시로 사무실을 비우는 저에게 언제나 ‘예스’를 외쳐 주시는 영원한 동료 실장님, 글쓰기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귀하게 생각해주는 남편과 두 아들에게도 크나큰 사랑을 전합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열심히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