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음식은 누가 어떤 마음과 정성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음식의 맛이 달라진다. 음식 만들기가 생의 모토인 그녀의 음식은 정갈하고 담백했다. 시원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잊을 수 없는 그 맛을 찾아서 / 김부희 (수필가)
-우동 한 그릇-
몹시 추운 날이다. 추위만큼 어깨가 올라간다. 이렇게 뼛속까지 한기가 드는 날이면 따끈한 국물 한 모금이 그립다. 온몸으로 따스함을 느끼게 만드는 우동 한 그릇의 그 맛이라니!
그 우동 국물의 맛이라면 대구의 ‘미성당’이 떠오른다. 여고 시절, 학교 수업이 파하고 학원가가 있는 반월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D 백화점 건너편의 골목길이 제일 빠른 길이다. 그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면 길가로 난 연탄 화덕 위의 큰 양은 솥에는 늘 우동 국물이 설설 끓고 있었다.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우동 국물 냄새가 밴 뽀얀 수증기는, 돌아서면 배가 고픈 우리에게 심한 허기를 부르다 못해 현기증까지 일으켰다. 용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친구들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 떼가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다. 벽을 빙 둘러 붙여 만든 식탁과 아주 작은 동그란 나무 의자. 궁둥이 하나도 제대로 비비적거리지 못할 의자에, 참고서 등으로 터져나갈 책가방과 교련복 가방까지 부여안고 우린 우동 한 그릇에 코를 박았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우동 한 그릇에는 쫄깃한 면발과 유부 몇 조각과 쑥갓 한 줄기가 전부다. 그런데 그 향취와 맛은 죽음 직전의 바로 그 맛이 아닐까 싶다! 음식은 그래서 추억인가 보다.
우동 이야기가 나오니, 일본의 ‘구리 료혜이’의 ‘우동 한 그릇이 생각난다.
일본의 섣달 그믐날 밤은 우동을 먹는 풍습이 있다. ‘북해정’ 국숫집 역시 섣달 그믐날이라 분주하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가게 문을 막 닫으려 하는데 어린아이 둘의 손을 잡고 허름한 여인이 들어섰다. 아주 조심스럽게 한 그릇의 우동을 시켜도 되겠느냐며 물었다. 주인은 우동 1인분에다 반 인분을 더 넣었다. 그들은 국물이 맛있다며 맛있게 나눠 먹고 돌아갔다. 일 년 뒤, 똑같은 날, 같은 시각에 그들이 왔다. 그들이 오면 주인은 올해부터 올랐던 우동 가격을 작년 가격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들이 앉는 2번 식탁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예약석이란 푯말이 놓여 있다. 그들은 이번 섣달 그믐날은 우동 2인분을 시켰다. 주인 내외는 우동 3덩어리를 넣었다. 그들은 맛나게 우동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의 사고로 엄청나게 진 빚을 갚기 위해 큰 아이는 조석으로 신문 배달을 하고, 작은 아이는 엄마의 할 일을 대신하며 오늘에야 그 빚을 다 갚았다. 둘째 아이가 작문 시간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글을 썼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식당은 날로 번창을 했다. 가게 수리를 했지만 2번 테이블만큼은 옛날 그 자리에 놓여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섣달 그믐날, 마지막 그 시간에 2번 테이블 앞에 두 남자와 초로의 여인이 우두커니 서 있다. ‘우동, 3인분을 시켜도 되나요?’ 공손한 주문의 음성을 듣고 주인은 비로소 그들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날 이후 열심히 살아, 아무런 부족함 없이 어머니를 모시며 잘살고 있다고 했다. 식당 안에 모인 손님들과 주인내외는 그들 세 모자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 추운 겨울에 읽으면, 우동 국물처럼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글이다.
일산 장항동. 라페스타 거리에 ‘마샬라 인디아’라는 음식점이 있다. 주방이 손님 테이블(2개)보다 좀 더 크다. 여주인은 40대 후반의 이진이 씨다. 그녀의 음식 철학은 중국의 손 없는 피아니스트가 양발로 연주를 하면서 ‘죽거나 멋지게 살거나’에서 비롯되었다. 이왕 사는 것, ‘음식을 맛있게 만들고 멋지게 살자.’라고 다짐했다. 식물도 예쁘다 하면 잘 자라 꽃을 피우듯, 음식을 만들 때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을 거야.’ 라는 생각으로 정성을 다해 직접 만든다. 똑같은 재료에 똑같은 사람이 만들어도 어떤 마음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음식도 혼이 있다. 기다릴 줄 아는 손님의 음식은 더 맛있게 요리가 되고, 재촉하는 손님의 음식은 그저 빨리만 만들기에 국물 맛이 달라진다. 어차피 요리하기를 좋아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마음과 정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 시월 라페스타 거리의 영화관에서 한 달간 독립영화제가 열렸었다. 매일 단골로 찾아온 호주의 여류 감독 Mandy 씨가 영화제를 마치고 돌아갈 때,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구절판을 선물로 보냈다. 그 후,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하니, 그녀야말로 한류의 선봉장인 셈이다.
최 시인과 찾아간 그날도 겨울비가 뿌리고 난 뒤라 몹시 쌀쌀한 날이었다. 숙주가 듬뿍 들어간 우동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먼저 온 손님들이 두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두 팀이 다 단골손님이다. 20대의 손님은 점심으로 이집의 우동을 늘 먹는 이였고, 50대의 의료사업을 한다는 이 역시 단골이다. 아들이랑 혹은 동료나 친구들과 이 집을 즐겨 찾는다며, 음식 맛과 솜씨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마누라 음식 솜씨 자랑하듯이.
그렇다. 음식은 누가 어떤 마음과 정성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그 음식의 맛이 달라진다. 음식 만들기가 생의 모토인 그녀의 음식은 정갈하고 담백했다. 시원했다. 그리고 따뜻했다.
김부희 ---------------------------------------
시인, 수필가, 여행작가.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저서 《열린 문 저편》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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