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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가을호, 고전산문산책 ①] 세상살이의 법칙 - 유현숙

신아미디어 2014. 6. 22. 20:17

"여기서 ‘고전산문감상’이라 할 때의 ‘고전산문’은 한문으로 된 산문만을 편의상 지칭하기로 한다. 중국의 경우 산문의 역사도 길거니와 서정적이거나 서사적인 문학성과는 거리가 먼 실용적인 산문도 그 양이 방대하다. 우리나라도 조선초에 국책사업으로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50여 종의 산문문체가 망라되어 있다. <동문선>은 성종9년(1478)에 서거정徐居正을 중심으로 신라초부터 조선초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인데 그 중에 몇몇 산문체는 오늘날의 수필의 성격에 부합하고 한편으론 수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무엇보다 수필의 자기성찰적인 성격,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글쓴이의 태도들이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한편 그 제재의 광범위함과 기발함 또한 신선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중국작가든 우리나라 작가든 한문으로 된 산문 중에 몇몇 문체와 작가들을 가려 뽑고 그 글들에 나타난 옛 사람의 인생에 대한 태도들을 약 4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세상살이의 법칙        /  유현숙

 

   여기서 ‘고전산문감상’이라 할 때의 ‘고전산문’은 한문으로 된 산문만을 편의상 지칭하기로 한다. 중국의 경우 산문의 역사도 길거니와 서정적이거나 서사적인 문학성과는 거리가 먼 실용적인 산문도 그 양이 방대하다. 우리나라도 조선초에 국책사업으로 편찬한 <동문선東文選>에 50여 종의 산문문체가 망라되어 있다. <동문선>은 성종9년(1478)에 서거정徐居正을 중심으로 신라초부터 조선초기까지의 시문을 모은 것인데 그 중에 몇몇 산문체는 오늘날의 수필의 성격에 부합하고 한편으론 수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무엇보다 수필의 자기성찰적인 성격,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글쓴이의 태도들이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고 무릎을 치게 하는 한편 그 제재의 광범위함과 기발함 또한 신선한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중국작가든 우리나라 작가든 한문으로 된 산문 중에 몇몇 문체와 작가들을 가려 뽑고 그 글들에 나타난 옛 사람의 인생에 대한 태도들을 약 4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유비자가 무시옹에게 말하기를
   “요즈음 무리지어 사람됨을 논평하는 자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옹을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옹을 사람이라 하지 않으니, 옹은 어찌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이라 여겨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람이라 여겨지지 않는 것인가?”
   옹이 듣고서 해명하여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 여겨도 나 기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더라도 나 두렵지 않다. 사람 같은 사람은 나를 사람이라 여기고, 사람같지 않은 사람은 나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음만 못하다. 나 또한 알지 못하겠노라. 나를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나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사람 같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여기면 기뻐할 만하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으면 또한 기뻐할 만하다. 또한 사람 같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으면 두려워할 만하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여기면 또한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기뻐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마땅히 나를 사람이라 하거나 나를 사람이라 하지 않는 사람이, 사람 같은지 사람 같지 않은지의 여하를 살필 따름이라. 그러므로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오직 어진 자라야 능히 남을 사랑하며 능히 남을 미워할 수 있다.’ 고 했으니, 그 나를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이 어진 사람인가, 나를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진 사람인가?”
   유비자가 웃으며 물러나거늘 무시옹이 인하여 잠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다. 잠에 말하기를
   “자도의 아름다움을 누가 아름답다 여기지 않으며, 역아의 조리를 누가 맛있다 하지 않으리오만, 호오가 분연하니 어찌 자신에게서 구하지 않으리오.”

                                                    <애오잠 병서愛惡箴 幷序>

 

   고려 때의 문인 이달충李達衷의 <좋아하고 싫어함에 관한 경계의 글 - 서를 곁들여> 라는 글이다. 여기서 ‘애오’라 했지만 실은 비난이나 칭찬 같은 평판에 대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비난이나 칭찬 같은 남의 평가에 초연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글에 등장하는 유비자有非子는 ‘아님이 있는 사람’ 즉 ‘아니다’, 무시옹無是翁은 ‘있음이 없는 늙은이’ 즉 ‘없다’ 라는 뜻이다. 당연히 이름만으로도 사람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논의의 대상이 된다. ‘사람 같은 사람’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기에 절묘한 명명법이다.
   ‘자도子都’는 춘추시대 정나라의 미남자의 대명사요, ‘역아’는 제나라의 유명한 조리사로 음식 솜씨로 환공의 신하가 된 인물이다. 맹자는 “자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눈이 없는 자”라 했고 “역아가 간을 맞춘 음식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맛있다 여겼다(孟子, 告子 章句 上)” 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 같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거나 칭찬할 때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굴원이 쫓겨나 강호에서 머물며 못가에서 읊조리며 다니는데 안색은 초췌하고 모습은 수척해 보였다. 어부가 보고 묻기를
   “그대는 삼려대부가 아니신지요?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셨습니까?”
   굴원이 대답하기를
   “온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모든 사람이 다 취해있는데 나만 깨어 있으니 이런 까닭에 쫓겨나게 되었소.”
   어부가 말하길
   “성인은 세상 사물에 매이지 아니하고 세상을 따라 변해갈 수 있어야 하나니 세상사람이 모두 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며, 세상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왜 술지게미나 박주라도 마시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만 처신해서 스스로 쫓겨남을 당하시나요.”
   굴원이 말하길
   “내 듣건대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 하였거늘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오. 차라리 상강에 가서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뱃전을 두드려 노래 부르며 떠나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면 되는 것을!”
   그렇게 떠나가서는 다시는 더불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부사漁父詞>

 

   초나라의 왕족이었던 굴원의 작품이라고 <초사楚辭>에 명기되어 있으나 후대인이 그를 애모하여 지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 어부와 굴원 두 등장인물도 결국 굴원 자신의 두 인격의 표현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인생의 복병을 만났을 때 ‘세상의 추이와 함께하라(여세추이與世推移).’는 자신의 인생관에도 불구하고 굴원은 참소를 당해 두 번이나 쫓겨나게 되자 그 분함을 참지 못하고 멱라에 몸을 던져 스스로를 ‘강고기의 뱃속에 장사’ 지내고 말았다.

   장인인 교가 좋은 오동나무를 얻게 되어 깎아서 가야금을 만들었는데 현을 얹어 타 보니 일세가 숭상할 만했다. 스스로 천하의 아름다운 물건이라 여겨 전례악관인 태상에게 헌상코자 하였다. 태상이 국내 최고 장인에게 감정을 의뢰하니 그가 살펴보고는 ‘골동품이 아니니 물리라.’ 는 것이다.
   장인 교가 돌아와서는 칠쟁이와 도모하여 문양을 새기고 전각을 하고 낙관까지 새겨서 상자에 넣어 파묻었다가 일 년 만에 꺼내서 안고 시장엘 가니, 귀인이 지나다 보고서 백금을 주고 사서는 조정에 바쳤다. 악관들이 돌려 보고서는 ‘희대의 진귀한 보물이라.’ 하는 것이다.
   장인 교가 그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슬프다. 세상이여! 이것이 어찌 가야금 한 가지만의 문제이겠는가. 세상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리니 일직 도모하지 않으면 함께 망하리라.”하고 드디어 저자를 떠나 깊은 산속에 들어 언제 생을 마쳤는지도 알지 못했다.

   촉나라에 시장에서 약종상을 하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 한사람은 양질의 약재만을 취급하였다. 본전을 계산하여 적당한 가격에 팔았으니 본전 깎아먹는 장사도 하지 않았고 또한 과도한 이문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또 한 사람은 상등품과 하등품을 같이 취급하였는데 그 값의 고하는 오직 구매자의 원하는 바에 따라 상품 하품으로 대응하였다. 또 한사람은 하등품만을 취급하였는데 싼 값에 많이 주고 덤을 청하면 흔쾌히 덤도 얹어 주며 따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투어 줄을 서게 되어 그 집 문지방을 한 달에 한 번씩 바꾸어야 할 형편이었다. 일 년여 만에 큰 부자가 되었다.
   상등품 하등품을 같이 취급하던 자는 그 보다는 좀 더디어서 2년여 만에 또한 부자가 되었는데 오직 양질의 상등품만을 취급하던 자는 한 낮에도 점방이 밤중 같고 아침밥을 먹으면 저녁거리가 부족하였다.


   욱리자가 보고 탄식하기를 요즘의 선비된 자 또한 이와 같다 하였다.
   옛날 초지방의 세 고을 세 원님 중에 한 사람은 청렴결백하여 상관의 눈에 들지 못했다. 떠날 때 배를 세낼 형편도 못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으며 어리석다 여겼다. 또 한 사람은 사람을 가려서 뇌물을 취하니 사람들이 그 취함을 허물하지 않았고 오히려 현명하다 칭찬을 하였고, 그 나머지 한 사람은 뇌물을 취하지 않음이 없어 상관의 눈에 들었는데 부하들을 자식처럼 대하고 부자들은 손님처럼 대하니 3년이 못되어 감찰직으로 천거되었다. 백성들이 그 선정을 칭송하니 또한 괴이한 일이 아닌가?

                                                     <욱리자이칙郁離子二則>

 

   명초의 정사가요 학자였던 유기劉基의 글이다. <욱리자>는 그 자신 벼슬에 뜻을 두었으나 얻지 못하자 포기하고 청전산중에 칩거하며 지은 저서명이자 백온伯溫에 이은 그 자신의 또 다른 호이다. <논어 팔일 論語 八佾>편에 나오는 ‘욱욱호문재郁郁乎文哉’에서 그 뜻을 땄다고 했다. 주나라 건국초에 무왕이 임금 자리에 있고 그 숙부 주공이 무왕을 도와 하나라와 은나라 2대의 예제를 살펴 주대의 문물과 제도를 융성케 하였기에 공자는 그 주의 예제를 좇겠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칩거가 아니라 반드시 문물제도가 성한 다스림을 이루리라는 정치가다운  포부를 이 책을 쓰면서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욱리자의 세상살이의 법칙 두 가지’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곧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인가? 장인 교처럼 탈세속하거나 사람 생명에 관여하는 일이니만큼 아침 먹고 나면 저녁 땟거리가 없어도, 좋은 약재만을 취급해야 한다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벼루와 붓과 먹은 기운이 같은 동류이다. 출처가 서로 비슷하고 쓰임과 사랑받고 대우 받음이 서로 비슷하다. 다만 장수하거나 단명하는 것이 서로 다른데 붓의 수명은 날수로 헤아리고 먹의 수명은 달수로 헤아리고 벼루의 수명은 몇 대냐로 헤아린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 생김으로 보면 붓은 가장 날카롭고 먹이 그 다음이며 벼루는 둔하게 생겼다. 어찌 둔하게 생긴 것이 수명이 길고 날카롭게 생긴 것이 수명이 짧지 않겠는가? 또 그 쓰임을 보면 붓이 가장 많이 움직이고 먹이 그 다음이며 벼루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 어찌 고요한 것이 장수하고 움직이는 것이 단명하지 않겠는가? 내 이에 양생의 법을 터득하였다. 둔한 것으로써 몸을 삼고 고요한 것으로서 쓰임을 삼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장수하고 단명한 것은 운명에 달린 것이지, 몸이 둔하고 날카롭거나 움직이고 고요한 것에 제어되는 것은 아니다.” 고 한다. 가령 붓이 날카롭게 생기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벼루처럼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비록 그렇더라도 차라리 벼루처럼 둔하고 고요해야지 저 붓처럼 날카롭고 많이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벼루에 명을 새긴다.
   “날카로울 수 없음이라. 그래서 둔함으로 몸을 삼고, 움직이지 못함이라. 그래서 고요함으로 쓰임을 삼으리라. 이렇게 하여 수명을 길게 하리라.”

                                                  <가장고연명家藏古硯銘>

 

   송대의 문인이었던 당경唐庚의 ‘집에 소장하고 있는 오래된 벼루에 새기다’라는 글이다. 명銘이란 금석이나 그릇에 새겨 그 사람의 공덕을 찬미하거나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하는 한문문체이다. 유명한 은나라 탕임금의 세숫물 그릇에 새겼다는 탕지반명湯之盤銘, “진실로 하루가 새롭거들랑 하루하루를 새롭게 하고 또 하루를 새롭게 하라.苟日新日日新又日新”가 그 좋은 예이다. 세수나 목욕을 하고 나서 느끼는 그 새로움을 자계로 삼고자 한 것인데 ‘오늘의 몸가짐은 어제보다 새롭고 내일의 몸가짐은 오늘보다 새롭게 수양에 마음을 써야 하리라’는 내용이다.
   수필은 제재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 즉 인생관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늘 대하는 문방사우에서 세상살이 즉 처세의 방법이나 양생법을 터득한 것인데 모나지 않게 너무 나대지 않음으로써 제 명대로 사는 양생법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특히 벼루에 새긴 명에 말한 대로 그 자신 날카로울 수 없고 동적이지 못하다는 자각이야말로 옛사람들의 처신의 기본이 된다. 적어도 남 탓은 안하는 인품은 여기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득실이나 인생에서의 행불행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태도는 유가적 덕목이기도 한 만큼 옛 문인들의 글에서는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독학이라 고루하니 도를 들은 것이 자연 늦었다. 불행은 모두 자신에게서 말미암는 것이거늘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리오. 백성에게 덕을 보인 것이 무엇이었기에 네 번이나 대신이 되었던고?  요행으로 그리 된 것이라 모든 비난을 불러들인 게다. 못난 내 얼굴 그려두어 무엇하랴만 나의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니 한 번 쳐다보고 세 번 생각하여 그러한 불행이 있을까 경계하며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노력하여라. 그런 요행을 바라지 않아야 행여 불행을 면하게 되리라.

                                                <익재진 자찬 益齋眞 自讚>

 

   15세에 등과한 후 여섯 왕을 섬기는 동안 네 번이나 재상에 오른 고려의 문신 익재 이제현李齊賢이 자신의 초상화에 직접 찬을 남긴 것이다.
   그는 28세에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을 중심으로 그곳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문학적 역량을 키우는 한편 외교적 직무에도 충실했다. 충숙왕 사후에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인 충혜왕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는데 원나라로 가서 왕을 변호하여 문제 해결을 하고 귀국했지만 오히려 참소를 당하여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윗글에서 말한 불행이 그것인데 유교적 충의관념에 철저하여 문장으로 보국하려 했던 대정치가의 일대 허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이 명문으로 치켜지는 것은 자신의 입신을 요행이었다 하고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데에 있다. 자신에 대한 또는 자신의 분수에 대한 명징한 인식에서 처세의 태도도 결정되는 것이니 초상화로 인해 연결되는 후대들에게 드리우는 세상살이의 지혜가 “한 번 볼 때마다 세 번 생각하라.”는 조용한 언사에 가만히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한 편의 명 수필을 더 들 수 있다.

 

   거사에게 거울이 하나 있는데 먼지가 부연 것이 꼭 구름에 가리운 달 같았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고 얼굴을 가다듬는 것 같이 하니 손님이 보고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는 것이요, 아니면 군자가 그것을 보고 그 맑음을 취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그대의 거울은 흐릿하기가 안개 낀 듯하다 형체를 비춰 볼 수도 없고 맑음을 취할 수도 없는데 그대는 매양 비춰보고 있으니 무슨 까닭이 있습니까?”
   거사가 말하기를
   “거울이 맑으면 잘생긴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못생긴 사람은 싫어하겠지요. 그런데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으니 만일 한 번 보면 깨뜨려 부수고 말 것입니다. 먼지로 부옇게 흐려진 것만 못하지요. 먼지로 흐려진 것은 그 겉이 부식되었을 뿐 그 맑음은 잃지 않은 것이니 잘생긴 사람을 만난 후에 갈고 닦여도 늦지 않을 겁니다. 아! 옛적에 거울을 보던 사람은 그 맑음을 취했으나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흐릿함을 취하는 것인데 그대는 무엇이 괴이한가요?”
   하니 손님이 대답할 말이 없더라.

<경설鏡設>

 

   고려의 최씨 정권으로부터 시문을 인정받아 두터운 신임을 얻어 출세가도를 달렸던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의 <거울에 대하여> 라는 글이다.
   남들 하는 대로 구리거울을 반짝반짝 닦아서 쓰지 아니하고 흐릿하여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도 보는 시늉만 내는 괴벽을 말하고자 하는 글은 아니다. 사물을 비추어 주거나 맑음을 취하라는 거울의 속성을 들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딴 데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모자람은 모르고 상대를 탓하기 쉬운 인간성에 대한 경계요, 또 하나는 사물이 지나치게 맑은 데서 오는 파괴적 성향에 대한 경계이다. 뛰어나게 맑다는 것은 여럿 중에 뛰어난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해코지 당할 수 있으니 때가 되기 전에는 오리무중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신책이 되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이규보는 약관 20대에 천마산에 은거하여 백운거사라 자호하고 민족서사시인 <동명왕편> 등의 저술에 몰두했다. 자칫 현실도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거울의 맑음을 드러낼 잘난 사람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벌목꾼이 그 곁에 멈추었으나 베지는 않으므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쓰잘 데가 없습니다.”라는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재목감이 못되어서 천수를 다하는구나.” 했다.
   장자가 산을 내려와 옛 친구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반기면서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명하여 거위를 잡게 했다. 아이가 묻기를 “한 놈은 잘 울고 또 한 놈은 잘 울지 못하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고 물었다. 주인은 “잘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 고 했다.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어제 산중의 나무는 재목감이 못되어 천수를 누리고 오늘 주인집의 거위는 재목감이 못되어 죽으니 선생은 장차 어느 쪽에 처하겠습니까?” 장자가 웃으며 말하길 “나는 재목감인 것과 재목감이 못되는 그 사이에 머물겠노라. 재목감과 재목감이 못되는 그 사이라는 것은 도와 비슷하지만 기실 도는 아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는 없다. 만약 도덕에 의거 부유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예도 비방도 없고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듯 할 것이요, 때와 더불어 변화하여 한 군데에 오로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한 번은 오르고 한 번은 내리며 만물과 화합함으로 자기 도량을 삼게 된다.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게 되면 사물을 부리더라도 사물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화를 입겠는가. 이것이 신농 황제의 법칙인 것이나, 대저 만물의 정이나 인륜의 전해 옴은 그렇지 못하여, 모이면 흩어지고 이루어지면 부서지고 날카로우면 깎이고 존귀하면 비방을 받고 해 놓은 게 있으면 찌그러지고 현명하면 모함을 받으며 어리석으면 기만당하니 어찌 화를 면할 수 있으랴. 슬프다. 제자들은  오직 도덕의 본향에다 뜻을 두어야 하리라.”  

<장자 산목 莊子 山木편에서>

 

   20대에 이 글을 읽었을 때 ‘잘난 것과 못난 것 그 사이, 재여부재지간材與不材之間’의 장자가 원망스럽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그 때 조교시절, 학과장실에는 모처에서 나온 분들이 불시로 차 한잔을 요구하면서 학과생들에 대한 소재파악을 능수능란하게 해치우고, ‘예, 아니오.’도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손님이 나가고 나면 그날로 그 사람이 거론한 학생들에게 나는 어용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최류탄에 얼굴이 찢기고 불신에 마음이 찢기던 시절 나는 <장자>에 기대 살았다.
   장자는 인간을 비굴하기도 오만하기도 어리석기도 한, 한마디로 모멸스러운 존재라고 파악하는구나 하고 느껴질 때 나의 청춘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그가 파악한 인간관계의 고단함에 대한 해법, ‘저절로 그러함〔自然〕’에의 회귀는 당시의 내게는 비겁하고 노회한 늙은이의 잔소리로만 느껴졌다. 모든 것이 푸르게 창창한 욕망들로 가득한 20대였으니까. ‘유위有爲’로 스펙을 쌓아가야 하는 시간들이었으니까.
   한 갑자甲子가 되돌아오는 오늘 다시 이 글을 읽으면서, 그가 말한 ‘도덕의 본향’ 즉 ‘저절로 그러함’이야말로 구원이라고 믿는다.
   이 글은 후대인의 위작, 즉 장자 자신의 말은 아니라고 의심되는 〈장자〉 ‘산목’ 편의 한 장이지만 장자의 사유방식에 기대어 ‘어떻게 살 것인가’를 풀어 놓은 옛사람의 생각임에는 틀림없다. 

 

   지금까지 잠箴, 서序, 사辭, 명銘, 찬讚, 설設 같은 한문체의 산문들 중에서 처세나 보신에 대한 고민을 다룬 몇 작품을 감상해 보았다. 
   ‘잠’은 ‘침針’이라 했는데 말할 것도 없이 침을 놓거나 옷을 꿰매는 도구가 침이므로 병통을 고치고 결점을 꿰매는 의미로 사용했다. 주로 교훈적이고 경계하는 내용에 붙인다. ‘명’도 기물이 주조된 배경과 그 사건과 그에 따른 공적을 기록하는 의미도 있지만 역시 교훈적이고 경계하는 내용을 담는 문체이다. ‘서’라는 문체는 원래 저술에 대한 경위, 평 같은 것을 그 책의 앞뒤에 붙이는 것인데 송대 이후에는 끝에 붙이는 것은 ‘발跋’이라 불렀다. 한문의 한 장르로서 대개 글쓴이의 문학적 역량이 잘 드러나는 것으로 그만큼 정성을 기울여 쓴다고 볼 수 있다. ‘사’는 ‘부賦’와 마찬가지로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이지만 여기서는 산문으로 다루었다. ‘찬’은 ‘송頌’과 같이 공적을 기리는 내용에 쓰는 문체로 ‘잠, 명, 송, 찬’은 대개 운문으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번역문임을 고려하여 시부詩賦를 제외한 글들은 산문으로 다루었다. ‘설’은 가벼운 ‘논論’이므로 시비를 가려 사람들을 설득하려고도 하지만 ‘논’보다는 설명적이고 주관적이다. 오늘날의 수필에 가장 가까운 장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문장의 종류 자체가 일정부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미 담고 있는 것이 한문 산문의 특징이다.

 

 

유현숙  ----------------------------------------

   경남 통영출생,  문학박사(동국대) ,  논문 〈이서구의 시세계李書九의 詩世界〉〈고죽 최경창론孤竹 崔慶昌論〉〈옥봉 백광훈론玉峯 白光勳論〉〈손곡 이달의 시연구蓀谷 李達의 詩硏究〉 등 다수,  현재 호주 시드니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