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백수린의 소설이 어둡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이 문장들은 알려주고 있다. 상실과 결핍 속에서도 생의 불꽃을 찾아내 거기에 더운 숨을 불어내려는 가뿐 호흡을 이 문장들에서 느낄 수 있으므로."
빛을 잃은 기억을 찾아서,
몸을 잃은 말들을 찾아서 / 노대원
— 2013년 여름의 소설들
낯선 익명의 시간, 이국의 이별 전야
김솔의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21세기 문학’ 2013년 여름호)는 네덜란드를 서사적 배경으로 삼아 어느 커플의 이별 직전의 상황을 그려나간다. 이 소설은 여러모로 이국적인, 그러니까 낯선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그 이국성은 이 소설의 아주 중요한 특장이며 매력이다. 물론, 머나먼 이국땅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으로도 낯선 감각에 대한 일차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빚어내는 감각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 일례로, 방금 이 소설을 요약하면서 ‘어느 커플의 이별 직전의 상황’을 그려나간다고 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다른 소설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별을 앞둔 커플이 갈등과 충돌을 일으킨 사연들, 그로 인한 우울과 분노의 정념들로 가득 찬 이야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김솔의 주인공들은 결별을 앞두고 오히려 그렇게 질퍽질퍽한 멜랑콜리의 감정을, 또는 상대에 대한 원망과 분노, 증오의 복합감정 따위를 걷어내고 표제에 쓰인 그대로 ‘가라지 세일(garage sale)’의 성공에 몰두한다. 소제목 역시 차례대로 ‘식사, 가격, 이웃, 아이, 세금, 연대’ 순이다. 소제목만으로는 소설이 아니라 여행 가이드의 네덜란드 편처럼 여겨질 것이다. 소설의 문체 또한 이별이라는 상황이 대개 불러오는 정서적 태도들이 소거되어 있다. 건조한 문장들이 인물들의 정서적 혼란과 폭발을 분출시키기보다는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묘사와 설명을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초반부를 처음 읽어나가는 독자는 소설의 주인공인 ‘Y’와 ‘G’의 이별 상황보다는 그들의 가라지 세일의 성공 여부를 무미건조하게, 조금은 재미없게 따라가야만 한다. 가라지 세일은 이별의 우울과 낭만과는 거리가 먼 경제 행위이지만 동시에 이들 커플에게는 추억의 정리, 관계의 청산 작업을 의미한다.
이 소설 특유의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서술 태도는 인물들의 태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들의 명명법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도 있겠다. Y와 G.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영문 이니셜로 표기된다. 소설에서 익명성은 곧 현대성의 다른 말로 풀이될 만큼, 등장인물 개인의 고유한 개별성을 지워버리는 기능을 수행한다. 인물(character)이 곧 개성(character)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장르에서, 인물의 개성을 최소한도로 보여주는 일은 다분히 역설적인 데가 있다. 현대 도시의 익명성이 환기하는 고독과 단절은 서먹한 침묵으로 이어진 Y와 G의 이별 전야의 내면 풍경과 썩 잘 어울린다.
이 쯤 하면, 이국성이란 용어가 불러올 이 소설에 대한 섣부른 단순화와 오해는 어느 정도 불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소설의 ‘이국성’이 거느린 더 너른 측면을 더듬어 가보도록 하자. 이 소설이 “이국적이라기보다는 근미래적”1)이라는 평론가 이수형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극동 러시아에 위치한 극한極寒의 벌목 지대 하바롭스크를 배경으로 삼은 유재영의 〈하바롭스크의 밤〉(‘문장웹진’ 2013년 8월호)과 비교해 보면 이런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유재영의 소설은 이국의 경악할 만한 대자연 속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의 실존적 몸짓을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보여준다. 백야의 악몽이나 혹한과 폭설의 밤에 벌어지는 늑대와의 처절한 사투는 거의 운명론의 그림자를 거느린다.2)
이에 비해, 김솔의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문화의 풍경이다. 흥미롭게도 유재영과 김솔의 두 소설에서는 모두 코카인이 등장한다. 유재영의 소설에서 코카인은 범죄와 거친 실존적 사투,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위한 소재로 등장한다. 반면에, 김솔의 소설에서는 네덜란드라는 마약과 성매매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관대한 사회적 조건과 관련된다. 또한, 코카인은 Y와 G가 서로 가까워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처럼 김솔의 소설에서 네덜란드는 자유와 관용의 나라이면서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식도락이 거세당한, 흥미로운 아이러니를 간직한 사회로 재현된다.
이를테면,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어조로 쓰인 다음과 같은 대목이 흥미롭다. “청빈한 칼뱅의 혁명 이후 식도락을 거세당한 네덜란드인들에게 남아 있는 전통 음식이라곤 청어절임이 전부였기 때문에, Y와 G는 갖가지 사연으로 자신들의 집에 방문한 손님들을 매번 실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66면) “이곳에서 젊음의 반대말은 세금이며, 사랑의 반대말도 세금이다. […] 비록 커튼의 길이나 계단의 숫자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 개를 운송 수단으로 여기고 세금을 부과하던 전통만큼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제 밥그릇 하나 옮기지 못할 정도로 작은 애완견을 기르는 주인도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84면)
이수형의 논평에서 이 소설이 ‘근 미래적’이라는 지적은, 부분적으로 한국사회 역시 현재와 미래에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사회적, 문화적 이슈들을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네덜란드의 사회가 먼저 고민했다는 측면에서 동의할 수 있다. 실제로 “결혼은 마치 입구는 있으나 출구가 없는 미궁과도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분명하고 간단한데 반해 그것의 밖으로 나오려면 배우자와 국가를 모두 적으로 삼고 사회적 죽음까지 각오한 채 스스로 퇴로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85면)라는 생각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한국에 사는 작가의 고민에 가깝게 느껴진다.
가라지 세일을 진행하는 Y와 G가 동거 중인 커플이라는 사실은 소설의 두 번째 대목(‘2. 가격’)에 이르러서야 알 수가 있다. 결혼과 연애 제도에 대한 사회 문화적 탐문으로 이 소설을 읽을 여지가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국 사회 남녀에 대한, 그리고 동거와 이별에 대한 단순한 세태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대개의 이성애자 독자들은 동거 중인 Y와 G가 남녀 커플이라고 추정하고 누가 남자이고 여자인지 알아차릴 단서를 찾기 바쁠 것이다. 서술자는 교묘하게 그들의 성별(sex)을 알아차릴 만한 요소를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고 있다. 소설의 네 번째 대목(‘4. 아이’)에 이르러서야 독자는 G가 임신했다는 진술을 통해 G가 여성이고 Y가 남성이라고 단정 짓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단정은 곧바로 와해된다. “G가 커밍아웃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가족 제도로 회귀하는 중일 수도 있다.”는 진술이 바로 그렇다. 맞다. 두 사람은 레즈비언 동거 커플이었던 것. 이성애자 독자들에게는, 그리고 어쩌면 동성애자 독자들까지도 이 점은 반전의 묘미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강조되어 있지는 않지만, 네덜란드는 2001년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국가로 성 소수자에게 가장 관대한 사회다. 그 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Y와 G를 앞세웠으나 실은 네덜란드가 주인공(hero)인 소설이다. 미하일 바흐찐이 소설 미학에서 강조한 소설의 주인공이 비단 인간뿐만 아니라 지역이나 주제 또한 될 수 있다는 견해에서 말이다.
‘소설가의 길’, 혹은 기억 운반자로서의 응답/책임(responsibility)
김연수의 〈파주로〉(‘21세기 문학’ 2013년 여름호)는 단편소설이 성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문체 미학의 한 절정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잘 빚어진 단편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그 진경을 목도한다. 단정하고 서정적인 문장들의 적절한 배열만이 독자가 느끼는 미적 감각의 전모는 아닐 터. 단편소설의 짧은 분량 안에 작은 사건들과 그 사건들이 환기시킨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솜씨 좋게 배치되어 있고, 그 이야기 다발들이 결국은 요란스럽지 않게 주인공 서술자의 인식과 감정, 그리고 태도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 변화를 따라가면서 독자의 마음 또한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 조용한 목소리로 발화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윤리적 인식 지평에 도달하게 되리라.
김연수의 〈파주로〉는 현재 소설가인 1인칭 주인공 서술자가 원고 마감을 앞둔 날, 어린 시절에 다녔던 고향 성당의 신부님이 돌아가셔서 급히 문상을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을 담았다. 여기서 주인공이 소설가라는 설정은 상당히 중요하다. ‘조용식’ 선배는 그를 두고 ‘역시 소설가라 다르구나!’라는 식의 감탄을 (주인공이 질릴 정도로) 반복한다. 그런 선배나 어머니 같은 주변 사람들의 그러한 오해 또는 기대와 감탄에 반응하여 주인공 서술자 역시 “도대체 어머니는 소설가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96면)하고 불편해한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상적인 불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이르면 결국 이런 불만의 목소리가 소설가로서 주인공이 수행해야만 하는 응답(response) 나아가 책임(responsibility)에 관한 탐문의 시작이라는 것을, 독자는 깨닫게 된다. 정말로 소설가라는 상징적 지위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우월한 차이점이 실재하는 것일까? 소설은 이 질문을 문면에 진술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회적으로 (문학의 윤리에 민감하게 사유하는) 독자는 그 질문에 참여하게 된다. 그 질문이 답을 찾아가는 행로가 바로 이 소설의 서사적 방향이다.
자, 만약,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차이는 특권적인 지위와 존경을 누릴 만한 어떤 우월한 재능 때문이 아니라 소설가의 책임과 윤리 덕분이리라. 그러면 과연 소설가가 짊어져야 할 짐과도 같은, 그 책임과 윤리란 과연 무엇일까? 표제의 ‘파주로’는 물론, 그저 단순한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에 불과하다. (두루 알고 있듯이, 파주는 출판단지가 있는 곳이어서, 나는 소설을 읽기 전에는 제목만 보고 ‘출판’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 소설로 짐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조용식 선배가 현재 살고 있는 지명으로 주인공에게 태워 달라고 부탁하는 말을 뜻한다. 여기서 주인공 서술자에게 안팎의 갈등이 일어난다. 주인공은 일산에 거주하고 있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소설 원고를 마감해야 하는 사정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인공이 선택하고 싶은 욕망의 행로를 표기한다면, 본래 ‘일산으로’였다. 게다가 그는 급히 가기 위해서 ‘혼자서’ 일산으로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주인공의 의지는 조용식 선배에 의해 좌절되고, 함께 나눈 대화는 어느덧 그를 과거로의 여행으로 데려간다. 이 소설에서 기억의 문학적 테마는 이렇게 작동된다. 대화 속에서, 선배는 주인공에게 “역시 소설가라 기억력이 남다르구나.”(98면)라고 평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억의 달인은 오히려 선배 쪽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의 주인공을 이렇게 회고한다. “조르바 이야기를 하더라고. 자기는 조르바 같은 삶을 꿈꾼다고. 어떤 도그마에도 갇히고 싶지 않다면서. 그래서 내가 이 아이는 우리와 다른 길을 가겠구나, 라고 생각했지. 그게 소설가의 길 아니겠니?”(99면) 선배의 관념으로는 남다른 기억의 소유자, 도그마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바로 “소설가의 길”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소설가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타인들의 시선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문상을 온 그들은 고인이 된 신부님을 떠올리며 계속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각자가 기억하는 신부님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걸 듣고 있노라니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서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저절로 생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함께 경험한다는 뜻이다.”(102〜103면) 그러다가 조용식 선배의 이야기는 조금 엉뚱하게 전개된다. 1982년에 있었던 특전사 요원들의 잇따른 C123 수송기 추락사고가 그렇다. 이 이야기를 주인공이 광주와 관련 있냐고 묻자, 선배는 “역시 소설가라 생각하는 게 남다르구나.”라면서 예의 그 감탄을 던진 후, “서로 떨어진 두 점을 연결해서 원인과 결과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민중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권리니까.”(104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배는 엉뚱하게도 이 사건들을 “특정한 시기에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UFO를 목격하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UFO 웨이브”(104면)로 추측한다. 선배의 이야기는 신부님과 주인공의 아버지가 성당에 피신해 있던 광주항쟁 관련 수배자 ‘오인수’를 다른 곳으로 도피시키던 날 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날, 선배는 밤하늘에 세 개의 빛이 나타나 하늘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던 것을 목격한다. 이것이 평생 비밀이 되었다는 것. 고인이 된 신부님이 펴냈던 신앙시집 제목이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나니’라는 것은 그제야 독자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대리운전을 하는 선배는 운전사들의 수호성인 ‘크리스토포로’를 생각한다 했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다.”(113면)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떠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가인 주인공은 일산으로 직행하여 소설 원고를 급히 마무리하기 위해 ‘일산으로’ 가지 못하고, 선배와 그의 딸을 태우고 ‘파주로’ 향한다. 파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열세 살인 선배의 딸을 보며 《안네의 일기》를 떠올린다. “은신처 바깥에서는 게슈타포가 사람들을 체포해서 가스실로 보내버리는데, 안네의 관심사는 사랑, 오직 사랑뿐이었다. 열세 살에는 사랑, 오직 사랑뿐.”(114면) 선배는 ‘1982년의 빛’을 떠올릴 때마다 신부님이 몸소 가르쳐준 성자 크리스토포로의 소명을 상기할 것이다. 또한, 그런 선배를 보면서 주인공은 잠시 소설가로서의 소명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소설가는 사람들의 기억을 옮겨다 준다. 그 일은 소설가에게 부여된 윤리적 응답이며 책임이다.’
당신과 나의 고독 사이에 흐르는 물의 말들
전위적 실험이 아니라면, 화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그리지 않는다. 반면에, 소설가가 소설에서 언어에 대해 쓰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설가는 언어로써 언어를 사유하고, 상상한다. 말言을 다루므로, 혹은 말로써만 가능한 예술이므로 문학은 상징적 질서 안에 붙들려 있으나, 덕분에 가장 성찰적이고 지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언어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소설가라면 천착해볼 만한, 그 자체로서 매력적인 소재이고 대상이다. 하지만 그 작업이 유래가 깊은 만큼, 낡은 것이 되기 쉽고 다루기에도 만만치 않을 터. 소설 속에서 사유와 이야기와 스타일이 함께 어우러져 (부)조화의 미학을 생성해내는 일은 드물고 귀한 사건이다. 더욱이, 언어는 단지 관념의 놀이를 위한 장난감이나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매개하는 통로이자 연결하는 이음매다. 그러므로 언어에 관심 있는 작가가 타자와의 관계에 관심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쩌면, 전자의 관심은 후자의 관심 덕분에 촉발된 탐구 과정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편보다, 언어와 관계의 문제는 본래 분리 불가하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백수린의 〈꽃 피는 밤이 오면〉(‘문장웹진’ 2013년 6월호3))을 읽으면서 언어의 육체성을 생각하게 된다. 언어의 육체성이라! 이 말은 단순한 논리의 회로 안에서 불가능한 말이나, 상상의 날개를 달고 비행하는 자에게는 가능한 말일 것이다. 상상력은 때때로, 혹은 자주, 화석화된 논리를 뛰어넘는 어떤 신선한 통찰을 선사하고, 숨은 진실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런 기대와 전제를, 모든 소설의 독자들은 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것이 구체적인 소설의 형태로 성공적으로 우리의 눈앞에 당도했을 때야말로 그런 기대를 현실화하는 동시에 증명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 백수린은 등단작 〈거짓말 연습〉(‘경향신문’ 2011년 신춘문예 당선작)에서 〈감자의 실종〉(‘현대문학’ 2001년 4월호) 등을 거쳐서 꾸준히 언어와 소통 (불)가능성을 소설로 탐구해왔다. 군말을 거두고, 작가의 소설 한 대목을 읽어본다.
물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점점 더 빨리 움직인다. 차갑고, 날카롭고, 고통스러운 움직임 속에서, 나는 내 가슴을, 허벅지를, 복부를 할퀴고 지나가는 이것이 물이 아니라 말(言)이라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말에 형체가 어디 있어. 동시에 내 깨달음을 부정하려 하지만, 논리적인 의식의 흐름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으므로, 나는 이내 이것이 또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또, 꿈이다. 내게로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내 살을 파먹고, 나를 어딘가 저 깊은 바닥으로 끌고 내려가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살려 달려고 아우성을 치다가, 나는 또, 깬다. 컴퓨터의 스피커를 타고, 엎드린 내 머리 위로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 〈꽃 피는 밤이 오면〉에서
꿈속의 ‘나’는 몸에 닿는 물결을 느낀다. 물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점점 거칠게 몸을 할퀴고 지나간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말(言)이다. ‘나’는 놀라 잠에서 깬다. 말들이 쏟아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작중 1인칭 서술자는 꾸준히 해오고 있는 방송 녹취 프리뷰 기록 아르바이트에 몰두하다 잠시 꿈속으로 빠져든 것이다. 그것은 안온하고 부드러운 꿈이었다가 금세 악몽으로 변모한다. 이 꿈은 서술자의 불안한 내면 풍경과 실존적 조건을 응축시켜 상연한다. 실은, 남편이 갑자기 쓰러진 후 말을 잃은 이후, 그녀는 잠을 잃었다. 그런 불행을 견디기 위해 일을 계속하고 수영을 배워보지만 고래 뱃속에 갇힌 듯, 어두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 꿈에서 ‘물의 말들’이 양가적 모습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녀의 꿈속에서, 물의 말들에는 부드러운 애무의 감촉에 담긴 에로스(Eros)가 거친 폭력의 고통과 익사의 공포를 불러오는 타나토스(Thanatos)와 함께 뒤엉켜있다. 삶과 죽음의 감각이란 몸의 존재에게만 가능한 일. 말들은 형체를 지니고 몸으로 파고든다.
그녀는 어째서 그런 불길한 꿈에 포박되었던가? 남편이 잃어버린 말에 대한 충격과 그리움을 먼저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간혹 지나쳐버릴 만한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녀가 누구보다도 온전하고도 고유한 언어를 강렬히 요구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녹취 기록 작업뿐만 아니라 희곡을 써왔다. “그 누구도 무대 위에 올리지 않는 희곡”을 써왔다고 진술한다. 그 진술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자조와 겸양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썼던 희곡들이 어떤 사건들을 담았는지 어떤 인물들이 등장하는지와 무관하게 그 글쓰기는 그 자체로서 목적인 예술 행위라는 점이다. 그만큼 그녀가 언어에 민감한, 아니 언어를 생명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작가였다는 점은 이 꿈을, 그리고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희곡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대화의 장르이다. 달리 말해, 희곡의 핵심은 ‘대화’이다. 말을 주고받고, 나아가 마음의 자리를 서로 바꿔 서보는 일이 대화라는 것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면, 삶 속에서도 대화는 인간(人間)이라는 말을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중핵이라는 데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남편과의 관계에서 대화의 드라마를 원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녀가 맞닥뜨린 현실은 저 불길한 악몽이나 고독한 ‘독백’의 어조 속에서 서술되는 진실 속에 있다.
소설 속에서, 서술자가 녹취 기록 일을 하는 것 또한, 백수린이 치밀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소설을 건축하는 작가라는 점을 알게 한다. 주인공의 아르바이트는 타인의 언어를 다른 방식으로 복기해보는 일, 다시 말하자면 언어를 곱씹는 일이다. 남편이 말을 잃고, 그 일은 더욱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얻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토막 나고 분절된, 허점투성이 입말 문장을 더 세련된 글말로 바꾸어내는 일은 남편의 언어 장애를 치유시켜보려는 그녀의 노력에 대응되기 때문이다. 특히, 동물들이 고통에 공감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다룬 다큐멘터리 방송 내용은 주인공의 작업을 비유하는 일종의 거울상이다. 남편의 언어 장애와 정리해고는, 그리고 그녀의 불면과 악몽은 그녀만의 고독한 고통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이, 회사에서 과로사한 노동자 아내의 얼굴을 마주치기를 피했다는 고백은 그것을 입증한다. 동물 실험 다큐멘터리의 멘션을 반복하듯이, 그녀는 고통의 공감과 연대에 관해 마음속에 되풀이해서 헤아렸으리라.
“당신이 말을 되찾지 못하는 날들이 더해질수록 당신의 얼굴이 점차 희미해진다는 사실” 앞에서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다 끝내 체념하며 받아들인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해독이 필요한 암호’와도 같은 남편의 “말이 아닌 말”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아나가는 일을 볼 때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남편의 말을 불완전한 병리적 언어가 아니라 “외국어로 된 노래”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녀는 고래 뱃속의 어둠 같은 절망 속에서 희미한 희망의 힘으로 대화가 가능한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고자 한다. 그 대화는 둘만의 유일한 사랑으로 시작해서 “바리게이트 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타자 윤리학으로 나아간다. ‘고독(solitaire)’이란 말은 그렇게 ‘연대(solidaire)’라는 말로, 다른 의미의 몸을 얻는다.
백수린의 〈꽃 피는 밤이 오면〉은 ‘말의 상실’이라는 모티프와 평범한 일상어를 뛰어넘는, 시적인 사랑의 외국어를 발명해나가는 서사, 그리고 그런 서사에 맞추어 감각적인 문체가 때로 시詩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한강의 경장편소설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과 상호 공명한다. 상실과 상처, 그리고 결핍과 그 회복은 두 소설의 서사적 밑절미다. 한강의 소설에서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43〜44면)와 같은 질문은 백수린의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이 말을 잃은 이후, 나는 잠을 잃었다. 잠을 잃은 대신 나는 무엇을 얻었을까. 침대로 가서 당신의 곁에 누웠다. 당신의 체온이, 이불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었다. 한 여름에도 차가운 내 발을 당신의 온기가 감쌌다. 당신은 살아 있었다. 나는 새삼 실감했다. 당신은 살아 있다.
— 〈꽃 피는 밤이 오면〉에서
불행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면서도 백수린의 소설이 어둡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를, 이 문장들은 알려주고 있다. 상실과 결핍 속에서도 생의 불꽃을 찾아내 거기에 더운 숨을 불어내려는 가뿐 호흡을 이 문장들에서 느낄 수 있으므로.
1) 「‘이달의 소설’ 선정의 말」, ‘웹진문지’ 2013년 8월.(http://webzine.moonji.com/?p=6082).
2) 유재영 소설에 대한 리뷰는 필자의 글, 〈늑대의 늪을 건너, 백야의 악몽을 건너 — 유재영의 〈하바롭스크의 밤〉 읽기〉, ‘문장웹진’ 2013년 8월호.(http://webzine.munjang.or.kr/archives/8744)
3) http://webzine.munjang.or.kr/archives/7259.
노 대 원(魯大元) -------------------------------------------
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7년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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