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독서를 별개인 것처럼 상정하고 궁합을 따지는 것은 모순일지 모른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독자는 잠재적 작가이고, 모든 작가는 독자이다. 글 한 줄 안 읽고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쓰면서 아무것도 안 읽는 작가는 그려볼 수조차 없다. 작가 안의 독자, 독자 내면의 작가가 문학현상을 움직여가는 실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다. 문학현상 안에서 작가와 독자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일 수밖에 없게 운명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문학과 독서, 궁합 좀 봅시다 / 우한용(소설가·서울대 명예교수)
문학이란 말의 연상망에 걸려 들어오는 것들 가운데 ‘독서’라는 어사는 이제 자동화되어 있다. 초등학교 뜰에 모자를 쓰고 앉아 책을 읽는 소녀상, 그녀는 문학을 하는 것인가? 르노와르가 그린 독서하는 소녀의 화사한 얼굴에 스치는 문학의 그림자는 무엇인가? 원효가 읽고 소(疏)를 쓴 ‘금강삼매경론’은 문학인가? 문학이라면 경전과 문학 사이를 가르는 독서 방법은 따로 존재하는가? 아무튼 문학은 독서로 수행되는 예술적 실천이라고, 아무 전제 없이 받아들이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문학과 독서의 궁합은 천정배필天定配匹로 이름지어진다.
독서는 독자를 생산한다. 생산된 독자는 작가와 맞서는 존재가 된다. 아니 작가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친위대 역할을 하는 걸로 인식된다. 독자가 감히 작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해괴한 행태로 지탄을 받는 까닭이 여기 있다. 독자가 읽어 주어 작품이 되는 과정을 거쳐 작가의 손을 떠났으면서도, 작품은 고압적인 권위를 요구한다. 더구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문학교육에서 작가의 의도를 강조하는 바람에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기 위해 독자는 순종의 미덕을 강요받게 된다. 독자는 작가에 대해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예를 갖추면서 별 탈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작가와 독자의 위상 또한 변했다. 작가보다 똑똑한 전문 독자가 생겨났다. 이른바 연구자나 비평가라는 이들이 그 부류이다. 한편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작가와 독자가 혼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유도한 주역을 복합매체가 해냈다. 컴퓨터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이버공간의 문학에 작가와 독자가 따로 없다. SNS상의 뜨고 지는 문건에 특별히 문학이라는 문패를 달 이유가 없다. 문학과 독서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문학과 독서의 궁합에 이별수離別數가 끼어들어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무력화했다. 문학에 철학이 사라진 형국이다.
문학을 읽는 것과 철학을 읽는 것은 둘 다 똑같은 독서인가? 독서는 인식행위가 틀림없다. 그런데 문학적 인식과 철학적 인식에는 차이가 있다. 철학은 추상적 인식에 바탕을 둔다. 사물과 인간, 그리고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보통명사와 일반명사가 철학의 대상이다. 거기 비해 문학은 참나무를 노래하고, ‘서림이’와 바람끝이 매서운 봄날의 저녁나절을 이야기한다. 철학은 추상의 꼭대기에 올라가 명제를 만들어낸다. 문학은 구체성의 밑바닥에서 고유명사를 만들어낸다. 서로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다. 그래서 어정쩡한 동거同居를 하는 경우가 항다반이다.
독자는 일반명사화할 수 없는 고유한 존재이다. 독자의 내면에는 역사와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나아가 이념으로 무장된 독자도 있다. 기독교인에게 <성서>는 경배의 대상으로 읽힌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성서>는 정신의 아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독자든지 감성과 논리와 행동의 의지를 갖추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깨어 움직이는 독자의 내면에서 육신과 정신의 경계가 녹아나게 마련이다. 아울러 독자는 사회적 존재다. 개인의 감성과 사회적 과업이 개인 독자의 내면에서 통합된다. 그렇게 본다면 독자는 내밀한 개인사와 공적인 사회사를 함께 갖춘 인격체인 셈이다. 그 인격체가 문화맥락 안에서 다른 문화를 창출한다. 독자는 의미의 생산자이다. 그 의미의 생산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이 함께 어우러지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문학과 독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궁합을 만들어 가면서 살림을 이어간다. 문학과 독서의 궁합이 잘 들어맞기 위해서는 읽기의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 문학편에서는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문학을 문학답게 읽어 주기 바란다. 문학이 감수성 개발을 위한 언어작업이라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감수성이란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감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남과 더불어 기뻐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감수성이다. 달리 말하면 사물의 고유명사성을 읽어내야 한다. 그냥 나무가 아니라 참나무라야 하고, 참나무 가운데도 오월 햇살이 볼을 문지르면 까르르 웃어대는 참나무라야 한다. 밥 굶은 소말리아 어린이의 눈빛에서 삶의 비애를 읽어야 한다. 여기서 감수성의 미적 형식을 형성하게 된다.
둘째, 문학을 진지하게 읽어 달라. 역설적으로, 우리는 문학을 너무 진지하게 읽는 버릇에 들려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한’ 현실에서 문학을 진지하게 읽어 달라는 요구는 무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현실은 교묘하게 꼬여 있다. 일반 독자들은 <삼국지>를 스토리텔링으로 읽고, 같은 책을 경영철학으로 읽는 연구자도 있다. 문학의 분화 가운데 비평의 기능이 확대되면서 문학을 재미삼아 읽는 맛을 잃었다. 독자들이 비평가들에게 복속된 결과다. 비평은 대개 교육을 통해 보급된다. 그런데 독자들의 실감에 비하면 비평의 논리는 추상적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비평에 염증을 내면서도 비평에 기대어 작품을 읽는다. 이렇게 독서가 간접화되면서 가벼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는 역설이 증발해 버렸다. 문학의 오락화에 대한 진중한 회의와 모색을 수행하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다. 이 독자의 역할이 되살아나야 한다.
셋째, 독자의 주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문학은 독자라는 주체 안에서, 심리와 맞닥뜨리고, 철학과 역사와 만난다. 독자는 문학이 구체화되는 역동적 기관(organum)이다. 우선 독자는 문학을 특정 시공간에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독자의 손에 책이 들려야 문학의 존재감이 획득된다. 독자는 의미의 용광로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연결지어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독자의 역할이다. 독자는 문학적 의미를 종횡으로 결합하고 용해하여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하는 존재다. 여기서 독자는 문학을 문학으로 살아있게 한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독서를 별개인 것처럼 상정하고 궁합을 따지는 것은 모순일지 모른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독자는 잠재적 작가이고, 모든 작가는 독자이다. 글 한 줄 안 읽고 글을 쓸 수 없다. 글을 쓰면서 아무것도 안 읽는 작가는 그려볼 수조차 없다. 작가 안의 독자, 독자 내면의 작가가 문학현상을 움직여가는 실체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일 뿐이다. 문학현상 안에서 작가와 독자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일 수밖에 없게 운명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개인의 감수성 또는 시대적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문학은 인간의 심리 밑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문학은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이다. 인류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현재의 삶에 연계짓는 게 역사다. 또한 삶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문학은 철학과 가깝다. 문학이 뿌리를 뻗고 있는 이러한 문화자장의 한 가운데 독서하는 인간들이 우뚝 서 있다. 그런 문화생산의 주체들에게 궁합을 맞추어 보는 일은 천속한 발상에 속하리라. 시지프스적 고뇌와 실천으로 진정한 문학을 향해 맥진驀進할 따름인저.
우한용 ------------------------------------------------
소설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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