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변無邊한 상하常夏의 정글을 누비면서 이 잡듯이 베트콩을 섬멸하던 그 날의 추억들은 아직도 생생한데 이젠 그 지도의 색깔마저 달라지고 말았으니 새삼스레 인정의 무상함을 되씹어보게 된다.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더욱 애타게 그리워지는 것일까."
베트남과 나 / 김병권 (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우리의 혈맹이었던 월남공화국이 북쪽의 공산 ’월맹’의 끈질긴 공세와 남쪽 국민의 안보관 결여 때문에 패망한 지 40여년이 흘렀다.
무변無邊한 상하常夏의 정글을 누비면서 이 잡듯이 베트콩을 섬멸하던 그 날의 추억들은 아직도 생생한데 이젠 그 지도의 색깔마저 달라지고 말았으니 새삼스레 인정의 무상함을 되씹어보게 된다.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더욱 애타게 그리워지는 것일까.
얼마 전, 옛날 사진첩을 들추다가 월남이 함락된 직후 수명의 베트콩에게 동반민 장군이 끌려가는 사진을 스크랩해 놓은 걸 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패군지장敗軍之將의 초라한 모습, 아마도 그의 심정은 천 갈래 만 갈래의 착잡한 감회로 엇갈렸으리라. 아무리 흥망성쇠가 잦다 한들 적어도 한 나라의 운명이 저렇듯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더구나 나는 40여 년 전, 2년 동안 파월 참전용사로 근무하여 사이공을 위시하여 월남 곳곳 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그곳이 모두 하루아침에 붉은 발굽아래 짓밟히고 말았으니 애통한 마음이 더욱 컸을 것이다.
싱그럽던 야자수 잎사귀도, ‘아오자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가던 사이공 아가씨들도, 화려한 오색등 아래 온갖 이국인異國人과 술과 노래와 여인이 난무하던 사이공의 명동 ‘투도거리’도, 옆에는 푸른 메콩강을 끼고 삶은 조개와 맥주를 마시며 서글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던 낭만의 사이공 부두도 너무나 그립다. 궁형弓形의 해안선을 따라 마른 나무에 진홍 연꽃을 피우며 화려한 프랑스 귀족들의 별장지대가 바다를 굽어보던 ‘붕타우’ 섬과 ‘나트랑’ 해변의 그 정경들, 울창한 가지 끝이 서로 어울려 프른 터널을 이루던 독립궁 부근의 식물원 풍경, ‘메콩델타’의 광활한 곡창지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평소 다정하게 지냈던 그 많은 월남의 전우들과 관리들, 언론인과 예술인들은 지금 다 어떻게 되었을까. 긴 세월이 흘렀어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들의 안위가 새삼 궁금해진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의 맹호, 백마, 청룡, 비둘기 부대들이 가는 곳마다 세운 그 많은 전적비戰績碑와 대민지원의 업적들은 온전히 남아 있을까? 험한 정글지대 나무뿌리 하나에도 우리 젊은이들의 피가 스며있을 텐데, 과연 그들의 고혼孤魂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3년 동안 한 사무실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월남 고용인들의 정다운 모습들도 아련하게 떠오른다.
울먹이듯 울먹이듯 눈감고 볼까
땅에 닿을라 검은머리 채
질질 끌리는 아오자이
허리 맵시가 가냘프구나
물기 젖은 눈은 흘러서 강이 되고
속눈썹이 긴만큼 그늘진 여인,
체념의 빛깔은 창백하네.
흰나비 노량나비 초록나비 꽃나비
어쩌면 흐느낄 미망인의 미래상
엷은 옷자락에 전화戰禍의 티는 없다.
이 시는 몇 해 전, 나와 같이 월남에서 근무했던 J시인의 ‘서공미인西貢美人’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어쩌면 월남의 숙명은 사이공 미인의 그늘진 우수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의 사무실에는 유난히 속눈썹이 길고 항시 애수에 잠긴 듯 검은 눈동자를 깜빡이는 ‘꼬란’이라는 타자수 여인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사이공 대학을 나온 엘리트로서 영어, 불어,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함은 물론 한국어로도 곧잘 소통을 했다.
그 여인은 전쟁의 상처를 입은 월남 여인의 숙명을 혼자 짊어진 것만큼이나 불운해 보였다. 일찍이 전쟁에서 첫 남편을 잃었고 두 번째 남편 또한 실종되어 행방불명 상태여서 세 살짜리 딸애만 데리고 살고 있었다.
전쟁이 안겨준 비운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그 여인은 한국을 무척 동경했다. 언젠가 한 번 한국방문을 해 보았으면 그 이상의 소원은 없겠다던 그 여인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이 모든 아픔을 딛고 지금 베트남은 눈부신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우리가 6·25 전쟁의 상흔을 이겨내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처럼 베트남도 경제성장을 이루려는 온 국민의 열망으로 각 분야에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인구 1억 명의 풍부한 인적 자원과 아름다운 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베트남의 성장 속도는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피를 나눈 형제처럼 베트남의 발전하는 모습이 반갑기 그지없다. 젊음의 한때를 치열한 베트남 전쟁 속에서 보낸 나를 비롯한 수많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을 베트남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김병권 ---------------------------------------------
김병권님은 수필가. 《월간문학》으로 등단. 수필잡 《속아주는 멋》, 《생각하는 눈》, 《오월의 나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