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마라도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생의 질곡 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나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한 만큼 산다고 하질 않는가. 그 무엇인가를 사랑한 넓이와 부피와 깊이만큼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그 섬에 가고 싶다 / 김하나산(一山)
인생은 선택이라고 누가 말했든가! 제주로 가족여행을 떠나올 때만 해도 나에게 별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육지에서 최대한 멀리로 떠나올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 택했다.
나의 여행 지론은, 집을 나서면서부터, 길을 가면서부터, 내 마음으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다. 품어 보는 것이다. 놓아 버리는 것이다. 부유하는 것이다. 동화되어 가는 것이다, 하나 되는 것이다. 시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찰나의 아름다움과 애처로움과 마음 빼앗김에 전율하며 가슴으로 품는 것이다. 영혼의 깊은 곳에서 시시로 울림이 올 때 , 갈증을 느낄 때, 그들(우주만물)의 냄새와 모습, 그리고 그들이 음성 메시지를 두고두고 꺼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들길에서, 풀섶에서, 아주 작은 야생화의 가느다란 잎새의 떨림에도, 향내에도, 하늘에서, 바람에게서, 타인에게서, 모든 것들이 품고 있는 존재와 앎에서. 나의 나됨을 잃어가도 좋고, 찾아가도 좋고, 새로운 자아발견을 해도 좋다. 해서 여정은 늘 나를 달아오르게 만든다. 살아 호흡할 수 있음에 감사하게 만든다.
벗이랑 떠난 여행은 외롭지 않아서 좋고, 가족들이랑 여행을 떠나면 시끌벅쩍 소란스럽긴 해도 마음이 편해서 좋다. 그렇지만 여행의 백미는 홀로 하는 여행일 것이다. 인생이 그렇듯 여행을 떠나면, 때로 행복했고 때론 쓸쓸하고 외로웠다. 자유롭고 아름답고 즐거운 시간이 더 많았는지, 아님 쓸쓸했던 순간이 더 많았는지는 지금 계수하고 싶지 않다. 아직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기에, 걸을 수 있는 길이 더 많이 남아있기에 이 길을 선택한 것이다. 백만장자처럼 아낌없이 길을 걸으련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내가 놓친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그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기에. 그 길을 찾아 샛길로 걸어가 보련다. 길 떠남을 사랑하다보면 사랑한 만큼 길이 보일 지도 모르니까!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고/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하였습니다./…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 버트 프로스트의 ‘걸어보지 못한 길’ 중에서 -
나의 선택으로 감행한다. 섬에다 가족들을 풀어 놓고 혼자만의 섬으로의 여행을. 대한민국의 끝이자 시작점인 섬 마라도. 지난 밤, 몹시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이일 것이란 걱정도 앞서지만 모슬포(대정항)에서 나를 기다리는 마라도를 만날 수 있기에 떠난다.
이런 날씨 속에서도 마라도를 향하는 정지 여객선은 출항을 했다. 배의 차창으로 연신 파도가 덮친다. 하얀 포말이 겨울 추위를 부추기는 듯 다가온다. 겨울 바다의 쨍함을 맛보기 위해 물벼락을 맞아가며 2층 난간을 오른다. 연신 파도는 들이치고 힘들게 요가 자세로 난간 손잡이에 몸을 의탁한 채 겨울 바다에 빠져본다. 멀리 눈을 이고 있는 한라산도 눈에 들어온다. 바다가 흰 포말이 송악산, 삼방산의 산등성이를 밀어내며 마라도 선착장에 닿았다. 어찌나 바람이 센 지, 숨이 막히며 치아마저 시리다. 바람이 불면 불수록 각오가 단단해진다. 단단해진 만남에 대한 기대감에 달뜬다.
선착장을 지나서 바람을 길동무삼아 천천히 오르내리며 걷는 길은 채 1시간도 못 미칠 것 같다. 국토 최남단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잘 다듬어진 길 따라 바람에 지쳐 누운 억새밭을 지나 오른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반질거리는 대한민국 최남단이라는 표지석을 배경으로 동심들이 웃고 있다. 그 곁을 지나자 아주 조그마한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전 억새밭 사이로 조그마한 교회당이 보였었다. 좀 더 걷자니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1박 2일에 등장했던 마라분교 가파 초등학교가 눈에 들어온다. 단 두 명의 학생이 공부한다던데. 작지만 아주 따뜻한 사제의 정이 흐를 것 같은 초등학교다. 그 옆으로 큰 절과 중국집이 몇 개 보인다. 중국집 안에는 언젠가 TV 속 광고에서 “자장면 시키신 분!”을 외치며 홀로 바다 위에서 쪽배를 타고 외치던 문구가 와 닿았는지 손님들로 북적인다.
이 길이 끝인가 해서 해안선을 따라 거꾸로 돌아서서 내려간다. 느린 걸음으로 가본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적한 낮은 구릉 한쪽에 조그마한 제단이 눈에 들어온다. 소주병 몇 개와 과일, 과자 등이 제단에 차려져 있다. 이곳은 할망당(애기업개당)이다. 해녀들이 험한 물질을 지켜주던 ‘할망당 처녀당’이라 불린다. 이 마라도 섬사람들은 때를 따로 정해 놀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다 싶을 때면 이곳 본향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이라고 적혀있다.
이곳 마라도 사람들은, 아니 우리들은 생의 질곡 속에서 그 무엇인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나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한 만큼 산다고 하질 않는가. 그 무엇인가를 사랑한 넓이와 부피와 깊이만큼 살아가는 게 인생이니까!
바람 따라 바닷가에 혼자 큰 댓 자로 누워 김수영 시인의 ‘풀’을 암송해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김하나산 ----------------------------------------------------
시인이며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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