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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2월호, 수필가가 감동한 명수필⑫-김태길의 <글을 쓴다는 것>] 나를 위해 쓰는 글 - 노혜숙

신아미디어 2014. 7. 28. 10:00

"“글이란 자기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라는 김태길 선생의 말씀에 밑줄을 긋노라니 언젠가 읽은 한 경제학자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빵을 만들라.” 사람은 어차피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일할 때 가장 즐겁고 생산적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일 게다. 그래, 내가 즐겁지 않은데 어떻게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독자를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나를 위해 쓰는 글, 어쩌면 그 속에 진정한 글쓰기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의 비법이 있는 건 아닐까."

 

 

 

 

 

 나를 위해 쓰는 글        -  노 혜 숙

 


글을 쓴다는 것     /  김태길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整理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姿勢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무언有言無言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約束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充實하게 실천實踐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整頓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方法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은 반성反省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想念을 어떤 형식으로 거짓 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自己自身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現在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過去와 현재를 기록記錄하고 장래將來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里程標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作業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感情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妙方이기도 하다. 만일 분노憤怒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客觀的인 사실事實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餘裕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整頓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에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나 간섭干涉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被害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商品이나 매명賣名을 위한 수단手段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친한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豫想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低俗한 이해利害와는 관계關係가 없는 풍류가風流家들의 예술藝術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高尙한 취미趣味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眞實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內面을 속임 없이 솔직率直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는 감동感動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滿足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稱讚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發表해도 손색遜色이 없겠다.”
   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稱讚과 격려를 듣고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용지原稿用紙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雜誌社에 보내기로 용기勇氣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想像하지 못하면서, 활자活字의 매력魅力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雜誌나 신문新聞은 항상恒常 필자筆者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記者들의 수첩에 등록登錄된다. 조만간早晩間 청탁서淸濁書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訪問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自進投稿者로부터 청탁請託을 받는 신분身分으로의 변화變化는 결코 불쾌不快한 체험體驗이 아니다. 감사監謝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受諾하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원고原稿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漸次로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自我가 안으로 정돈整頓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情熱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記錄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壓力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質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決心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 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人事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請託을 전문專門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 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債務者의 위치位置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經驗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心情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趣味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苦役으로 전락轉落한다.
   글이란, 체험體驗과 사색思索의 기록記錄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時間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餘裕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 흐를 때, 그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一旦 붓을 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誠實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一部의 사실을 전체全體의 사실처럼 과장誇張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人氣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境遇에서 흔히 발견發見된다. 자극刺戟을 갈망渴望하는 독자나 신기神奇한 것을 환영歡迎하는 독자의 심리心理에 영합迎合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墮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罪惡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衒學의 허세虛勢로써 자신을 과시誇示하는 일이다. 현학적衒學的 표현表現은 사상思想의 유치幼稚함을 입증立證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虛榮스러움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稱讚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表明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自我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成長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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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은 최초의 글짓기는 만화였다. 나어린 동생들이 유일한 독자였다. 그림 솜씨는 형편없었으나 말을 엮어가는 재주는 웬만했던지 늘 다음 이야기를 채근하곤 했다. 동생들의 알량한 응원 덕에 낙서 실력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아직 지나지 않은 달력의 뒷면은 물론 새로 산 공책이며 아버지의 고등학교 앨범에까지 낙서를 하며 놀았다. 완고한 아버지의 검열로 한바탕 혼쭐이 나고서야 철없는 나의 유희는 끝이 났다.
   초등학교 때 중단된 그 유희가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된 건 어느 영세한 출판사에서 가필을 하게 되면서였다. 번역된 소설을 가필加筆하고 정서하는 일이었는데 재미가 쏠쏠했다. 문장을 다듬고, 정확한 단어를 찾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문장구조를 우리 정서에 맞게 전개해나가는 일은 까다로운 만큼 성취감이 있었다. 마치 내가 그 작가가 된 것처럼 신명이 났다.
   그리고 뒤늦게 지명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수필가란 이름을 얻었다. 다리에 급성관절염이 생기도록 컴퓨터 자판과 씨름했지만 성에 차는 글은 쓰지 못했다. 미사여구로 치장한 글은 그럴싸했으나 감동이 없었다. 설익은 사상에 주장만 강했고 시야는 자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두 권의 책을 내고서야 어렴풋하게나마 글이 무엇인지 감이 왔지만 아는 것과 쓰는 것 사이의 괴리는 여전했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문학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어서 구태에 젖은 나를 채찍질했으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헛발질을 할 때마다 중심을 잡아준 것이 김태길 선생의 <글을 쓴다는 것>이라는 작품이었다. 선생의 글은 내게 왜 써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모범답안이었다.
   선생의 글은 솔직담백하고 곡진했다. 무엇보다 글은 진실의 표명이며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다. 그에 더해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지 않을 것과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지 말고 허세로 자신을 과시하지 말라는 말씀을 수시로 되새겼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생존에 필수적이겠지만 작가로서 끝내 지켜야 할 기본자세도 잊지 않아야 함을 일깨움 받았다.
   한번은 마감 전에 서둘러 원고를 마무리하여 보내놓고 몹시 후회를 한 적이 있었다.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낸 격이었다.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할 수필에서 그보다 치명적인 결함은 없을 터였다. 그것이 비단 글에서만 아니라 인생사 모든 일에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엉뚱하게도 덤으로 얻은 지스러기 고구마 덕이었다.
   당진은 호박고구마 생산지였다. 사람들이 당도 높은 호박고구마를 선호하다 보니 가짜 호박고구마까지 생겨났다. 어느 날 수완 좋은 아주머니의 너스레에 넘어가 호박고구마를 한 상자 샀다. 덤으로 지스러기 고구마를 얻었는데 미처 자라지 않은 새끼고구마가 태반이었다. 그날 저녁 쪄먹은 지스러기 고구마의 맛은 짐짐했다. 종자가 아무리 좋아도 제대로 성장하고 숙성해야 제 맛을 낸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사람들의 입맛은 아주 민감해서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금세 구별해 낸다. 한 알의 고구마에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곱씹어 새길 수 있는 글임에랴. 더구나 이제 독자들은 철없는 동생들이 아니고 다양한 글맛을 섭렵한 어른들 아닌가. 어물쩍 눈가림으로 쓴 글은 물론 흑백의 단조로운 글이 입맛에 맞을 리 없다. 이젠 인생의 반환지점을 지나면서 “올라올 때 보지 못하던 그 꽃”을 볼 때다. 그 꽃들을 보기 위해 좀 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는 것. 어쩌면 물질적 세계의 강함을 이기는 문학의 말랑한 힘은 거기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글이란 자기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라는 김태길 선생의 말씀에 밑줄을 긋노라니 언젠가 읽은 한 경제학자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빵을 만들라.” 사람은 어차피 이기적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일할 때 가장 즐겁고 생산적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일 게다. 그래, 내가 즐겁지 않은데 어떻게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독자를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나를 위해 쓰는 글, 어쩌면 그 속에 진정한 글쓰기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의 비법이 있는 건 아닐까.

 

 

노혜숙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조르바의 춤≫, ≪생생, 기척을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