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비평에서 신곡문학상 대상을 받으셨던 작가들의 신작에세이를 특집으로 꾸몄네요.
고수의 햇살과 숨결을 같이 느껴보시고,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영양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강원도 어느 마을은 폭설에 갇혀 마을
전체가 고립되었단다. 지붕 위까지 눈이 쌓여 있는 광경을 텔레비전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쯤 되면 눈 오는 날의 낭만이 아니라 눈 오는 날의
공포하고 할 수 있겠다.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폭설과 추위
때문에 동사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여름은 더위 때문에 몸
서리를 치더니 그 새 추위 때문에 이 난리를 치니 사계절이 있어서 좋다
고 하던 말도 쏙 들어가고 말 지경이다.
성급한 사람은 기상이변이 아니라 지구의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기야 일본의 지진만 해도 그렇다. 그 여파로 무서운
쓰나미가 덮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원전을 쑥대밭으로 만들
어 100인의 결사대가 조직되어 복구에 참여하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더
큰 재앙이 닥칠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 우수, 경칩이 지나도 물러갈 줄 모르고 버티고
있던 겨울이 독한 기운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겨울잠에서 깨어 나왔
던 개구리가 질겁하고 도로 땅속으로 기어들고 있다. 이번 겨울은 최후
까지 발악을 하는지 3월이 다 가고 있는데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렇
지만 제아무리 지독한 동장군도 이제는 더 버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지푸라기처럼 허물어질 순간이 곧 보이는 듯하다. 저만치 도망가는 모
습이 보인다. 아, 그렇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지각을 뚫고 연약한
손을 내미는 새싹의 소리, 어느새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하고 있다.
앞산에도 진달래가 피었다. 이제 곧 남도의 매화를 비롯해서 벚꽃 축제
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봄은 정녕 우리 가까이 와서 해롱거리
며 우리들의 살갗을 간질이고 있다.
윤동주는 <봄>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봄이 혈관血管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
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찾아온/ 풀포기처럼 피어난
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
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윤동주의 촉수는 혈관에서부터 봄을 감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봄이
오는 것을 몸으로도 느끼지 못한다. 꽃이 피는 것을 보아야 비로소 봄이
구나 하고 생각한다. 특히 진달래가 그렇다. 마른 풀들이 무성한 속에서
진달래를 발견하면 아무리 둔한 나도 봄이 내 앞에 다가와 있음을 느낀
다. 설중매雪中梅라고 해서 눈 속에서 꽃을 피우고 있는 매화를 일등으로
삼고 있지만, 아파트 단지에서는 매화를 잘 볼 수 없어서 매화가 피었는
지 어쨌는지 잘 모른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남녘 지방의 매화를 보
여주니 아, 벌써 매화가 피었다고, 하면서 감탄을 마지않는다.
진달래는 앞 야산에만 올라가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연한 붉은색을
지니고 있어서 진달래의 진심이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진달래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어느새 진달래는 지고 철쭉이 그 자리를 대신하
고 있다. 비슷한 꽃모양과 색깔을 지니고 있지만 철쭉은 사납게 느껴진
다. 우선 철쭉을 진달래로 잘못 알고 먹었다가는 큰일 난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착한 공주와 심술궂은 왕비와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봄이 오는 소리는 철쭉이 훨씬 더 큰소리를 내는 것 같다.
진달래라면 소월의 시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
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이 시에서는 봄이 오는 소리를 듣기보다 봄이
저만치 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소월은 <오는 봄>에서 “봄의 소리는/ 때로
여읜 손끝을 울릴지라도/ 수풀에 서리운 머릿길들은/ 걸음걸음 발에 감
겨라”라고 읊고 있다. 소월에게는 봄이 오는 소리가 도모지 즐거운 가락
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삼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라고
박목월은 읊고 있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는” “수국색 공기
가 술렁거리고/ 뜻하지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
같다.”라는 것이다. 봄을 냄새로 느끼고 있다. 남도에서는 이른 봄 거두
어 먹는 싱그러운 미나리가 입맛을 돋운다. 봄을 미각으로 느끼게 하는
가장 좋은 찬이다. 소월과는 달리 봄이 오면 반가운 친구라도 만날 것
같은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는 목월이다. 임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아
니라, 임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서려 있다.
미당은 <강릉의 봄 햇볕>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진달래
갈매기 소리로/ 갈매기 진달래 소리로/ 분홍 불 켜며/ 소금도 치며/ 단단
한 어금니로/ 돌山 어금니로/ 「이 머스마 왜 이럽나!」/ 깔깔거리고 내려
오는/ 칡꽃 같은 눈을 가진/ 처녀 들어 있나니…” 시에서는 진달래와
갈매기가 한데 어울려 묘한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소금도 치며”라고
했으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작자는 상상하고 있다.
“칡꽃 같은 눈을 가진 처녀”란 대체 어떤 모습의 처녀일까. 칡꽃은 “나
비 모양으로 자주 빛을 띤 붉은 빛의 꽃”이라고 한다. 미당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지만, 도시적인 세련미를 가진 처녀
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순박하긴 해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처녀, 야생
스러움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풋풋한 냄새가 나는 처녀, 곱다는 느낌
보다는 왁살스러운 처녀, 하지만 예사롭게 지나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처녀라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본 프랑스 영화 중에서 숲의 여인으로
분한 마리나 브라디가 생각난다.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이 무슨 일로 그
지방에 갔다가 숲에 사는 야생의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마리나 브라디
의 매력이 남김없이 발휘되는 영화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지만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인간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있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다
는 함의가 숨어 있었다.
봄이 오는 소리는 봄이 아직도 저만치 오고 있을 때 듣는다. 봄 속에
완전히 들어와 있으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람을 통해서 듣기도
하고, 꽃의 향내를 통해서 듣기도 하고, 꽃의 빛깔을 통해서 듣기도 한
다. 아니, 친구들이 남녘에서 전해 주는 반가운 음성을 통해서도 듣는다.
봄이 오는 소리는 연인의 정다운 목소리와 같다. 작년에 속삭였던 그
음성, 아니, 몇 년 전에 속삭였던 그 음성, 아니, 아니, 내 어렸을 때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던 그 음성이다. 아니, 아니, 아니, 아득한 옛날 풋풋
한 목소리로 나 이만치 왔소, 하고 속삭이는 연인의 목소리처럼.
김상태 ---------------------------------------------------------
전북대·한양대·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한국비교문학회·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현,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생활수필쓰기 지도.
수필집: ≪참말과 거짓말 사이≫, ≪여자대학의 촌티 나는 교수≫, ≪먼 꿈 가까운 꿈≫,
≪선생님 우리 선생님≫,≪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콩트 ≪유리구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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