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대상에 대한 마주보기이면서 바라보기이다. 앞서 소개한 작품의 작가들은 하나의 공간을 설정하고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내재적 확장을 통하여 원래 장소가 갖고 있던 의미에 작가 고유의 의미를 접목시켜 의미소를 공간에 부여해준다. 장소가 바뀌면 의미가 달라지고 소재에 대한 해석력이 바뀌면 현재의 행동을 새롭게 풀이할 수 있다. 찻집이 연기자의 무대로 바뀌고, 뒷산이 회상의 공간이 되고 텃밭이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는 통신문으로 변용될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생명을 얻기 위한 탈바꿈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세상을 마주 보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을 비틀어보고 바꾸어보고 뒤집어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문제작이 되는가 아닌가의 분기점이라고 하겠다."
수필시학, 내연으로서 공간 확정 - 박양근
문학은 확장이라는 동력으로 움직인다. 주제가 발전하고 소재가 새롭게 해석되고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나가는 것은 문학작품이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미학적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수필에서는 수필시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수필과 수필쓰기의 연결고리에 해당한다.
문학의 생성은 내연과 외연의 확장으로 구분한다. 외연과 내연은 주로 언어에서 이루어지며 모든 낱말은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외연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이어서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 제한적이라면 내포는 감성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개념을 무한대로 펼쳐나간다.
외연에서는 개념이 객관적이고 개괄적으로 표현된다. 외연의 예는 ‘장미는 관목성의 꽃나무다.’처럼 사물에 대한 명시적 정의로 나타난다. 이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1차적 개념으로 평면적이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차원이다. 요약하면 사전에 적힌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내연은 2차적 정의에 속한다. 예를 들면 “장미는 열정과 애정의 꽃”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내연과 내포는 비가시적이지만 충만한 느낌을 지니므로 문맥과 시공에서도 다르게 그려진다. 상징적이고 함축적이며 일체적인 표현으로서 내포에는 작가나 화자의 연상과 의도가 끼어들기 마련이다.
함축적인 내포는 시나 소설 같은 글에서 주로 쓰인다. 그래서 내포는 논리적인 글에 주로 사용되는 외연과 상호배타적이다. 수필은 순수시와 달리 감성과 교훈성을 동시에 갖는 글에 가깝다. 수필이 미적 효용과 실용적 효용을 동시에 지니는 것은 내포적이면서 외포적이고, 외연적이면서 내연적인 확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외연이 내포를 규정하지 못하지만 내포는 외연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이 추구하는 새로움은 전혀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보다는 새롭게 의미화하는 데 있다. 그래서 수필의 언어와 문장과 배경과 인물을 “전도를 통해 만들어낸 풍경”이라고 부른다. 전도를 통해 만들어진 풍경 중에서 인상적인 것이 공간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은 문학적 충동이 펼쳐지는 3차원의 세계일 뿐 아니라 인간이 시시각각으로 살아가는 장소의 ‘집합集合’으로써 공간이므로 매 순간 확장하지 못하면 단순한 배경에 그쳐버린다. 등장인물 역시 역동적인 행동과 미묘한 심리적 추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문학적 근력에 의하여 공간미학이 상승할 수 있도록 나름의 역동성과 삶에 대한 참신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전미란의 <딸꾹질>
전미란의 수필은 첫눈에 보아도 낯설다. 전통적인 수필기법을 포기하고 화자가 연극의 주인공으로 연출할 수 있는 대본의 형식을 택한다. 수필양식을 나름대로 선택한다는 것은 타성적인 형식을 버리고 새로운 수필시학을 실험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말과 같다. <딸꾹질>이 일인극 대본이든, 단막영화 시나리오이든, 혹은 공연은 염두에 두지 않은 레제드라마이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딸꾹질>은 4개의 짧은 신(scene)으로 이루어진 단막극으로 설치되어 있다. 찻집은 스토리의 배경이 아니라 등장인물과 연출자가 번갈아 등장하고 퇴장하는 무대로 설정된다. 이것은 “여러분이 알고 있던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라고 독자를 관객처럼 대면하는 대화로써 알 수 있다. 수필화자 역시 연극의 시작을 알려주는 무대감독을 연상시켜준다. 달리 말하면 전미란은 글이라는 무대를 행동이 펼쳐지는 무대로 전환시키고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여주는 심적 공간으로 확장해나간다. 장소라는 언어가 지닌 내연이 심리적으로 입체적으로 초시간적으로 확장된다는 의미이다.
그의 <딸꾹질>은 “얼마 전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았던 일을 개그 프로 멘트를 빌려와 직접 연출해보자.”는 무대 지시문으로 시작한다.
# 2.
몇 걸음만 옮겨도 각종 브랜드 커피숍으로 즐비한 골목에 가격파괴 커피를 팔고 있는 찻집이 생겼다. 그곳은 하루 종일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다. 이렇게 꽃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틀림없이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위 단락은 꽃비 내리는 날의 찻집 묘사에 집중하고 있다. “가격파괴 커피숍, 꽉 들어찬 사람”은 평소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할 개연성을 제공하고 작중 인물에게는 핑곗거리를 제공해준다. 사건이 우발적일지라도 치밀한 계획과 설계에 의하여 짜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연출이니까 그런 것이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간단하다. 커피값을 5,000원 내었으니 거스름돈으로 2,000원을 받아야 하는데 종업원이 5,000원을 고스란히 주었다는 에피소드이다. 5,000원을 그대로 받으면서 커피 두 잔을 공짜로 마신 셈이다. 작가는 그 뻔한 계산을 번잡한 커피숍에 핑계를 댄다. 커피숍이라는 도시공간이 휴식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오류를 엿보는 밀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 3.은 일종의 후일담이거나 아마추어 무대비평이라고 여겨도 좋다. 화자는 커피숍을 빠져나왔지만 ‘세상에 길들여진 질서로서 양심’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달콤쌉쌀한 커피를 홀짝일 때마다 잘못 계산한 과오를 일깨우는 딸꾹질이라는 생리작용이 되풀이한다. 심리적 강박관념이 육체적 증상으로 나타난 딸꾹질은 ‘참으려 할수록 간격은 짧아지고 소리는 커진다.’ 3,000원에 양심을 판 고통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전미란에게는 이것은 감내하여야 할 벌칙이지만 들이켠 커피를 뱉어낼 수 없다. 당연히 진실의 속임수도 어찌할 수 없다. “순수하게 셈하던 주판”이라는 양심을 되살리려 하나 인생 무대에 지난 시간은 어느 경우에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과거의 자아가 퇴장해버리면 현재의 자아만이 무대에 남게 될 따름이다.
그러나 전미란은 진실하다. # 4.는 자신의 마음속에 능청스러움이 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오십 년 묵은 구렁이가 동네 슈퍼나 대형마트 계산대에서 예고 없이 나타나 당황스럽게 하였다.”라고 밝히는 것처럼, 계산착오에 대한 고백과 함께 거짓 현장이 동네 슈퍼와 마트로 확장하고 있다. 장소의 확장은 동일한 사건이 반복한다는 점을 나타낸다. TV 속의 개그가 도입하였을 때의 효과는 사이버공간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의 일치는 “시치미와 능청을 떨며 딸꾹질을 멈추지 않는 것”을 풍자하는 효과를 준다.
전미란은 수필가에서 벗어나 연출가로서 양심이라는 무대를 사용하여 꽃비 오는 날의 행적을 1인극으로 공연한다. 거스름돈의 오류가 딸꾹질이라는 몸말로 내연됨으로써 공간의 확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결미가 ‘이들은 왜 이러는 걸까요?’라는 개그형식으로 끝나는 것도 제3자인 방관자의 상황을 비꼬는 말이다. 커피숍이라는 공간이 무대로 바뀌면서 연출자와 등장인물과 무대감독이 시차를 두고 차례차례 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새록 <뒷산에 오르다>
김새록의 사색 공간은 가을 뒷산이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뒷산은 가족과 가정을 뒤에서 받쳐주는 포근하고 정겨운 이미지를 품고 있다. 김새록은 단순히 가을 뒷산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온 과거를 회상하는 사색에 빠진다. 지형으로서 산이 미학적이고 추상적 개념으로 발전함으로써 산이라는 사전적 의미에 인간의 삶이 지닌 의미가 첨가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뒷산이 다수의 식물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외형에 초점을 맞춘다. “상수리나무와 산벚나무 칡넝쿨이 서로서로 몸을 받쳐주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나무들이 뜻하는 의미는 함께 어울리는 것이다.
산벚나무 이파리가 함께 떨어져 상수리를 사뿐 덮어준다. 산에도 이렇게 상부상조하는 삶이 있다니! 나는 속으로 감탄하면서 산의 이야기에 빠져든다.
김새록은 나무의 풍경을 상부상조하는 인간의 삶에 빗대고 있다. 떨어진 낙엽이 서로의 둥치를 덮어주고 있는 공존의 풍경은 가을이 아니면 다른 계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육안을 통한 관찰을 계속하던 김새록은 심적 반응으로 옮겨 잎사귀를 통해서 산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 자연의 소리를 듣는 청자로서 그녀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가족 간의 에피소드를 되살려낸다. 나무가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삶의 이야기를 회상시켜 주는 일종의 촉매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뒷산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삶의 이야기를 거듭 풀어내면서 수필이라는 텍스트를 완성시켜간다. ‘하얀 실 같은 포자를 푹푹 친 억새’를 지켜보면서 ‘한 많은 여인의 긴 한숨’을 떠올린다. 억새와 여인을 결속시키는 확장은 상부상조하는 삶뿐만 아니라 한을 지니고 있으므로 서로 등을 기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존을 전해준다. 김새록은 인간의 한을 통하여 ‘풀과 나무와 바위’도 한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뒷산에 오르다>는 자연에서 인생을, 인생에서 자연을 연상하는 쌍방향적 확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김새록은 소박하고 우아한 쑥부쟁이에 청각언어를 덧붙인다. 쑥부쟁이는 시각의 대상이다. 쑥부쟁이가 시각의 대상이지만 의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청각과 후각과 미각을 덧붙여져야 한다. 그 결과 쑥부쟁이는 “가을햇살과 만나는 꽃부리에서 가을노래가 터진다.”라는 청각언어로서 가을의 정취를 한껏 받아낸다.
쑥부쟁이의 가을노래는 하나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의 언니이다. 뒷산이라는 향수의 무대에 언니가 등장하면서 감춘 물건을 찾아내 장난치던 자매간의 다정스러운 모습이 실제 풍경처럼 나타난다. 이로써 뒷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지난 시절의 가족이 등장할 수 있는 무대가 된 것이다.
산이 무대가 되었다는 사실은 작가의 내면이 끊임없이 시간을 타고 흐른다는 사실에 일치한다. 그중의 하나는 산길에서 만난 나이 든 부부가 서로 싸우며 지나가는 삽화이다. 작가는 이 광경을 “집에서 부부끼리 속상한 일을 싸들고 와 산에서 푸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서로 언성을 높이며 지나가는 부부와 무엇이든 감싸주려는 산의 속성을 대비시킬 때 다다르는 결론은 산에서 싸움질하는 것은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비로소 ‘뒷산’의 의미가 고스란히 나타난다.
나는 그들의 성난 목소리를 잊으려고 애쓰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풀잎을 내려다본다. 몸을 낮춘 풀잎은 내 마음을 아는지 다시 기운을 내 바람을 탄다. 칡넝쿨이 칭칭 감아올렸음에도 여전히 불평이 없는 상수리나무를 바라본다.
산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그것은 “사람이 자연을 가까이하면 자연을 닮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일부이어야 하므로 자연을 닮아야 한다. 뒷산에 오른 김새록도 가을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을 닮고 싶은 소망을 갖는다. 그것이 어울림이다. 어울림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과 서로 어울릴 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평범할지라도, 산에서 만난 부부처럼 다툰다 할지라도 일단 산에 이야기를 기울이면 몸을 낮출 수 있다. 화자가 낙엽이 떨어지는 산 풍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산벚나무 낙엽이 상수리를 덮고 있는 광경을 주목하는 것도 뒷산이 듬직하게 인생을 받쳐주는 보호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김새록은 뒷산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삶을 풀어내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김수자 <텃밭 통신>
김수자의 텃밭은 계절적으로는 봄에서 가을로 옮겨진다. 세대를 기준으로 하면 엄마의 텃밭에서 엄마가 된 김수자의 텃밭과 “사랑이 충만한 텃밭”으로 이동한다. 그녀는 텃밭에 갖가지 채소를 가꾸며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의 근황을 며느리와 아들에게 “텃밭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텃밭은 단순히 채소를 가꾸어 먹는 채마밭이 아니라 어떻게 살고 있으며 동네사람들과 어떤 사귐을 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생활공간에 가깝다. 이렇게 텃밭 소식은 편지 통신문으로 확장할 수 있다.
김수자가 말하고 있는 텃밭은 계절에 따라 매번 “볼거리를 풍성히 지닌다.” 봄에는 이슬, 여름에는 꽃을, 가을에는 열매를 수확하는 기쁨을 전해 준다. 그 텃밭을 지켜보면서 그녀는 “이제야 사람으로서 철이 드는 걸까?”라는 생각을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고추처럼 매달린 어린 자식들”을 건사했던 엄마의 노동을 알지 못했다가 자식을 결혼시키고 엄마가 감내해왔던 텃밭노동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텃밭이 일상을 바탕으로 하면서 휴식과 치유, 소통과 사색을 발전시키는 공간으로 확장하고 있다.
김수자의 텃밭에 등장하는 대표인물이 이장이다. 마을 주민을 대표하는 이장은 작가의 텃밭갈이를 도와줄 뿐 아니라 농사짓는 지혜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집의 농사는 잘되었지만 이장의 고추농사는 망쳐버렸다. 도시와 달리 시골에서 주목할 점은 촌부의 농사를 칭찬해주는 말 외에 시기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장의 격려를 받고 돼지거름으로 지은 고추농사가 잘된 결실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촌부로 인정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텃밭통신>으로 자식들에게 보낸다.
해님과 달빛. 이슬과 비바람 거들어서 그들이 나에게 무상의 동업자이다. 호박꽃과 박꽃이 피는 시기만 알아도 촌부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으니 웬만한 시골정서는 갖추었다고 할까.
이장 외에 그녀의 조력자로서 해와 달과 비와 바람이 등장한다. 농사에 필요한 이러한 자연은 화자가 촌부의 본격적인 자격을 얻었음을 알려주는 역할 외에 시골정서를 함양시켜준다. 촌부란 누구인가 무엇보다 자연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포용을 갖춘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가.
공간 확장이 이어지면서 텃밭이 오일 장터로 뻗어간다. 오일장터는 물건과 사람구경이라는 일상의 재미가 널린 곳으로 갖가지 가게에서는 정겨운 흥정이 오가고 공터에는 시골참새가 날아오고 양지쪽에서는 손금을 봐 주는 할아버지의 능청스러운 여유마저 보여준다. 시골 오일장은 자연함의 삶을 낱낱이 보여주는 공간이다. 일터였던 텃밭이 인심이 넘치는 오일장터가 되었다가 다시 이열치열의 피서지로 내연화되고 확장되면서 수필시학이 요구하는 공간미학에 다다른다.
텃밭은 대화의 끈을 이어주는 공간이다. 새 식구가 된 며느리와 사위 또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트기에 적합한 장소다. 할 말이 없다고 무심히 지낼 수도 없는 것이 새 식구들이다. 우리가 남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을 때, 대화가 필요할 때, 문득 밭으로 간다.
처음에 화자는 모종 수확의 기쁨을 얻기 위해 텃밭에 갔다. 지금은 새 식구에게 전해줄 이야기 감을 찾아 텃밭으로 간다. 텃밭이 대화와 소통과 사색의 공간이 되면서 소통이라는 의미소를 얻고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꽃과 열매도 나름의 이야기를 갖는다. 그녀는 채소를 수확하는 텃밭이 아니라 가족과의 끈끈한 사랑을 재확인하는 이야기 텃밭을 가꾸는 셈이다.
김수자의 수필은 텃밭이라는 노동과 통신이라는 어절로 이루어진다. 텃밭이 농부가 농사일을 수행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육체와 땅이 만나는 곳이라면, 통신은 사람들과 자연이 공유하는 정신적 정서적 공간과 다름이 없다. 전자는 대지라는 평면성을 지닌다면, 후자는 4차원의 시간적 의미를 갖는다. 지금은 채소 꽃들을 바라보면서 카톡으로 텃밭의 소식을 새 가족에게 전송한다. 카톡에 실린 텃밭 사진을 받은 새 가족들이 찾아오겠다는 연락을 보낸다. 이것을 그는 ‘낚시는 성공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성공은 첫째는 가족의 관심을 끌어들인 낚시이며 두 번째 낚시는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텃밭은 심리적 수필을 생산하는 장소로 확장되었다.
작가는 수필을 쓰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시간과 공간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대상에 대한 마주보기이면서 바라보기이다. 앞서 소개한 작품의 작가들은 하나의 공간을 설정하고 끊임없는 사유와 성찰로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내재적 확장을 통하여 원래 장소가 갖고 있던 의미에 작가 고유의 의미를 접목시켜 의미소를 공간에 부여해준다. 장소가 바뀌면 의미가 달라지고 소재에 대한 해석력이 바뀌면 현재의 행동을 새롭게 풀이할 수 있다. 찻집이 연기자의 무대로 바뀌고, 뒷산이 회상의 공간이 되고 텃밭이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는 통신문으로 변용될 수 있는 것은 문학적 생명을 얻기 위한 탈바꿈을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세상을 마주 보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을 비틀어보고 바꾸어보고 뒤집어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문제작이 되는가 아닌가의 분기점이라고 하겠다.
박양근 --------------------------------------------------
부경대 영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수필가, 칼럼니스트, 영남수필학회장. 수필집: ≪길을 줍다≫, ≪서 있는 자≫, ≪문자도≫ 등. 저서: ≪사이버리즘과 수필미학≫, ≪좋은 수필 창작론≫, ≪미국수필 200년≫ 등. 수상: 신곡문학대상, 구름카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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