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라는 주제 해석은 성공했다. 나는 시청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대, 외로울 때면 고향을 돌아보라. 그것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많은 시청자들을 울린 프로였다."
그대 고향을 돌아보라 / 장기오
나는 오래 동안 TV문학관을 제작해왔고 소설의 드라마화에 남다른 애정을 가져왔다. 나는 남들이 어려워 머뭇거린 소재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이문열의 〈금시조〉에 도전했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소설’의 드라마화가 대중에게 먹힐까를 걱정했고 대중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표시했다. 아마 드라마 역사상 그렇게 철학적인 드라마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나는 그 작품이 내포한 ‘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같은 높은 가치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 결과 그 드라마는 120여 개국 해외공관에 한국의 홍보드라마로 배포되었고, 그 해 방영된 드라마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88년도 창사특집 드라마 <사로잡힌 영혼>은 오원吾園 장승업의 이야기다. 그림을 그리라는 왕명을 거역하고 세 번이나 궁궐을 빠져나와 술을 마신 그 ‘자유정신’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싶었다.
내가 드라마 국장을 그만두고 다시 드라마연출로 나설 때였다. 일반적으로 간부를 하다 현업으로 돌아서기가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것은 간부를 하면서 부하직원들에게 작품 못 만든다고 비난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부서로 쫓아 보내기도 했기 때문에 온 직원들이 너는 얼마나 잘 만드는지 보자면서 지켜보는 소이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 없이 현업으로 복귀했다. 그 때 고른 작품이 이균영 원작의 〈길은 그리움을 부른다.〉이다.
이 작품은 열차기관사의 이야기다. 청량리에서 문막까지 열차를 끌고 가는 동안 벌어지는 인간 파노라마다.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열차를 어떻게 동원할 것이며 촬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조금만 제작을 해 본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제작여건 상 그런 거대 프로젝트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도청에서 수송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곤란하다는 연락이 왔다. 직접 청장을 찾아갔다. 나는 드라마든 영화든 철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없었다면서 이 기회에 철도기관사의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기회라며 설득을 했다. 기어이 승낙을 받아냈다.
그 다음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찍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경全景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헬리콥터가 필요했다. 그것도 방송국 헬기라야 한다. 그래야 직부감直俯瞰이 나온다. 방송국 헬기는 뉴스 이외는 거의 동원되지 않는다. 나는 안드레이 콘잘로프스키(Andrei Konchalovsky) 감독의 <폭주기관차(Runaway)>라는 비디오를 들고 헬기기장을 찾아갔다. 이 영화는 탈주범들이 기차를 타고 도망가고 형무소장이 헬기를 타고 뒤쫓는 스릴 넘치는 영화다. 나는 기장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방송국 헬기는 카메라가 고정으로 부착되어있어 좋은 영상을 잡는 것은 기장의 소관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가 조종사가 아니라 아티스트라는 점을 강조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무슨 의도로 자기에게 그런 비디오를 보여주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말하고 협조를 부탁했다. 생각해보자고 했다. 나는 이미 승낙이 된 걸로 생각하고 철도청과 다시 일정을 조정했다. 반드시 정한 날짜와 정한 시간에 찍어야 했다. 노선 열차의 시간조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을 드라마화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제가 무엇이냐’이다. 원작의 주제를 놓쳐 전쟁드라마를 반공드라마로 만든다든지 하는 우를 범해서는 구태여 그 원작을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 그 주제를 녹여줄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들은 그 두 가지를 다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으로 고려하는 것이 ‘여백’이다. 이 여백이 드라마로서의 가능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영상이 나올 것인가’이다.
나는 이 소설의 주제를 ‘고향’으로 파악했다. 고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강한 소구력이 가진 소재다. 사람들은 지치고 힘들 때면 고향을 찾고 거기서 위안을 받는다. 주인공은 말한다. ‘철로는 늘 앞으로 나가지만 항상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는 늘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관사로 만족하고 살고 싶지만 그의 고향친구이며 애인인 옥순은 끊임없이 떠나길 원한다. 그녀는 그런다. “석우야, 너는 나의 고향이야. 내가 어려울 때 너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어. 너는 나에게 고향 같은 존재야.” 그러면서 그녀는 출세를 위해 그들 사이에 난 아이까지 그에게 떠넘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두 번째 여자는 술집여자다. 그녀는 술집여자라는 열등감으로 그에게 한없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낸다. 그는 그녀가 ‘거리의 여자’였다는 이유로 그녀가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던 그녀의 고향을 결코 찾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병들어 죽자 그는 비로소 그녀에게서 고향을 본다. 그는 지금도 서울에서 고향까지 화물기차를 몰면서 두 번째 여자가 묻혀있는 등성이를 지날 때면 길게 기적을 울려 그녀에게 용서를 빈다.
옥순은 주인공에게, 주인공은 두 번째 여자인, 거리의 여자에게서 고향을 본다. 고향이라는 주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재미있는 이야기인가’이다. 이 작품은 고향이라는 주제를 두고 사랑이라는 실로 꿰뚫고 있다. 주인공은 옥순이라는 여자를 거의 일방적으로 사랑하지만 배신당하고, 두 번째 여자는 주인공을 눈물겹도록 사랑한다. 영혼의 상처로 인한 그녀의 헌신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원작의 부족한 부분을 이러한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로 여백을 보충해 나갔다. 이야기가 훨씬 풍부해졌다.
나는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영상’임을 결코 잊지 않는다. 한 편의 드라마에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가슴 서늘한 영상’ 한 두 컷은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다시 뜬다.”는 대사보다 더 강렬한 것은 넘어가는 석양을 배경을 선 주인공의 실루엣 장면처럼 말이다.
나는 남녀 주인공이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걸어오는 아주 평범한 데이트 장면을 찍다가 갑자기 중단했다. 이런 평범한 장면일수록 멋진 영상으로 감동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의도하는 영상은 그렇게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우선 앞뒤 막힘이 없는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야 줌 렌즈로 당겼을 때 태양이 앵글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적어도 거리가 300m 정도는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산이 안 보이고 거리가 300m이상 되는 편편한 곳은 많지 않다. 수소문 끝에 사북탄광의 연탄을 쌓아두는 곳이 그럴 수 있다는 추천 받았고 나는 스태프들을 끌고 석탄 더미의 험악한 길을 30분 이상을 석탄 운반차량을 빌려 타고 올라가 찍었다. (그림1)
청량리 철도 차고지에서는 30m 크레인에 올라가 촬영을 했다.(그림2) 기차 가는 장면을 찍기 위해 미리 좋은 장소를 헌팅해 약 10여대의 카메라를 가는 길목 곳곳에 배치해 찍었다. (그림3) 헬기는 종전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만들어 냈다. (그림4)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드라마 제작 역량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상들을 만들어 낸 드라마였다.”고. 멜로드라마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은 작품의 저변에 깔린 고향,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고향이 작품의 밑바닥에 애잔하게 깔려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나. 짐작이 된다.
고향이라는 주제 해석은 성공했다. 나는 시청자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대, 외로울 때면 고향을 돌아보라. 그것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많은 시청자들을 울린 프로였다.
한 신문은 이렇게 평했다.
“마디마디 탄탄하게 맺고 끊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연출의 솜씨엔 세월의 힘이 묻어있다. 노장의 관록은 비단 장인적 기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깊은 응시가 드라마를 관통한다. 묵은 추억의 사진을 들추듯 아쉬움과 그리움이 피어나지만, 인생을 돌아보는 깨달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드라마다.”
이 작품은 이후 대한항공 미주노선에서 6개월간 방송되었다.
장기오 ---------------------------------------
《현대수필》로 등단, KBS 大PD, 드라마제작국장 역임. TV문학관 <금시조>, <홍어> 등 47편의 드라마 연출, 수필집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외 전문서적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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