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계절에 발표된 두 편의 단편, 서진연의 「괴산槐山」과 윤이형의 「쿤의 여행」에 주목하고자 한다. 두 편의 단편이 가치를 둘러싼 인간의 주저와 고뇌, 그리고 선택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살펴보고, 더 나아가 소설 텍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치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 글의 작은 바람이다."
가치와 서사, 서사의 가치 / 석 형 락
가치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자.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에서 눈에 띄는 대로 몇 구절을 가져오면 가치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1) 가치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한 개념’(29쪽),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거나 어떤 식으로든 만족감을’ 주는 것을 소유했을 때 기대되는 ‘만족의 예상치’(이상 41쪽), ‘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잠재력, 행위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이 구체적이고 인식 가능한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120쪽), ‘그것을 알아본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 그들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그 무엇’(234쪽)이다. 이런 정의를 참고하면, 가치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구체적 사물이나 추상적 이념 등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사물 또는 이념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 역시 가치를 생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레이버는 가치를 논하는 방식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사회학적 가치들’로서,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옳고, 바람직하며, 타당한 것들을 지시’한다. 둘째는 ‘경제학적 가치’로서, ‘대상에 대한 욕망의 정도’, ‘특히 그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얼마나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에 의해 측정되는 욕망의 정도’를 말한다. 셋째는 ‘언어학적 가치’로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기인’하는 ‘의미상의 차이를 낳는 최소한의 차이로 규정’(이상 26쪽)된다. 그레이버는 세 가지 가치의 구체적인 예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진 않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게 자유나 평등, 신뢰나 사랑 등을 사회학적 가치들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로서, 어찌 보면 지금 이곳에 부재하는 것들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추구하는 가운데 또 다른 가치를 생성한다. 간단한 예를 떠올려보자.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은 나라의 독립이라는 사회학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과 안정적 삶이라는 개인적 가치를 포기했다. 경제학적으로 가치를 논한다면, 그들이 추구한 독립이라는 가치는 자신들이 희생한 가치의 크기에 의해 측정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행위가 ‘숭고’라는 또 다른 가치를 생성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치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단순히 소설 텍스트에 적용해보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이 목적하는 바가 아니다. 이 글은 인간은 살면서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며, 삶이란 가치를 만들어내는(더 나아가 만들어내어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럴 때 문제는 인간이 단지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거나 여러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넘어, 서로 충돌하는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을 추구해야 하는(다른 말로 어느 것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소설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주저하는 인간을, 달리 말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실현을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고뇌와 선택을 그리기 때문이다. 특히 한 인간이 어떤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 없겠지만,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타인이 추구하는 가치의 희생에 의지한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가 궁극적으로 옳다거나 바람직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치에 대한 추구가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은 지난 계절에 발표된 두 편의 단편, 서진연의 「괴산槐山」과 윤이형의 「쿤의 여행」에 주목하고자 한다. 두 편의 단편이 가치를 둘러싼 인간의 주저와 고뇌, 그리고 선택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살펴보고, 더 나아가 소설 텍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치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 글의 작은 바람이다.
서진연의 단편 「괴산」(『소설문학』 2013년 가을호)2)부터 살펴보자. 서사는 두 명의 초점화자, 시아버지 정빈과 며느리 희수의 시선을 따라 서술된다. 10년 전 그들은 정빈의 아들이자 희수의 남편을 사고로 잃었다. 그 사고의 원인이 시아버지에게 있다고 생각한 희수는 시댁과 소원해졌다. 그러나 가난과 외로움에 고통받던 희수에게 떠오른 사람은 시댁 어른이었고, 그래서 희수는 시댁을 다시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가난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정빈 내외와 희수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한다. 이 소설을 단순히 정리하자면 가족 구성원의 갑작스런 죽음과 그로 인한 가족의 붕괴,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피는 가족 간의 사랑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정빈과 희수로 대표되는 몇 가지 대립적인 자질로 구성되어 있다. 즉 말과 침묵, 웃음과 울음, 주다와 받다, 죽음에 대한 수긍과 삶에 대한 욕망 등이 그것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어떤 따뜻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정빈으로부터 환기되는 전자의 자질들이 소설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며, 혹은 우리가 서로 대립적인 자질 중에서 무의식적으로 전자의 자질에 조금 더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소설의 배경인 ‘괴산’이 부재와 결핍, 단절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존재들(교성이, 박씨, 선달골 할머니)의 남루함과 비교할 때 정빈 내외의 한결같은 나눔과 긍정의 태도는 소설의 어두운 분위기를 상당 부분 상쇄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두 명의 초점화자가 단순히 교대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며느리 희수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는 서사이고, 시아버지 정빈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서사는 바로 그 비밀에 응답하는 서사이다. 그렇다면 그 비밀은 무엇인가. 바로 희수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비밀이 드러내는 사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즉 그것은 희수가 암에 걸렸으며, 그 암을 치료하여 삶을 유지하기를 욕망하고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부모가 소유한 유일한 재산이자 그들의 하나 남은 공간인 괴산의 집을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 이럴 때 가족공동체라는 소설의 설정은 희수에게 일종의 막다른 골목으로 작용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조건 없는 사랑을 줄 수 있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어떤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 소설이 겉으로 드러나는 가족 간의 사랑에 비례하는 만큼의 잔인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에서 정빈은 시종일관 며느리 희수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 아들의 죽음 이후 부도와 파산을 거친 그는 남은 돈으로 희수 모녀에게 옷가게를 차려주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괴산의 집마저 희수의 명의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희수가 암 치료에 필요한 집의 등기부등본과 인감도장을 요구하지 않고 침묵하자, 정빈은 몰래 그것들을 희수의 가방에 넣어놓는다. 희수는 무엇보다 삶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친구 경애가 희수에게 하는 말, ‘일단 네가 살고 봐야 한다.’, ‘네가 살아서 다시 지어드리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이상 197쪽)는 말은, 희수가 차마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 내면의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희수는 끝내 정빈에게 서류와 도장을 요구하지 않고 괴산을 나선다. 소설은 정빈의 희생적인 행위를 통해 이들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소설은 가족에 닥친 위기를 가족애로 봉합하는 서사에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희수는 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에게 닥친 위기를 서로가 공유하고 같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마지막까지 침묵하는 그녀의 행위는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질문의 핵심은 그녀의 행위가 유일하며 비교될 수 없는 가치인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거나, 혹은 생명을 연장할 기회를 유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 혹시 그녀는 자포자기한 심정인 것인가. 하지만 괴산을 나오기까지의 오랜 침묵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녀의 침묵은 놓았다기보다는 차라리 계속 잡고 있었다고 설명되어야 한다. 혹시 그녀는 무엇보다 삶에 대한 욕망이 강했고 그것을 포기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정빈 내외의 여생 역시 포기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괴산의 집은 단순한 재산이나 공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정빈 내외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이 모두 그 집 하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 희수는 자신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집 한 채에 의지한 시부모의 남은 생을 지키고자 했으며, 정빈은 집이 없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희수의 수술비를 위해 집을 내어주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이 계산을 내면화한 우리의 통상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지점이다. 희수와 정빈은 타인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희생하면서 타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켜주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고민과 선택이 또 다른 가치를 생성해내는 바탕이 된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나를 지키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너 자신이나 지켜라. 하지만 서진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를 지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지키고 싶다. 이 소설은 마치 우리로 하여금 이 힘든 세상을 살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최대의 만족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어떤 가치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또는 그 관계에서 생성되는 가치(사랑)이지 않느냐고 묻는 듯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너 때문이라도 삶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괴산」이 지닌 소설적 미덕은 이처럼 가치의 충돌과 선택이라는 문제를 통해 사랑이라는 또 다른 가치를 생성해내는 데 기인한다. 우리는 「괴산」을 읽음으로써, 가족은 관계 맺기를 통해 끊임없이 사랑을 생성해내는 과정에 다름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서진연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가치라고 생각된다.
윤이형의 단편 「쿤의 여행」(『실천문학』 2013년 가을호)3)은 ‘어른이 되기 위한 어른의 성장기’라고 부를 만하다. 이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흔 살의 여자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서술자 ‘나’는 쿤4)으로부터 분리되는 수술을 받는다. 열다섯 살 소녀가 되어 버린 ‘나’는 다시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연락을 끊어 버린 지인에게 편지를 쓴 뒤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거나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를 찾아가 가입한다. ‘나’는 타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보는 체험을 함으로써 이전에는 보지 않으려 했던 자기 모습을 찾아간다. ‘나’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쿤에게 짓눌려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대면함으로써 ‘자라지 않아도 괜찮’(358쪽)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이 소설에서 주목할 점은 ‘나’가 ‘어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어른’임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는 데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나’가 포기한 ‘어른’과 되기 위한 ‘어른’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전자의 ‘어른’이 쿤에 의지하면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면, 후자의 ‘어른’은 ‘나’가 앞으로 스스로 만들어갈 삶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타인이 부여하는 ‘어른’의 가치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어른’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나’가 추구하는 후자의 ‘어른’은 어떤 규정된 가치라기보다 ‘나’의 행위에 의해 구성될 잠재적 가치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나’는 왜 쿤의 등에 올라탔는가. 우리는 서술을 통해 ‘나’가 쿤의 등에 올라탄 것은 불가피한 현실 도피에 다름없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엄마가 겪어온 시간,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거움’(339쪽)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당한 열다섯 살 무렵을, ‘평생 엄마와 나를 때리고’(357쪽)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를, 그리고 그러한 사실 일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쿤의 등에 올라탐으로써 거짓 진입, 즉 세계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들어선다. 쿤에 의지한 ‘나’는 그동안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쿤에게 내맡긴 삶을 사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사는 모순적 상황을 견뎌온 셈이다. 그러므로 쿤으로부터 분리된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스스로 세계에 진입하는 일이다. 특징적인 것은 ‘나’가 세계에 진입하는 일련의 과정이 모두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나’는 왼쪽 할머니의 폐지 수집을 돕고, 젊은 시절 잠시 사귀다 헤어졌던 친구 C를 만나며, 취업 준비 때문에 발길을 돌렸던 대학 극회에 가입해 일을 돕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고생하는 거랑 크는 거랑은 아무 상관도 없’(341쪽)다는 것을, ‘하고 싶은 일을’(347쪽) 하며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 ‘어른, 의 정의’(350쪽)를 다시 묻는 법을 배우고, 비로소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355쪽)를 알게 된다. 물론 이 소설은 ‘어른 되기’에 대한 ‘나’의 가치 추구가 ‘커다란 짐을 떠맡은’(336쪽) 남편과, 엄마와 언니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딸의 희생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하지 않는다. 소설에서 ‘나’가 성장하기 위해 지나치게 조급함을 보이는 것도 ‘나’의 가치 추구가 전적으로 가족의 희생에 의지하고 있음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쿤의 여행」이 지닌 소설적 미덕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소설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대면과 질문이 요구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나’는 꿈을 통해 ‘쿤을 영원히 없애는 법’(351쪽)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거울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거울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소설은 그것이 ‘배우’와 ‘공무원’, 즉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가 주는 절망과 더불어 자신의 나약함을 절망으로 위안받으려 하는 우리들의 위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늘 절망적인 현실을 탓하지만 그 현실이 탓할 만한 것으로 남아 있길 바란 것은 정작 우리 자신이지 않은가. 타인이 부여한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라가며 살든, 아니면 세계로부터 숨어버리든 우리는 못난 자기만은 합리화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어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숨어 있던 ‘나’를 직시하며 자신이 ‘뭘 할 수 있을’(349쪽)지, ‘뭘 놓친 건지, 뭘 못 보고 지나쳤는지’(353쪽) 묻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면과 질문을 통해 우리는 어른이 단지 어른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어른을 자기 식으로 다시 정의하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테렌스 터너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가치를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고, ‘궁극적인 자유는 가치를 창조하거나 축적할 자유가 아니라(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5)라고 말한 바 있다. 만약 우리가 터너의 말에 동의한다면, 「쿤의 여행」이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라, ‘어른’을 새롭게 정의하는 행위 속에서 ‘정치적’인 가치를 생성해내는 텍스트라는 점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윤이형은 타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반드시 남들과 다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이형에게는 그것마저도 또 다른 어른의 길을 답습하는 것일 뿐이다. 그는 단지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라고 말할 뿐이다. 물론 타인과 관계를 맺으면서, 혹은 그 관계에 의지하면서 말이다. 만약 「쿤의 여행」이 생성해내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느끼는 신뢰일 것이다.
서진연의 「괴산」이 가치를 실현하려는 주체의 욕망만큼이나 타인의 가치를 지켜주려 함으로써 사랑이라는 또 다른 가치가 생성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면, 윤이형의 「쿤의 여행」은 서로 다른 가치 사이의 충돌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주체가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는 방법을 그려내면서, 그러한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정치적 가치를 생성해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소설 독법이 가능하지 않을까. 즉 소설은 서로 다른 가치의 충돌, 주체의 선택, 또 다른 가치의 창출이라는 서사구조를 지닌다고 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삶이란 가치를 둘러싼 충돌과 선택의 연속이며, 가치란 관계의 산물 또는 관계 그 자체이고, 소설은 늘 그러한 것들에 관심을 둔다. 두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은 부단히 가치를 추구하며, 그가 추구하는 가치를 소유하는 유일한 방식은 오로지 공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마치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같은 문제의식을 남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처럼 말이다. 소설이 진정 우리에게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은 소설이 공유를 통해서만 가치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작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세계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가치를 생성한다는 말에 다름없고, 독자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가치를 공유하는 것에 다름없다.
1) 데이비드 그레이버,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2009. 이하 두 단락에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2) 이하 이 책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3) 이하 이 책을 인용할 때는 본문에 쪽수를 표기함.
4) 이 소설에서 쿤은 인간을 대신하여 삶을 사는 무엇으로 설정되어 있다. 쿤은 우무나 곤약과 같은 물컹거리는 회백색 덩어리로 묘사된다. 인간이 쿤에 업히면 인간은 성장을 멈추고, 쿤이 그를 대신하여 성장한다.
5) T. Turner, ‘The Kayapo of Central Brazil’, ed. A. Sutherland, Face Values, London: BBC, 1978. (데이비드 그레이버, 앞의 책, 202쪽에서 재인용.)
석형락 ---------------------------------------------------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방송통신대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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