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가 쓴 일련의 우중소설들은 순응에 속한다. 최인호가 쓴 일련의 우중소설들은, 이를테면 그 당시 사회의 또 다른 이면 들춰내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반대중으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다. 문단이나 평단이 그 점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위에서 살펴본 3편 7권의 소설만으로 최인호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망정 그가 어떤 작품 활동을 50년 동안 해왔는지 개괄적 정리는 되었지 싶다. 이를 통해 최인호 작품세계 분석에 대한 단초 내지 시발점은 마련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장례미사에 참석한 영화배우 안성기의 말처럼 누구나 다 왔다 가는 것이지만, 70도 안된 최인호의 우리 곁 떠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우중소설과 순수문학: 최인호론 / 장세진
1. 도시적 감수성, 지다
소설깨나 읽은 사람치고 작가 최인호(1945~2013)를 모르는 이도 있을까. 그렇다. 고교 2학년이던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가작 당선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최인호가 등단 50주년이 되는 2013년 9월 25일 68세의 젊은 나이로 영면했다. 1967년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본격적 작품 활동을 펼친 최인호는 저 악명높은 10월 유신 전후 신문에 연재되었던 ‘별들의 고향’을 비롯 ‘깊고 푸른 밤’, ‘불새’ 등이 말하듯 베스트셀러 소설가로서 그 이름을 떨쳤다.
동아일보(2011.7.14)와의 인터뷰에서 최인호는 자신의 소설세계에 대해 말했다. 내 문학 인생의 제1기는 데뷔해서 1980년대 중반까지다. 제2기는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하여 2008년 암에 걸리기까지다. 그리고 제3기는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로부터 시작하려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1970, 80년대 도시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많은 독자들을 열광케 했던 일련의 현대소설들이 제1기에 해당하는 작품들이다. 제2기는 ‘잃어버린 왕국’, ‘해신’, ‘제4의 제국’, ‘상도’ 같은 역사소설과 ‘유림, ‘길 없는 길’ 등 종교소설들을 쓴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사이 작가에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2008년 침샘암 진단을 받은 것. 그러니까 암과의 투병 와중에 신작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펴낸 것이다. 책 앞머리에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두 달 걸려 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누군가의 청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아닌 스스로의 열망으로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다. 또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체질 개선 후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많은 역사소설을 쓰면서 ‘타인의 방’이나 ‘술꾼’과 같은 제1기 현대소설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했는데, 그 소망을 이룬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그런 작가의 암투병과 작품에 대한 의의가 일반 독자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출간 한 달 만에 11만 부가 팔려나갔고(동아일보, 2011.6.27), 20만 부 판매 돌파를 앞두고 잇달아 독자와의 만남을 갖기도 했다. 마침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2011동리문학상’으로 선정되었다. ‘박경리문학상’의 1억 5천만 원을 빼고, 내가 알기론 문학상 상금 7천만 원은 최고 액수인 동리문학상 수상이다. 수상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2011.10.17)에서 작가 스스로 밝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판매부수는 23만 부다.
그런 최인호가 그로부터 채 2년이 안돼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 것이다. 여기서는 작가 스스로 말한 제1~3기의 소설세계에서 각 1편씩을 추려 최인호 작품세계를 살펴보려 한다. ‘불새’(전3권), ‘제4의 제국’(전3권),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그것이다. 단 ‘불새’는 1989년 박범신, 김홍신 소설과 함께 살펴본 ‘우중소설의 문학적 위상’이라는 글에서 최인호 부분만 따로 떼어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제4의 제국’ 역시 2006년 발표한 글임을 밝혀둔다.
2. ‘불새’, 우중소설의 문학적 위상
1) 1970년대 사회의 의미
우리에게 1970년대는 실로 격변의 시대였다. 독재자의 장기집권 음모의 표출인 소위 유신헌법이 어떤 법보다도 위세를 떨쳤는가하면 적어도 현대정치사의 한 분수령일 수 있는 10·26사태가 그 시대의 종언을 고하기까지 다양한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중 경제 급성장으로 빚어진 산업화 물결은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을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근로자 대중을 양산하였고 빈부의 격차를 가중시켰다.
이런 사회적 변화의 파장波長은 문화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문학은 이른바 ‘1970년대 작가’를 배출해내기에 이르렀다. 최인호·황석영·김주영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 1970년대 작가들은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전시대와는 다르게 드러난 여러 징후들을 소설 속에 담고 있었다. 김병익에 의하면 “실존주의적이라 할 전시대적 주제성을 안고 있는가하면 노동과 공해라는 당연한 문제에 파고들기도 하고 극히 날렵하고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했는가 하면 둔중하고 엄격하게 절제하는 문체를 만들기도 하며 콩트의 양식으로 산뜻한 독후감을 안겨주는가 하면 대하역사소설로 한 시대의 전모를 밝히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문학과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1979. 90쪽)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70년대 작가들의 작품세계 속에 이제껏 낯설었던 혹은 도외시되었던 여러 부류- 작부·창녀·양공주·떠돌이 근로자 등 산업사회가 빚어낸 필연적인 소외계층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1920년대부터 발아하기 시작한 리얼리즘계열의 소설에서 궁핍한 주인공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1950년대 6·25가 남겨준 문화이식의 소설적 수용에서 ‘양공주’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일제와 전쟁이 가져다 준 원치 않는 변화였음에 비해 1970년대는 정부의 성장일변도 경제정책의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줄 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의 변화가 가져다준 폐해였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니까 인간의 욕심이 무변대이듯 욕구는 온갖 소비지향적 태세로 진입해 버렸다. 소위 문화공간의 향락적 추구에 열을 올린 나머지 가치관이 전도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각종 매스커뮤니케이션은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욕구에 불을 당겼으며 밀폐된 정치의 연장은 그나마 편승의 기회를 톡톡히 제공하고 있었다. 서구식 시민사회가 원만하게 형성되지 않은 채로 발전된 경제는 상대적으로 정신적인 빈곤을 안겨줘 기형적 문화를 창출해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류時流 속에 대중소설 내지 통속소설의 기생적 창출은 오히려 당연한 감마저 없지 않다. 1972년 9월 5일부터 1973년 9월 9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출발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독자층을 형성하며 이른바 베스트셀러소설로서 ‘문필가는 배고프다’는 속설을 완전히 뒤엎은 일련의 대중소설 내지 통속소설은 과연 어떤 것이길래 그렇듯 잘팔리는 걸까? 독자 없는 문학이 결코 본래의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없듯 많은 독자의 전폭적인 호응(구매행위)만이 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은 그 소설들이 평론가들의 눈에는 마치 의붓자식처럼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위 문제작가에 대한 그들의 시선과 소위 인기작가에 대한 그것은 실로 엄청난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이 저간의 사정이다. 그들은 대충 잘 팔린다는 것부터가 못마땅한 듯하다. 독서인구의 저조율이 선진국에 비해 월등한 현실을 감안하고, 고상한 취미와 지적 체통을 중시한 양반의 후예들인 그들의 시각이 ‘상것’과 야합하지 않으려는 속성은 굳이 대중소설에 대한 서구식 비관론과 미국식 낙관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일견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권영민의 “통속적인 소설들이란 대체로 건강한 사랑의 문제나 깊이있는 인간운명의 탐색을 거부하며, 현존하고 있는 사회질서나 권위에 대한 진정한 도전을 포기한다. 폭력이 정의처럼 위장되고 부도덕한 애정행각이 사랑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문학작품으로서의 졸렬함을 전혀 면하지 못하고 있는 잡스러운 언어의 횡포를 늘어놓기 일쑤다. 독자들은 이런 소설의 한가운데에 빠져들어, 주인공의 행동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고 위안을 삼으며, 자신이 돌아보아야 할 시간을 소설의 주인공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허비해버리는 것이다.”(소설의 시대를 위하여. 이우출판사. 1983. 196쪽)라는 대중소설 내지 통속소설- 잘 팔리는 ‘인간시장’(김홍신 지음) 등에 대한 준열한 공박은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주지만 ‘우중소설愚衆小說’이라 부를 수 있는 당위성을 마련하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라면 ‘우중’은 그런 대중을 토대로, 특히 유신체제 등 변칙적인 정권에서 철저히 통제된 집단을 뜻한다. 요컨대 정치의 민주화가 모든 것을 선진화시키는 무기라는 전제 위에 결코 민주주의일 수 없는 정치적 관심을 소비지향적이고 향락적인 문화로 이식시켜 ‘정치는 우리가 할테니 너희들은 신경쓰지 말고 실컷 놀아라’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지금껏 불리워온 대중소설 내지 통속소설, 혹은 상업주의소설들을 통칭하여 ‘우중소설’이라 이름지어 사용하기로 한다. 그것의 발달배경을 ‘대중의 우중화현상’ 등 사회사적 측면에서 살펴본 다음 최인호의 소설 ‘불새’(전3권)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우중소설의 문학적 위상’은 가능한가를 밝혀보려 한다.
2) 대중의 우중화현상
현대가 대중사회임은 사회학자 거개의 일치된 견해인 듯하다. 그 전단계였던 17, 8세기의 시민사회가 이루어진 역사적 배경이 계몽철학에 있다면 대중사회는 대중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이다. 대중이란 오르데가 Y 가세트의 정의처럼 “오히려 내적인 연관을 가지고 어떤 공통성에 의해서 외적인 자극과 열정이나 희망에 쉽게 유기적인 관계에서 반응하는 인간의 무리를 의미”(김주연편. 대중문학과 민중문학. 민음사. 1985. 35쪽 재인용)한다. 또 칼 만하임의 표현대로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세련이 안된 다수”(강현두. 대중문화의 이론. 민음사. 1984. 61쪽 재인용)이기도 하다. 요컨대 대중은 전시대의 고급문화(high culture)의 주역이던 일부 엘리트 내지 귀족층에 상대되는 개념이며, 산업화와 민주주의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이 시대 대다수의 사람이다.
여기서 대다수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다수에 끼지 못하는 소수계층- 예컨대 권력층, 재벌 등이 열외임은 물론이다. 특히 우리같이 산뜻한 민주주의를 구가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 구분은 중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은 곧잘 우중으로 전락하는 속성을 개념 형성때부터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나 초기 대중연구자들의 시각처럼 “대중은 열등한 심성을 가진 존재로 볼 뿐 아니라 충동적·격앙적·망동적·피암시적 존재로서 언제나 비이성적 행동을 일으킬 폭중暴衆·우중愚衆으로”(강현두 앞의 책. 60쪽)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학자들의 대중을 우중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중을 우중화시키는 대중문화의 부정적인 기능이다. 대중문화의 총아로 이미 자리굳힘을 한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등의 매스컴은 정치적 상황과 연계하여 한껏 선량할 수 있는 대중을 무지몽매한 우중으로 타락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산업화 이후의 우리 사회 속에서 수차례 목격해온 바 있다. 대중사회가 사치와 허영욕구의 시장, 새로운 것에 대한 집착욕 등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 지향으로 흐르고 있음은 사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예술문화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문학의 경우, 앞에서 권영민이 지적한 것처럼 그 폐해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저간의 대중소설 등을 우중소설이라 이름붙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문학성 결여 등 여러 지엽적인 문제는 고사하고 숫제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한다는 문제의 심각성을 안은 채 독버섯이 부식하듯 파고든다. 그 결과, 백프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지 못하고 가치관의 전도마저 가져오는 불행한 현상들을 도처에 쏟아내고 있다. 여기에 당대(contemparrvy)의 정치상황이 한몫하고 있음은 알려진 바와 같다. 아니, 앞에서 얘기한 대로 정치의 민주화가 모든 것을 선진화시키는 무기라면 한몫이 아니라 오히려 주도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칼 야스퍼스의 진단처럼 “대중사회의 정치적 지배는 결코 대중들의 눈에 띄지않게 되어 있”(김주연 앞의 책. 44쪽)는 특징이 있기 때문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대부분 선량한 대중들은 점차 사리판단의 예지를 잃는 우중이 되어가는 것이다.
‘별들의 고향’은 비근한 예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이 연재되던 시기는 저 악명높은 10월 유신 발발 전후였다. 언론자유가 위축되는 대신 언론의 상업주의가 정부의 돈독한 배려 속에 날로 강화되었다. 독자는 텔레비전 뉴스를 불신하면서 차라리 잊고 살자는 때 아닌 체념을 극히 말초적 자극제로 받아들이곤 했다. 그런 점에서 김종철의 ‘상업주의소설론’(김병걸·채광석편. 80년대 대표평론선1. 지양사. 1985. 참조)은 매우 소중한 전거典據를 마련하고 있다.
1980년대도 크게 예외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1980년 소위 ‘서울의 봄’의 실패가 주는 정치적 소용돌이는 1970년대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나아질 수 없는 토양이었다. 오히려 제5공화국 출범때 제정되었던 소위 ‘언론기본법’은 각종 언로言路를 차단하고 상업주의에의 편승을 부채질한 인상을 준다. 고전도 아닌 일련의 1970년대 우중소설들이 재출간되는 이상현상도 그와 관련 퍽 시사적이란 느낌을 안긴다.
그러나 대통령 직선제선거 등의 시류時流에서도 볼 수 있듯 일련의 민주화는 우중들의 눈을 비로소 뜨게해 준 듯하여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결국 대중의 수준이 높아지면 우중소설도 설 땅을 잃게 되거나 최소한 수준 향상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한 결론적인 가설을 대전제로 작품 분석에 들어가보자.
굳이 최인호 소설을 대상으로 삼은 것은 그가 소위 인기작가이자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우중소설들을 써냈기 때문이다. 우선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신문연재소설이라 하여 그 범위 안에 국한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소 원론적이긴 하지만 이 땅의 장편소설이 대개 신문을 주요 발표무대로 해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중에서도 여러 훌륭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신문소설=우중소설의 등식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 대중소설과 통속소설의 상이점을 규명하여 개념 정리를 목표로 하지않기 때문, 그리고 그것들을 포괄하여 우중소설이라는 명칭을 나름대로 사용하기 때문 신문연재소설 이외의 것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979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1980년 단행본으로 발간된 최인호의 ‘불새’(전3권)를 택했다. 그리고 논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시적 감수성, 불식된 사랑, 비현실적 진실성 등의 소제목으로 나누었음을 미리 밝혀둔다.
3) 도시적 감수성
1970년대 이래 우리 소설의 한 특징은 배경의 도시화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없었던 건 아니다. 가령 1960년대로 대표되는 ‘광장’과 ‘서울, 1964년 겨울’의 세계만 해도 그렇다. 1970년대의 도시는, 그러나 전시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산업사회로 인한 경제발달은 인구의 도시집중화를 가속화시켰고, 이른바 도시문화를 형성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제 거대화된 도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의 상황 그 자체이며, 현실적인 삶의 문제가 압축되고 있는 동시에 당대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나 이미지, 상징 그리고 삶의 배경적인 지도가 된 것”(이재선. 도시소설, 도시공간의 문학. 소설문학 1987년 5월호)이다.
이런 현상은 1970년대를 풍미한 여러 소설에 예외없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우중소설은 한결같이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도시는 샨데리아 불빛의 휘황찬란한 불야성 따위 낭만적인 곳만은 아니다. 음양이 있듯 고도의 물질적 풍요 속에는 소비지향의 한탕주의와 출세 위주의 가치관 상실 등 여러 사생아들의 비열한 눈이 번득이고 있다. 도시는, 다이아나 페스타 멕코믹에 의하면 “불행의 저장소요, 고난과 좌절로서 보여지며 또한 항상 재생적인 희망으로 보여진다. 도시는 인간의 우행을 반사하며, 영원의 배경에 대한 인간의 무의함을 조소”(이재선 앞의 글에서 재인용)하는 곳이다.
예컨대 괴물 같은 도시로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뛰어들었던 도엽(박범신 소설 ‘풀잎처럼 눕다’의 주인공)은 한 마리 불나방이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을 찾아 뛰어드는 불나방을 ‘불새’에서도 만날 수 있다. 1년 남짓의 감옥생활을 빼놓고는 비교적 도시의 호화로움 속에서 포근할 수 있었던 영후는 도엽과는 다른 도시의 제물이다. 미친 여자의 사생아로 신부 손에 의해 양육되던 영후는 성당에 불을 지르고 도시의 숲, 그 음습한 곳에서 기생하다가 제벌 2세인 민섭을 만난다. 민섭의 교통사고로 대리복역한 후 영후는 비로소 도시적 속성에 빠져 그 마각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도시는 온갖 비정상적인 화신을 만들어내는 온상인 셈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괴물 같은 도시 때문 각종 비정상적 인물이 탄생된다는 심증을 가지면서도 그걸 뒷받침할 수 있는 확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중소설의 가장 큰 단점중 하나이기도 한 인물의 비정형성은 소설의 성격창조(characterization)와는 상관없이 조금 모자란 듯한 인물(ironic mode)로 일관되어 있는 특징을 드러낸다. 이때 주의할 것은 그들이 김유정의 소설에서 만나는 액션에 의한 모자라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정신적 불구자들이며, 비윤리적·반도덕적인 인물들이다.
“내버려둬라. 미란인 기분좋게 술을 마셨다. 더 마시게 내버려둬라.”
“아빠가… 내 아빠가 아니라면 내가 연애걸어드릴 거에요. 아빠처럼 매력있는 남자는 본 적이 없어요.”
“난 미란이 너처럼 매력적인 여자는 본 적이 없다.”
“헬로, 다알링.”
비틀거리며 미란이 강회장 앞으로 걸어갔다. 미란이 강회장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잘 한다.”
오여사가 보다못해 한 마디 했다.
“집안 꼴 잘 돼간다. 더구나 현주 앞에서.”
“재미있어요. 어머니.”
현주가 진심으로 말을 받았다.
“아주 재미있는 걸요, 어머니.”
“늬아버진 내 남자지. 미란이 늬남잔 아니다. 아무리 딸이라지만 남의 유부남 이마에 키스하면 기분좋을 게 뭐냐.”
— 〈불새〉 1권
인용이 조금 길어졌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대화가 아주 개방된 가정의 단란하고 평화스러운 정경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영후의 출생이나 민섭의 성격 등 정상적인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미란은 성녀(순결한 여자)로 묘사되고, 민섭의 성기를 손에 쥐고도 깔깔대며 웃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여자이다. 더욱이 그들 “가족의 만남은 매우 오랜만이며,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들에겐 그럴만한 이유도, 근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개인사적 범주이기보다는 사회사적 의미일 때 설득력이 더 생김은 말할 나위 없다. 요컨대 그 흔한 6·25라든가 일제 강점기는 고사하고 유신치하의 숨가쁜 어떤 시대적 정황도 세팅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정치적 외풍이 컸던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하다못해 우리가 살고 있는 끈끈한 어떤 모습도 천착하지 않은 점이 독자를 호도할 강한 인자로 작용한다. 그것은 좋은 말로 피안의 세계이다. 때문 독자들은 아편에 취하듯 정신적 몽환을 체험하며 몰입하게 된다. 그런 몰입은 우중소설의 감각적인 섹스 묘사에서 한층 배가될 소지를 안고 있다.
4) 불식된 사랑
먼저 그들의 섹스는 사랑을 기초로 하지 않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란 정신과 육체의 원만한 조화로 다져지는 ‘인간적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저 괴테의 말처럼 “모든 모순을 제거시키고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어떤 힘”이 된다. 그것은, 그러나 바이탈리즘에 입각한 D·H 로렌스적 사랑이든가 휴머니즘을 고창하는 톨스토이적 사랑이든지 하다못해 싫어도 지켜야 할 도리밖에 없었던 춘향식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성기가 다른 이성지합異性之合일 뿐이다.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만족을 줄 생각도 없으면서 잔뜩 부풀려놓기만 하는 전시효과적 섹스일 따름이다.
혀를 그녀의 입안에 밀어넣고 영후는 미끈거리는 민물고기와 같은 혀를 맞부딪쳤다. 생선 비린내가 풍겨왔다. 여인의 혀가 늪을 헤엄쳐 나와 영후의 이빨을 가만히 두드렸다.
여인의 목이 서서히 부러졌다. 그 목 위에 영후는 입술을 들이대었다.
여인이 몸을 활처럼 휘었다. 무어라고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 소리는 잠꼬대처럼 들려왔다. 여인의 등허리에 손을 돌려 지퍼를 벗겨내리고 영후는 마른 어깨 위에 걸린 소매를 이빨로 밀어냈다.<중략>
브래지어를 걸치지 않은 여인의 젖가슴이 목덜미 아래에 매달려 있었다. 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흘러내리다 굳은 촛농처럼 젖가슴은 다소 흩어져 있었다. 씹다 벽에 붙인 껌과 같은 젖꼭지가 마른 젖가슴 위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곳을 영후는 찾아 씹었다.
— 〈불새〉 1권
인용문은 영후가 자수하기 전날 밤 술집에서 돈 주고 산 여자와의 정사장면이다. 거의 이런 식이다. 일견 여체를 신성시하는 것같이도 보이지만 섹스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배경도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올바른 사랑관에 혼란을 가져올 위기를 다분히 내포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섹스는 음모를 위한 수단,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추악한 것으로 전락하는데서 한껏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미친 소리 하지마.”
영후는 은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어 앞으로 잡아당겼다. 영후는 은영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난폭하게 부딪쳤다.
은영의 몸은 반항할 겨를없이 영후의 품 속에 안겨들었다. 영후는 은영의 몸을 침대 위에 쓰러뜨렸다.
— 〈불새〉 2권
그것은 다름아닌 폭력이다. 위 인용문은 우중소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폭력의 한 대목이다. 가령 TV에서 강간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하자. 나쁜 짓하는 것은 차치하고 우선 야릇한 기분이 드는 경험을 비단 청소년들만이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성性은 보호할 가치도, 숨겨둘 내밀함도 없는 이른바 ‘상품’일 뿐이다. 그런 세태의 단면과 맞닥뜨리는 것은 그만두고 의식의 최면화 상태에서 겪는 어리석음의 체험은 우중소설의 한 속성일 수밖에 없다. 민섭은 별장에서 개(달타냥)를 풀어 영후를 상해시킬 때도 현주와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있다. 도구화된 섹스인 것이다.
5) 비현실적 진실성
우리가 고단하게 사는 일상 현실이라고 해서 죽음이 없지는 않지만 결국 주인공을 죽이는 결말은 단적인 예일 것이다. 출세와 야망을 위해서, 혹은 사랑을 위해서 누이동생을 범하고 애인을 빼앗는 영후의 죽음은, 그러나 매우 환상적이다.
영후는 이제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에 더 머물 수가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르려 한다면 방황하는 영혼이 되어, 산 사람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곁을 끊임없이 맴돌며, 간혹 그들을 괴롭히는 미친 영혼으로 남아있게 될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든 순간 그의 영혼은 천천히 떠올랐다. 그의 몸은 나무 위로 솟구쳐 올라 잔디밭을 내려다보며 별장의 붉은 지붕 위를 날아올라 천천히 멀어져가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지상의 세계는 요염한 햇살 속에 타오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만남이, 그녀의 사랑이 그의 방황하던 영혼을 진혼鎭魂시켰음을 영후는 느꼈다.
— 〈불새〉 3권
죽음은 끝이다.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 묻어둘 수도 있다. 따라서 영후의 죽음은 그가 저지른 온갖 잘못을 속죄하는 당연한 의식이며, ‘불새’의 세계를 와해시키는 청신호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 영후같이 살면 결국 죽는다는 결구의 인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릇 독자들이 죽음을 안중에 두지 않는 영후와 같은 삶을 동경하는 의식구조의 확산에 있다. 1970년대를 휩쓴 여러 우중소설들의 주인공이 한결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이런 죽음은 한국소설의 한 숙제이기도 하다. ‘있는 일’의 세계처럼 보이게 하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애오라지 대리만족(vicarious gratification)은 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다. ‘영웅’의 등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대중사회가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많은 스포츠·연예계 스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대중문화가 모든 문화를 동질화시키는 것 역시 알려진 이론이다. 요컨대 우중소설은 때 아닌 영웅들을 출연시킴으로써 단순한 흥미와 자극은 물론 저질의 늪에 빠져들 수 있는 함정을 파놓는다. 황광수의 “무미건조한 생활 속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부지불식간에 느낄 수밖에 없는 이들은 영웅적인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행동에 몰입되어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의 무력감에서 해방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감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나약한 소시민 근성을 근본적으로 치료해줄 수는 없는 것이”(삶과 역사적 진실성. 한국문학의 현단계1. 창작과비평사. 1982. 133쪽)라는 지적은 꽤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영웅탄생은 하잘 것 없는 대중을 우중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나 대신 활약해주는 ‘영웅’에 의하여 이성 마비와 판단 미숙의 어리석음을 짊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런 영웅은 글자 그대로 영웅일 따름이지 대중사회의 보편적인 대중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각종 섹스무비無比와 폭력의 세계, 그리고 종국엔 죽음으로 귀결되는 세계가 우리의 일상세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원한과 복수, 출세와 야망 등이 인간감정의 한 지류는 될 수 있을지언정 대중사회의 대중이 공감하는 무릇 정서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대중소설 내지 상업주의소설은 무릇 대중을 어리석게 만드는 우중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
6) 감동 혹은 문학성
그렇다면 우중소설은 감동이 없는 단순한 이야기의 나열일 뿐인가? 때문 문학성이 없고, 문학이 될 수 없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저간의 대중소설에 관한 시비를 살펴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사실 대중소설 혹은 통속소설이 1970년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신문학발달과 더불어 생겨났다. 정한숙에 의하면 “영광스럽지 못한 뜻에서의 대중소설로 명명되기는 1930년대부터이”(대중소설론. 고대인문론집. 1976)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대중소설이 1970년대의 소위 베스트셀러소설로서의 상업주의소설과 궤를 같이 할 수는 없다. 일제나 유신시대라는 정치적 상황은 대동소이할지 몰라도 사회적 변화의 폭이 엄청나게 다양하고 크기 때문이다. 요컨대 1970년대의 대중이란 개념은 일제시대의 피지배민중과 전혀 별개이며, 시장점유율 및 전파방법, 매스미디어 등의 면에서 확실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1977년 염무웅의 “오늘의 소비문화와 상업주의 문화는 인간정신에 대해 비할 바 없이 파괴적으로 작용하며 <중략> 우리 소설문학이 부딪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협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민중시대의 문학. 창작과비평사. 1979. 323쪽)는 상업주의 문학에 대한 공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불합리한 사회구조, 부조리한 정치상황 등이 우중소설을 양산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곽광수의 “상품이 잘 팔린다는 것은 그만큼 거짓된다는 말과도 같다”(위장 잘된 저질이 인기높다. 조선일보,1980.6.20)는 공격은 그런 대로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우중소설들이 그려내는 세계는 결코 ‘진실된 비진실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세계는 허무맹랑하고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김이연의 “작가는 냄새나고 더러운 한 인간의 삶을, 비참하고 끔찍한 한 사건을 보여주기 위하여 사탕과 같은 묘사, 캡슐과 같은 용기를 이용한다”(작가는 많은 독자를 원한다. 조선일보,1980.7.6)는 주장은 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사탕과 같은 묘사, 캡슐과 같은 용기”가 여러 우중소설에서 예외없이 드러나고 있거니와 그것들이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지 또 뒷받침을 실속있게 하는지가 최대의 관건이 될 터이다.
우리는 여기서 엄숙히 시인해야 한다.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고, 원한과 복수, 출세와 야망 따위가 주요 제재인 소설은 읽히는 재미가 있다는 것과 그 재미가 감동과는 다르다는 점을. 그리고 그것은 무릇 대중을 사고思考의 백지상태로 만들어 우중이 되게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 전달방법을 떠나 무엇인가 담고자하며, 그것은 흔히 전달방법에 의해 가리워지고 만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우중소설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고도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이문열의 여러 소설들을 만나볼 수 있다.
문제는 정치적 불안정 속의 상업주의 언론에 편승한 작가의 야합과 산업사회 이후 꾸준히 부식되어가는 인스턴트 사고방식의 독자들 수준이 얼마만큼 향상되느냐에 있다. 어쩌면 그것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과학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할수록 반대급부적으로 생겨난 불치의 병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고매한 문학정신만을 이상으로 하는 우리나라 문학적 지식층의 지나친 결벽주의이다. 그 결벽주의가 양반적 결기임에는 틀림없지만 우중소설의 문학적 위상을 가늠할 척도임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한편으론 최인호나 박범신·김홍신 들의 유려한 문장과 감각적이면서도 광범위한 상상력 등이 문학의 호재好材이면서도 그렇듯 우중소설로 매도당하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문학발전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하고 폭넓은 인식을 위해서다.
3. ‘제4의 제국’, 역사적 충격과 국민적 카타르시스
말 그대로 불볕 더위 속에서 최인호 장편소설 ‘제4의 제국’(전3권)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우리나라 소설가로는 거의 유일하게 고교생으로 신춘문예에 뽑혀 ‘천재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던 최인호의 소설을 읽은 건 오랜만이었지만, 나로선 ‘주몽’, ‘연개소문’과 같은 TV드라마 보기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독서였다.
‘주몽’의 경우 시청률 40%를 오락가락하는 인기드라마이다. 그리고 시청률 40%는 나 같은 중년의 남자들이 TV를 봐야 나올 수 있는 수치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때 아닌 부여나 고구려 등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열풍이 거센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벌써 여러 해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이 그 연원이랄 수 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포함해 고조선·부여·발해 등의 역사가 중국사라는 억지를 사실화시키려는 중국의 ‘역사왜곡사업’이다. 중국 정부는 이를 위해 5년간 무려 3조 원을 투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연개소문과 을지문덕 장군을 생생히 기억하는 우리로선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지만, 하긴 어디 중국뿐이랴!
지난 8월 15일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공식 강행해 전국민적 분노를 불러 일으켰던 일본의 역사왜곡도 만만치 않다. 일본은 지금도 틈만 나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가하면 2001년엔 우리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국관련 부분이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채택하고 말았다.
1) 오리무중의 가야 역사
‘제4의 제국’이 TV드라마들처럼 그런 이웃 나라의 역사왜곡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역사적 화두를 던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 지금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가야국에 대한 역사탐험이 그것이다. 사실은 내가 배우고 기억하는 우리의 고대국가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정립시대였다. 그리고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반쪽통일을 한 후 고려, 조선으로 왕조가 이어졌다는 정도이다.
그 동안 역사소설이나 TV드라마 등이 앞다퉈 다뤄온 소재나 시대배경도 대부분 조선시대였다. 그러다가 2000년 후삼국시대의 ‘태조 왕건’을 시작으로 2005년 ‘신돈’까지 고려시대를 그렸다. 급기야 TV드라마의 시대배경으로 부여, 고구려가 등장했지만, 가야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자연 가야는 학자나 전문가들에게만 관심의 대상인 미개척지 내지 불모지였던 것이다.
작가 역시 “제4의 제국 가야의 비극은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와 달리 눈으로 가시화된 문화유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제3권 20쪽)며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가야의 건국신화가 기록된 것은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인 일연의 《삼국유사》가 유일하다”(제3권 21쪽)며 국민의 관심에서 비켜선 가야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일단 그 점에서도 ‘제4의 제국’은 커다란 의미가 있는 소설로 받아들여진다.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제13호 고분에서 출토된 6점의 ‘파형동기’를 단서로 하여 ‘수수께끼의 왕국’으로 불리워지는 가야의 역사에 가일층 접근하고 있어서다. 예컨대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사를 파병해 신라를 도운 역사적 사실은 요지부동이지만, 그 원정의 결과는 그야말로 쇼킹하다.
나로선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 금관가야의 멸망 및 일본으로의 민족대이동이 그렇다. 민족대이동은, 그러나 단순히 피난살이의 이주가 아니다. 그들은 그곳의 원주민을 정복하고 실질적으로 일본을 건국하는 세력이 된다. ‘인덕천황’과 ‘응신천황릉’, 학문의 신 ‘스가하라’, ‘하세기’(가야토기 중에서도 최고의 명품)제작의 신기술, 세계 최고의 무덤을 조영할 수 있는 토목공사 등이 그것이다.
역사적 충격은 그뿐이 아니다. 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보잘 것 없는 나라인 가야가 사실은 북방의 기마민족(부여)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 점은 일본인 에가미 교수가 발표한 논문 ‘기마민족설’에도 나타난다. “일본을 건국한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천손족의 선택받은 민족이 아니라 북방에서부터 기마민족이 가야를 거쳐 일본의 규슈九州로 진출한 후 긴키近畿지방으로 들어와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나라를 세운 것”(제1권 44쪽)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이제까지 백제의 아직기나 왕인 박사가 일본에 문물을 전달한 것 정도만 알고 있었던 나의 역사인식을 180도 뒤집는 이같은 가야국의 정체성의 비밀을 접하는 마음은 온통 소름이 끼칠 만큼 경악스럽다. 또한 나의 역사에 대한 무지가 이토록 참담하게 느껴진 적도 없다. 아울러 일제의 식민지전쟁 이후 가속화된 일본의 역사왜곡에도 그저 성명서나 시위 따위로만 대응한 우리의 소극적 자세가 부끄러워 견딜 길이 없기도 하다.
2) 역사는 말이 없지만…
‘그러나 그 역사적 사실을 지우고 없애버린 것은 천년의 세월이 아닙니다. 세월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비롯한 우리입니다. 우리 것인데도 우리 것인지도 모르고, 우리 것인데도 찾지 않으며, 우리 것인데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는 바로 우리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 제2권 160쪽
위 인용문은 화자(나)가 무령대왕의 출생지 확인을 위해 간 ‘가당도’에서 안내를 맡은 야마다 노인에게 말하려다 마음속으로만 부르짖은 말이다. 우선 백제 무령대왕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역사적 접근이 새롭게 와 닿는다. 1971년 발굴된 무령대왕릉 관목의 재질이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인 점 등이 사실에 대한 개연성을 높여 주지만,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위 인용문에서 보는 주제의식의 느낌이고 반성이다. ‘제4의 제국’ 전편을 관통하는 이같은 의식은 우리가 과연 역사있는 민족인가를 되묻게 한다. 말할 나위 없이 역사 없는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이미 지나간 것이라 말이 없지만, 현재의 동인動因이며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역사는 민족의 뿌리를 캐내는데 없어서는 안될 밑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찾기’ 내지 ‘역사가꾸기’는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단일민족 어쩌구 해대는 이 땅의 역사 깔아뭉개기이다. 의도적인 깔아뭉개기까지는 아닐지라도 정부가 역사에 무심한 건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제7차교육과정에서의 국사 푸대접을 들 수 있다. 고교의 경우 1학년때 조선후기까지만 필수과목으로 배운다. 근 ·현대사 부분은 2학년때 선택과목으로 배운다. 세상에, 국사를 선택으로 배우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러고 보면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빌미를 주는 것도 우리 스스로이지 싶다.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 운운하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 역사인식과 비교해보면 말짱 거짓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먹고 사는 일이 다급한 후진국도 아닌데 그렇듯 역사를 소홀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리 먹고 살기 어려워도 역사를 내팽개쳐선 안된다. 오히려 그럴수록 역사는 소중한 반면교사의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비극적 역사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내가 ‘태백산맥’·‘아리랑’·‘한강’·‘토지’·‘객주’·‘장길산’ ·‘불의 제전’ 같은 대하소설 내지 대하역사소설들을 즐겨 읽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박제가 된 역사라 말이 없지만, 그것을 통해 ‘현실적 진실’을 깨우치고 미래의 삶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기에 소설로서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 중요성은 백 번, 천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4의 제국’ 역시 곳곳에서 역사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있다. 예컨대 제1권 264~265쪽, 제2권 43쪽, 제3권 21, 78, 110쪽 등이다.
한편 비극적 역사를 다루는 소설가들이 그렇듯 최인호 역시 국내고분은 물론이고 일본, 인도 등지의 현지답사를 통해 소설에 박진감을 불어 넣고 있다. 간혹 신화적 이야기가 가미되어 일견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을만한 긴장감과 함께 리얼리티를 살려내 ‘역시 최인호’라는 느낌을 준다. 그런 과정에서 수과하욕(1권 209쪽) ·비육지탄(1권 217쪽) · 낙양지귀(2권 27쪽) 같은 고사성어, ‘종묘’(1권 174쪽) ·‘기인’(1권 214쪽) ·‘토표’(2권 56쪽)·‘귀도’(3권 118쪽) 등의 제도, ‘훼기습속’(1권 148쪽) · ‘순장’(1권 149쪽) 따위 풍습외에도 일본인의 기질이나 자연 등을 아는 재미가 쏠쏠하여 과외의 소득이라 할만하다.
노출박물관을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하오의 햇볕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아직 석양은 아니었지만 저녁으로 가는 노을은 목욕를 준비하듯 조금씩 옷을 벗고 있었다.
— 제1권 150쪽
그뿐이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 묘사체의 감각적 문장은 그가 이런저런 베스트셀러 소설에서 보여준 ‘최인호표’ 식이라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와 더불어 ‘그렇다면’ 같은 단어 하나를 한 문단(한 줄)으로 잡아 생각을 이어 나가는 표현방식이 돋보인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역사 소재의 긴 이야기 호흡을 조절하고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두는 독특하면서도 세련된 전개기법이어서다.
3) 그러나 남는 아쉬움
그러나 막상 ‘제4의 제국’을 단숨에 읽으면서도 나로선 걸림돌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감감적이면서도 세련된 문장에 비해 문단의 들쭉날쭉함이 그것이다. 지면사정상 여기에 직접 옮겨 적을 수 없음이 안타깝지만 너무 짧은 문단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김원일의 ‘불의 제전’(전7권)에서처럼 그 길이가 단행본 기준 한 페이지가 넘는 것도 그렇지만, 고작 두 줄이나 한두 개 문장을 단위로 바뀌어 버리는 문단은 문제다. 장편소설이 일정량 유지해야 할 독서의 호흡이 끊겨 정독의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것이다’의 빈번한 사용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이다. ‘~것이다’는 앞 문장의 의미를 명확하게 하여 강조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당연히 어쩌다 한번 사용되어야 문맥이 매끄러워진다. 그런데도 한 문장 바로 다음, 또는 한 문장 걸러 ‘~것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를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어 단숨에 읽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것이다’가 나오면 다시 한 번 앞 말의 의미를 살펴보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읽는 재미는 멀리 달아나버리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4의 제국’이 아쉬움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왜 이제야 이런 소설을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알고보니 고구려·백제·신라·가야는 같은 뿌리의 동족인데도 서로를 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인 역사를 남겨놓고 있다. 그것이 비록 ‘땅 따먹기’ 시대의 불가피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깨닫는 말 없는 역사의 의미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기에 이제서야 ‘제4의 제국’을 만난 아쉬움이 크다 할밖에.
설사 소설에 펼쳐진 가야에 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한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제4의 제국’이 독자에게 안긴 카타르시스라든가 대리만족의 체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수년 전 한국이 일본에게 핵무기 공격을 하는 내용의 장편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김진명 지음)가 그랬듯 ‘제4의 제국’ 역시 연이은 탄성과 함께 ‘국민적’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소설이라 해도 될 성싶다. 다름아니라 가야국 역사의 비밀을 통해 저 일본의 빈약한 뿌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또 다른 나의 발견
1) 자아분열의 세계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한 마디로 K가 사흘 동안 또 다른 K가 되어 겪는, 다소 헷갈리는 이야기다. 동아일보(2011.7.14) 인터뷰를 보면 “익숙한 일상에서 길을 잃은 남자의 사흘간 기록이란 내용이 자칫 난해할 수 있는데, 이런 뜨거운 반응을 기대했는지”라는 질문이 있다. 작가의 답엔 “정말 고마운 일, 큰 위안이자 기쁨” 같은 인사치레만 있을 뿐이다. ‘자칫 난해할 수 있는데’에 대한 명확한 답이 적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독자의 뜨거운 반응은, 일견 이상한 일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카타르시스나 ‘도가니’의 공분公憤을 자아낼 만큼 술술 읽히는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별들의 고향’이나 ‘불새’, 그리고 ‘깊고 푸른 밤’ 같은 ‘우중소설’(통속소설, 대중소설, 상업주의 소설 따위를 총칭하며 내가 사용한 용어다. 물론 이 우중소설은 지금의 ‘장르소설’이란 용어가 보편화되기 훨씬 이전에 쓴 것이다.)에서 볼 수 있던 세계가 아니다. 작가의 말대로, 그리고 책 말미에 실린 발문(오정희, 김연수)의 지적대로 ‘타인의 방’류의 작품세계 연장선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연재 따위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작가 스스로 쓰고 싶어 자발적으로 쓴 전작 장편소설, 최인호 문학 제3기의 성공을 알린 신호탄이라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성싶다. 이쯤해서 작품 속으로 직접 들어가보자.
변기 물을 내리고 돌아서는 순간 K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맞은편 거울 속에 벌거벗은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사람이 다름 아닌 K의 모습이 투영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K는 필요 이상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거울 속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거울 속의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놀란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 속 사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나신이었다. 한 번도 잠옷을 걸치지 않은 나체로 잠들어본 적이 없는 K로서는 뜻밖의 낯선 모습이었다. K는 거울 속의 벌거벗은 모습을 타인처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물어 말하였다.
“당신 누구야, 누군데 거기 숨어 있어.”
K의 목소리는 공명을 일으키며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질문의 내용이 너무나 희극적이어서 K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며 크게 웃었다.
“그야 나지, 누구긴 누구야. 흐잇흐잇 흐흐흐.”
— 20~21쪽
K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타인처럼 느끼고 있는 내용의 위 인용문은, 일단 독자를 아연 긴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장차 전개될 사건을 암시하는 훌륭한 복선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이상의 시 ‘거울’이 스쳐간다. 어느날 갑자기 주인공이 벌레로 변해버리는 카프카의 ‘변신’도 생각난다. 요컨대 현대인에게는 나 아닌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아분열이다. 여러 이유가 제시되지만, 분명한 ‘주범’ 하나는 산업화시대의 기계주의 또는 배금주의다. 니체가 갈파한 현대인이 앓고 있는 두 가지 질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그것을 모르는 질병도 그와 무관치 않다. 고등동물인 인간에게는 본능이나 물질보다 정신의 문제가 더 위협적이라는 얘기다.
과연 K는 소설이 진행되는 3일 동안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겪는다. 조금 난해할 수 있는 이야기, 언뜻 이해되지 않는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선 사물이다. “K는 미혼의 청년시절부터 사용해온 ‘V’라는 브랜드의 스킨만을 고집해왔”(24쪽)는데, 오늘 보니 Y로 바뀌어 있다. 다음 날엔 X, 또 그 다음날엔 D로 변해있다. 사람의 경우, 아내가 아내같지 않고 딸도 그렇다. 옛 매형 P교수는 에오니즘(여장남자)에 빠져 있다. 그중 압권은 친구나 KJS에게 느끼는 정욕이다. 장인이 P교수와 이혼한 누나랑 재혼해 매부가 되어 있는 건 그 결정판이라 할만하다.
썩 이해되지 않는 또 다른 나가 겪는 세계는, 그러나 도시적 감수성과 지독스러울 만큼 리얼한 일상 묘사로 인해 현실감을 획득하고 있다. 최인호에게 도시적 감수성이란 다분히 생물학적인 인간의 모습을 말한다. 고교 동창인 정신과 의사 H와 불륜에 빠져있는 간호사의 K에 대한 추파, 짙은 선팅으로 인해 간이나 콩팥 등 장기를 불법 적출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카섹스, 카페에서 K를 향한 여자의 교태와, 남들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어느 남녀의 애무, 성인방, 창녀촌 풍경들이 그것이다. 이때 유의할 것은 354쪽에서 보듯 진짜 아내와의 격렬한 섹스 말고는 제1기의 소설에서처럼 ‘진하게’ 묘사된 ‘이층집’ 장면이 없다는 점이다.
응당 그것들은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재미의 요체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자아분열이라는 꽤 철학적이거나 정신의학적 이야기 전개에 질겁하면서도 한편으론 흥미를 느끼며 그 세계에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주변 묘사의 일상성과의 묘한 조화도 또 다른 나로 인해 빚어진 뒤죽박죽 세계를 희석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가령 창녀촌 골목 입구 큰 거리 건너편에선 “재개발을 반대하는 철거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이를 막는 전투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화염병이 나뒹굴었다. 경찰들이 발사한 최루탄으로 일대는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209~310쪽) 같은 리얼한 일상 묘사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럴망정 또 다른 나가 겪는 세계는 건강하거나 온전한 것이 아니다. ‘섀도 박스’(55쪽)와 ‘강박증’(57쪽)이 슬쩍 비치더니 아니나다를까 매트릭스(126쪽), 정신적 해리解離현상(139쪽), 카프그라 증후군(145쪽), 공황장애(146쪽), 도플갱어(327쪽) 등 낯선 용어들이 소설 끝날 때까지 숨 가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덕분에 ‘매트릭스’나 일부 연예인에게 나타났다는 ‘공황장애’정도만이 낯익을까, 그 외는 모두 질병을 나타내는 전문용어들로써 대중일반에겐 낯설기 그지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또 다른 나의 발견은 현대사회 어느 귀퉁이에 또아릴 틀고 있는 정신적 질병에 관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그것들은 또 다른 나에 대한 당위성이라는 원군이기도 하다. 예컨대 “불안신경이 갑자기 발작하는 증세”(146쪽)인 공황장애라든가 “독일어로,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분열된 또 다른 자기 자신의 생령生靈을 보는 심령현상”(327쪽)인 도플 갱어이기 때문이다. 나 아닌 또 다른 나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설쳐대며 ‘지랄을 하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에선 많은 것들이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처제의 결혼식 장면(77쪽)이라든가 누나의 외양 묘사(219쪽)가 그렇다. 심지어 “‘아멘’은 ‘안아줘’라는 소리로 들렸고, ‘찬미 예수’는 ‘아이 좋아’의 교태로, ‘아버지’는 ‘여보’의 감창暢으로 느껴”(285~286쪽)지기까지 한다.
발문에서 소설가 오정희는 “이 소설이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를 그린 심리소설이나 판타지를 넘어서는 것은, 우리 소설 전통에서는 흔치 않았던 신에 대한 사유, 죄와 윤리에 대한 집요한 물음이 있기 때문이다”(381쪽)고 말했다. 전편을 관통할 만큼 집요하지는 않지만, 신의 존재나 복음의 전당이라 할 성당(교회)에서 행해지는 미사와 회개에 대해 부정 내지 회의적 시각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하나됨의 영성을 얻기 위한, 또 다른 나의 뒤틀리거나 잘못된 모습도 ‘나의 탓’이라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소정의 수순일 뿐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모든 죄가 남의 탓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 선택한 것이며, 그러므로 그 책임은 내게 있다는 인민재판식의 공개 사죄문이었다. K의 몸에서 전율이 흘렀다. 그렇다. 이 모든 죄의식은 세일러문의 탓도 아니고 누이인 JS의 탓도 아니다. 오직 나의 탓이다.
메아 쿨파 Mea Culps.
라틴어로 ‘나의 잘못’을 뜻하는 이 단어는 K가 어머니를 따라 성당을 드 나들었을 때 사제들이 사용하던 라틴어의 한 구절이었다. 그 무렵, 사제들은 신자들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상이 있는 벽쪽을 바라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라틴어로 된 제례문을 외웠다.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내 잘못을 통하여, 내 잘못을 통하여, 나의 가장 중대한 잘못을 통하여 고백하나이다).”
— 294~295쪽
위 인용문에서 보는 ‘메아 쿨파’는, 결국 K₂와의 대질로 종결된다. 진짜 아내와 격렬한 섹스를 치른 후 K는 월요일 일상으로 귀환한다. 잠시 뒤죽박죽된 또 다른 나의 세계에서 먹고 살기 위한 몸짓의 출근 상태로 돌아온 나는 그 동안 보고 겪었던 가짜들과 작별한다. 소설가 김연수는 발문에서 “현실은 언제든 그처럼 붕괴될 수 있다는 점, 그게 바로 진실이다”고 전제한 후 “모든 것과 작별한 뒤에야 우리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이 소설이 너무나 무겁게 읽히고,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394쪽)라고 말한다. 다소 혼란스러운 또 다른 나의 이야기였을망정 이 소설이 기억 속에 남는 건 맞다.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부조리의 파편이나 잔상들이 드러났음은 물론이다. 바람피우는 아내를 시도때도 없이 미친년이라 욕해대면서도 자신 역시 불륜에 빠져있는 H라든가 한때 영화배우이자 탤런트였던 누나의 이혼과 재혼에 따른 폭식증 환자로의 변모 및 아들의 교통사고사, 누나의 옛 남편 P교수의 여장남자 즐기기 등이 그렇다. 이런 가계사적 말고도 “입으로는 정의를 부르짖으며 행동으로는 부패와 뇌물과 타락과 위선과 구제불능의 권위와 야합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312쪽) 따위 부조리도 또 다른 나의 낯설지만, 낯익은 세계가 거둬들인 수확이라 할만하다.
2) 그러나 뭔가 미진한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뒤죽박죽 서사구조라하더라도 작품내적 리얼리티 문제다. 결혼한지 15년된 K가 총각시절부터 썼다는 스킨로션 V는 또 다른 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로 보이지만, 나(필자)의 경험상 실제에선 없다고 해야 맞다. 유행에 따라서든 상술에 의해서든 또는 그 두 가지 이유에서든 이내 단종시키고 신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업계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장치인 휴대폰 분실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다. 잃어버려 돌려받는 건 뚜렷한데, 그 원인행위가 인과적 결구로 드러나있지 않아서다. H가 권유한 대로 누나를 만나긴 하는데, 그 결과 역시 뭔가 미진함을 남긴다.
제 1~3부의 첫 부분을 동어 반복하여 강한 끌림을 주는 ‘구성의 기술’과 달리 문장이나 문단이 주는 아쉬움도 있다. 특히 1문장의 1문단 사용이 너무 잦아 아연 긴장된 독자의 마음상태를 깨버리는 것이 그렇다. ‘제4의 제국’에서처럼 ‘~것이다’의 잦은 사용은 없지만, 부분적으로 조사 중복 사용으로 어색한 문장이 아쉬움을 준다. 가령 “의식적인 접착제로 강제로 이어 붙인 후”(18쪽),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흘렀던 기억이 있다”(114쪽), “소프라노의 음색으로 벽으로 가려져 있어”(285쪽) 등을 보면 각각 ‘~로’, ‘~이’, ‘~으로’ 따위 조사가 연이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어색한 문장은 문맥 파악이 더뎌지고, 독서의 흐름을 끊게 된다.
문단은 전반적으로 정제되어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어 아쉬움을 준다. 예컨대 244, 262쪽을 살펴보자. 형식문단은 말할 나위 없고, 내용문단으로 가늠해보아도 분리되어선 안될 곳인데, 두 줄짜리 독립된 문단이 되어 있다. 어색한 문장이 그렇듯 들쭉날쭉한 문단 역시 독서의 호흡을 불규칙하게 만든다. 이런 문단은 1~3부 동어 반복된 1문장 1문단이 작가의 의도적 배치일 수 있다는 점과 아무런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오류라 생각된다. 그 외 대화중 여러 곳에서 물음표가 없어 주는 혼란이라든가 “앤티크한 골동품”(210쪽)이나 아예 영어 원문사용 따위 현학적 표현도 나로선 좀 불만스럽다.
이미 앞에서 이 소설이 작가의 암투병 와중에 쓴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작가는 조정래, 김훈 등과 함께 직접 펜으로 작품을 쓴다. 펜으로 쓴 이 소설이 발간된 과정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보도(동아일보, 2011.8.10)에 따르면 출판사 직원을 작업실로 불러 원고를 읽어주며 치게 했다. 간간이 제대로 옮기고 있는지 살폈고, 교정도 봤다. 작업은 일주일 동안 계속됐다. “2008년 침샘암 발병 후 장시간 말을 하기 어려운 그가 힘겹게 친필로 쓰고 읽는 고통을 감내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적인(힌)’(107쪽), ‘편이여(어)서’(219쪽), ‘따듯(뜻)한’(351쪽), ‘내려가야 하였(했)다’(369쪽) 같은 오타는 순전 출판사의 성의 부족 때문이 아닌가 한다.
띄어쓰기도 예외가 아니다. 하긴 한글띄어쓰기 규정만큼 복잡하고 헷갈리는 것도 없긴 하다. 애써 그걸 지적하는 이 글 역시 띄어쓰기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망정 기본적 띄어쓰기 오류는 지적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한글띄어쓰기사전(조영희, 신아출판사, 2003)에 따르면 ‘한 마디’는 띄어쓰게 되어 있다. 그런데 65쪽에서 ‘한마디’로 붙여 표기한 후 여러 군데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한자리’(86쪽), ‘한순간’(327쪽)도 각각 ‘한’을 뒷말과 띄어써야 한다. 다만 ‘출세하다’의 뜻일 경우 ‘한자리하다’로 붙여 쓴다. ‘한자리할 사람 같다’도 ‘한자리’하고 붙여 쓴다. 그 외 ‘10년만’(192쪽)은 ‘만’을 앞 말과 띄어야 하고(193쪽의 ‘10여 년 만에’는 맞게 되었다.), ‘또 다시’(195, 237쪽)는 ‘또다시’로 붙여써야 맞다.
하나의 장이 아쉬운 점 모음이 되어 버렸지만, 소설가 최인호가 스스로 제3기 문학세계의 신호탄으로 쏘아올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꽤 새로운 소설이다. 도시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그려낸 일련의 현대소설이나 여러 역사소설들과 작품세계를 달리 하고 있어서다. 전작 소설들, 작가 말대로 독자를 의식하고 쓴 소설들과 같은 점이 있다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역시 ‘가볍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문단에서, 출판시장에서 볼 수 있는 최인호의 힘이다. 오래오래 건강하여 다음 작품이 나오길 기대하는 이유이다.
5. 에필로그
그러나 그 기대는 2년도 안돼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 이제 우중소설과 순수문학의 세계를 넘나든 소설가 최인호는 가고 없다.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이제 최인호의 작가적 위상은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말할 나위 없이 최인호가 써낸 일련의 우중소설들도 그 시대를 풍미했던 한 아이콘으로 각광받은 문학이기 때문이다. 가령 1973년 출간한 첫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은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100만 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다. 1974년 개봉된 영화(감독 이장호) 역시 서울 관객 46만 명을 넘기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그때의 100만 부나 관객 46만 명이 지금과 같은 수치가 아님은 말할 나위 없다.
최인호의 작가적 위상이 재정립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해리포터 시리즈를 떠올려보면 빠른 이해와 공감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 생각한다. 조앤 롤링의 원작소설(전7권)을 영화로 만든 해리포터 시리즈가 대장정을 마친 건 2011년 7월이다. 마지막 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가 2011년 7월 13일 개봉된 것. 2001년 1편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개봉되었으니 자그만치 10년 동안이다. 그새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인기였다.
우선 1997년 첫 출간된 원작소설은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67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200여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모두 4억 부 넘게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역시 한겨레(2011.7.13)신문에 따르면 “지난 7편의 시리즈가 전 세계에서 약 64억 달러(약 7조 원)의 흥행 수익을 거뒀고, 국내 관객만 2410만여 명을 모았다”는 통계이다.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편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 이전까지의 기록이다. 마지막 편 국내 관객이 440만 270명이니 8편 모두 합친 숫자는 4850 만 270명이 된다. 당연히 국내를 비롯 전 세계적 흥행 수익도 7조 원을 훨씬 웃도는, 그야말로 신기원을 이룩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두 편 정도만 본 사람조차 알 수 있듯 작품은 말도 안 되는 아동용 판타지일 뿐이다. 영화는 원래 대중문화이니 그렇다쳐도 소설이 전 세계적으로 그런 대접을 받은 건 곱씹어 볼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아동용 판타지는 되고 호스티스가 등장하는 성인용 대중소설은 문학이 아니라면 자던 소도 웃을 일 아닌가? 또한 일반대중과 따로 노는 평단의 엄숙주의가 인식의 변화를 가져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시대상황이다. ‘10월 유신’과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1970, 80년대는 일제침략기 못지 않은 엄혹한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 작가에겐 두 가지 길이 있다. 순응과 저항이 그것이다. 최인호가 쓴 일련의 우중소설들은 순응에 속한다. 최인호가 쓴 일련의 우중소설들은, 이를테면 그 당시 사회의 또 다른 이면 들춰내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반대중으로부터 열렬히 환영받았다. 문단이나 평단이 그 점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위에서 살펴본 3편 7권의 소설만으로 최인호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망정 그가 어떤 작품 활동을 50년 동안 해왔는지 개괄적 정리는 되었지 싶다. 이를 통해 최인호 작품세계 분석에 대한 단초 내지 시발점은 마련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장례미사에 참석한 영화배우 안성기의 말처럼 누구나 다 왔다 가는 것이지만, 70도 안된 최인호의 우리 곁 떠나기는 너무 이르다.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장세진 --------------------------------------------
문학· 방송· 영화평론가, 1989 ‘표현’신인작품상과 1990 《무등일보》 신춘문예로 각각 등단. 수상 : 전북예술상(1998), 신곡문학상(2001), 전주시예술상(2002), 한국미래문화상(2005), 단국대학교 교단문예상(2010), 전북문학상(2011) 등, 저서 : 영화평론집 ‘영화, 사람을 홀리다’, 산문집 ‘깜도 안 되는 것들이’ 등 39권(편저 3권 포함) 외 다수. 현재 한국문인협회전북지회 회원이며, 군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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