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인내해야 하는 삶. 아이를 낳아 태를 가르고 주어진 환경에 터를 닦고 그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류의 운명. 대대로 내림하는 숙명성. 체온 유지를 위해 뛰지 않는 낙타가 새끼를 향해 최대 속도 시속 64킬로미터로 내달리는 본성. 그게 온 인류를 이어 내려오게 한 뿌리가 아니던가. 바람이 불어온다. 하늘가 먼 지평선에서 마두금 소리가 들린다. 어미 낙타의 마음을 쓸어 주었던 몽골 여인의 노랫소리도. 우-우-. 나를 깨우는 낙타의 울음. 그들처럼 나도 살아갈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본디 그러하였듯이."
내 안의 사막 - 강정심
바람이 분다. 먼 길 오느라 숨이 찬지 호흡이 거칠다. 황량한 평원과 사막을 가로질러 달려온 그 바람인가. 아득한 그곳에 한 번은 본 듯한 익숙한 것들이 있다. 나와 비슷한 것들.
얼마 전 기록영화 한 편을 보았다. 몽골 고비 사막에 사는 유목민과 낙타 이야기였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며 살아남은 낙타와 유목민의 생명력은 고비 사막에 돋아나는 풀과 같았다. 내용의 초점은 유목민과 낙타가 어떻게 환경을 극복하며 적응해서 살아가는지에 맞춰졌지만 유독 낙타의 삶이 가슴에 꽂혔다. 낙타는 4,000년의 긴 세월을 사막에 살면서 모든 신체구조가 거기에 맞게 진화되었다. 등에는 지방을 저장하여 그 에너지원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여러 날을 견딜 수 있다. 물도 한 번에 200리터나 마실 수 있고 일주일 이상 마시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한다. 낙타의 눈썹과 코, 귀, 발바닥, 다리 등은 사막에 적합하도록 발달하였고 물이 있는 곳도 잘 찾아낸다. 후각과 기억력이 뛰어나고 뜨거운 태양 볕과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도 견뎌낸다. 모진 환경에 순응하면서 유목민의 짐꾼이 되고 벗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먹은 것들을 되새김하는지 낙타가 우물우물 입을 놀리고 있다. 푸르르 갈기를 털고 우우 소리를 낸다. 우우- 우우~ 소리를 내면서 연신 입을 다신다.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세우고 먼 곳을 바라본다. 몽골 여인이 낙타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랫가락이 온 사막에 울려 퍼지고 몽골 악기 마두금의 연주가 이어졌다. 어루만져 주는 여인과 언뜻 눈이 마주치자 고개 돌린 두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낙타가 울었다. 그리고 사흘 전에 낳은 새끼 낙타에게 젖을 물렸다. 태어나서 삼 일 안에 젖을 못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몸을 내어 준다. 힘든 산통 때문에 몸풀이 후 새끼를 멀리하는 낙타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 어미낙타에게 말의 꼬리로 만들었다는 마두금 소리를 들려주면 눈물을 흘리고 새끼를 보살핀다고 하니 하늘 아래 영이 깃들지 않은 게 없다.
세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늘 허기졌다. 무엇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태懈怠하는 것 같은, 내 몫을 다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삶의 분주함에 나를 잊고 살면서도 나를 잊은 적이 없었다. 우주의 한 점이 빛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했다.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다시 아이를 갖기로 했다. 나를 통하여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오고 나를 의지하여 좋은 사람으로 잘 자라서 주위에 따뜻함을 줄 수 있다면 뜻있는 일이라 위안하면서. 아버지는 정색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유를 가져야지 고생을 자초한다고 극구 말렸다.
그렇게 네 번째 아이를 낳았다. 산기가 시작되고 고통이 심해지면 두려워진다. 아이의 머리가 빠져나갈 때까지 견뎌야 하는 순간은 어떤 의지나 이성 따윈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엄연함.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디론가 피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할 뿐 맨 몸으로 버텨내야 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한 고비. 신도 돌아앉아 버린 것 같은 순간, 어찌해 볼 수 없는 고통으로 잠깐 의식을 놓을 때 아이는 태어났다. 내 몸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쑤욱 빠져나갔다. 고통 끝의 허탈감인지 안도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눈물이 쏟아졌다. 목 놓아 울었다. 무엇이 서러운지도 모른 채 나를 다 내놓고 울었다. 낙타도 그랬을 것이다. 낙타로 살아가는 것, 여자로 살아가는 것, 살아야 하는 그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일이 아닌가.
끝없이 인내해야 하는 삶. 아이를 낳아 태를 가르고 주어진 환경에 터를 닦고 그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류의 운명. 대대로 내림하는 숙명성. 체온 유지를 위해 뛰지 않는 낙타가 새끼를 향해 최대 속도 시속 64킬로미터로 내달리는 본성. 그게 온 인류를 이어 내려오게 한 뿌리가 아니던가.
바람이 불어온다. 하늘가 먼 지평선에서 마두금 소리가 들린다. 어미 낙타의 마음을 쓸어 주었던 몽골 여인의 노랫소리도. 우-우-. 나를 깨우는 낙타의 울음. 그들처럼 나도 살아갈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본디 그러하였듯이.
강정심 -------------------------------------------
제주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백록수필문학회 회원.
당선소감
어느 날 길 한가운데서 술주정처럼 지나가는 차들을 방해하며 소란스럽게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눈동자는 풀리고 의식은 먼 곳에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슬프게 했는지 오래도록 남는 기억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성스러운 신임을 받은 것’이라는데.
이제 또 다른 태양을 봅니다. 이 세상에 내가 무엇으로 도구가 되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합니다. 수필 쓰기는 용기가 있는 결정이라 했는데 십여 년이 흘러 이제 진정 용기를 내봅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모든 이들과 기쁨을 함께하며 깊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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