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한재영은 이제 시와 하나가 되었는가? 한재영이 시이고 시가 곧 한재영인가? 이러한 화두를 그는 나에게 소천하면서 던져준다."
시의 사제司祭 - 인간과 문학 / 유한근
1
한재영 시인은 나의 유일한 문학 도반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말대로 나의 병정(?)시절에 그를 만났다. 우리의 젊은 시절, 나는 문학 언저리에 늘 있었고, 그는 문학권 밖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 있던 그와의 문학적 교류는 지속해왔다. 직장에 잠깐 같이 있기도 했지만, 그와 나는 문학이야기, 미술이야기 그밖에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만나곤 했다.
문청 때 그는 밥벌이를 거부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죽으라고 책을 읽고, 죽으라고 시만 썼다. 밥벌이도 안 되는 문학만 했다. 그가 밥벌이를 시작한 것은 《월간문학》편집부에 달포동안 있을 때이다. 그러나 그는 두 달을 채우지도 못하고 떠났다. 같이 있다가 나가면서 그가 한 말은 내게 충격을 주었다. “문학의 총본산지로서 문학이 있어야 할 곳에 문학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나간다”는 말을 내뱉으며 나까지 끌고 가려했다. 문단이라는 곳 혹은 문학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할 곳에 문학이 없음을 경멸하고 그는 또 다시 칩거했다.
그는 1947년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월남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952년 한국전쟁 중 경북 칠곡 다부동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서울로 상경, 서울장충초등학교, 보성중고를 거쳐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를 졸업했다. 그가 외대에 다닐 때, 나는 군복을 입고 그를 만났다.
한재영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교1년(16세)이며, 대학시절 아랍어보다는 문학(시)에 대한 열정을 가져 신대철 시인을 통해 《문학과 지성》으로 추천되었으나, 5공 시절 《문학과 지성》의 폐간으로 작품 발표가 좌절되었다. 중동의 건축 붐을 타고 대기업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으나 열악한 잡지사, 문예지 편집기자 일을 하다가 편집기획회사인 ‘브릿지’로 독립하여 경영하였다.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7~8년간을 절필하다가 2005년 후반기부터 다시 시를 쓰기를 시작하여 시집 《반가사유》를 첫 시집으로 묶어냈다. 그런 후, 그는 시골을 내려가 자연농법으로 농작물을 재배하다가 지병을 얻어 지난 7월 7일 소천하였다. 그리고 유언대로 예천 그의 농장의 복숭아나무 밑에 수목장으로 영면했다. 조만간에 그리될 것이라는 짐작은 했으나 예기치 않은 빠른 그의 소식을 문자로 받고 나는 한동안 모든 것들을 중단시켰다. 모든 것들이 멈춰졌다. 그리고, “재영아! 잘 가라! 재영아! 잘 가라”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수구문재守口文齋에서 울었다. 고통뿐인 이 세상에 남겨진 친구로 그렇게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그의 부인인 큰 딸 지은이 엄마로부터 그의 셀룰러폰에 저장되어 있는 제목도 붙이지 못한 마지막 유작시를 마지막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 시가 〈무제〉1)이다.
흰 구름 떼 몰려가는
광활한 바다
그 명경한 푸른 얼굴 밟으며
장자가 오고 있다.
시린 발 적시며
긴 소매도 펄럭이면서,
무법의 끝
향리에 잠든 오랜 꿈을 깨고
-유작시 〈무제〉 전문
이 시에서 그는 장자로 돌아왔다. 광활한 바다 같은 하늘, 그 맑고 깨끗한 ‘푸른 얼굴’을 밟으며 장자로 돌아왔다. 장자가 되었다. 위의 시의 장자는 시인의 서정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그 장자는 시린 발로 긴 소매를 펄럭이며 “향리에 잠든 오랜 꿈을 깨고” 오고 있다. 위의 시에서의 ‘무법의 끝’은 절대 무위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재영 시인은 이 시에서 세상 근심의 근원인 자기의 육체·정신마저도 버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라 무엇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일탈하여 세계의 밖에서 초연하게 노니는 장자가 된 것이다. ‘진인眞人’이 된 것이다.
2
시는 자신의 내면 탐색에서 시작하여 사회로 확대된다. 그래서 보통 시인의 초기시는 내면의 욕망 탐색과 표출로 시작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욕망 탐색의 처음은 다분히 성적性的이다. 보들레르도 그랬고 미당도 그랬다. 그리고, 그 끝은 전통과 역사, 그리고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재영 시인이 시집 《반가사유》에서 보여준 것은 이들과 다르게 나타난다. 이미지로 시작해서 이미지로 끝내려한다. 다분히 김춘수적이고 김종삼적이다. 이에 따라 나는 우선 한재영 시 이해의 키워드를 이 ‘이미지’의 해명에서 찾으려 한다.
그는 시 〈자화상〉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이미지만 남았다//이미지만 남아서/나는 이미지가 되었다.//닿으면 서로 죽고/죽음도 이미지만 남는다.//헛되다고 생각하면서/그대를 바라본다.//얼마나 멀까 그 거리는/팔을 뻗으면 손 끝이 아려오는// 어느 산골, 작은 못에 비치는/ 이미지가 되었다”고. 이때부터 그는 죽음 예감하고 있고, 죽음의 선험을 통해서 자신을 이미지로 표상한 것일까? 이 시에서 ‘이미지’는 곧 시인의 다른 이름이며 본질이다. 문학에 있어서 ‘이미지(Imige)’는 ‘심상(心象, mental picture)’ 즉 ‘마음 속 그림’을 의미하며, 시의 구성 요소로서 현대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표현 구조의 하나다. 그러나 한재영 시인에게 있어서 ‘이미지’는 ‘존재’에 대한 특정한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닿으면 서로 죽”는 이미지, ‘헛’된 이미지, “팔을 뻗으면 손 끝이 아려오는” 이미지, “어느 산골, 작은 못에 비치는” 이미지와도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성급하게 그와 그의 시를 단정한다면, 그는 허무의 시인이며, 고통의 시인. 청정의 시인, 연민의 시인이라고 화인火印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한편의 시로, 그의 시 세계와 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성급하게 단정하기에는 경솔하다. 그래서 〈걸레〉라는 시를 우선 탐색해본다.
온몸을 흠뻑 적셔 밀고 가는
온몸을 더럽히고 찢기우는
온몸을 독수에 빨며
끓는 물로 삶아내는
쥐어짜고 얻어맞아
그대, 이제 지치고 지쳐서
흐믈흐믈 다 해어졌구나
몸을 활짝 펴, 볕에 널어 말리며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넋 놓고 누워있나니
- 시 〈걸레〉 전문
이 시에서 시인은 ‘그대’를 걸레로 비유한다. ‘그대’는 특정인일 수도 있고 불특정 다수인일 수도 있으며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는 만큼 일단 ‘그대’는 시인 자신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시는 시인 한재영 자신의 모습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통한 타인 즉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슐라르는 《대지와 의지의 몽상》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몽상의 바닥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떠난 인간 존재는 마침내 사물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연으로 되돌아온 인간은 자신의 변형시키는 능력을 되찾게 되고 자신의 물질적 변형의 기능을 되찾게 된다. 다만 이것은 인간이 타인들과 멀리 떨어진 은퇴 상태 같은 고독에로가 아니라 작업의 힘 자체를 가지고 그 고독으로 찾아왔을 때의 경우이다”라고. 바슐라르의 이 말을 인정할 때 시인이 자신을 ‘걸레’로 비유한 것은 고독하기 때문일 것이다. 밀려가고 더럽히고 찢기우고 얻어맞아 지치고 지쳐 해어진 걸레로 비유한 것은 우주 인식을 통해 사물을 바라보게 된 것이며, 마침내 자신을 변형시킨 결과물로 ‘걸레’로 인식한 것이며, 그 인식은 타인과 격리된 변별적인 자아 속에서 사물로 보게 된 ‘절대 고독’ 그 공간 인식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저무는 하늘마다 들리는 파도소리
먼 바다의 은은한 숨결이 내 캄캄한 귀를 허문다
내 귀는 무너지고
그 숨결은 내 피 속에 녹아 내린다
나는 어두워가는 들을 이리저리 거닐며
먼 산 너머 스러지는 하늘 빛에 소스라친다
주위의 나무들은 하나 둘 어두운 산 밑으로 불려가고
이 어두운 시간 속에 흩어진 한 줌의 잿빛이 급히 사라질 때
앙상한 가지에서 메마르고 쭈글은 손 하나가
뚝 떨어져 어둠 속에 빠진다
- 시 〈어두운 시간〉 전문
위의 시에서 그의 ‘절대 고독’은 다시 확인된다. 죽음과도 같은 적요함 속에서 “앙상한 가지에서 메마르고 쭈글은 손 하나가/뚝 떨어져 어둠 속에 빠진다”라는 이미지로 표현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처절한 인식. 그것은 ‘절대 고독’ 속에서 가능해지는 인식이며 우주적인 인식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정신적 이미지’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절대적인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읽을 때, 어둠 속에서 우리의 몽상을 떠돌게 하고, 초자연적인 공간으로 우리를 끌고가 죽음과 만나게 하고, 그 섬뜩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우리를 행복하게 혹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시의 내공(?) 때문이다. ‘시의 내공’이라는 말이 거칠다면, 이렇게 말을 바꿔도 좋을 것이다. 우리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는 하나의 ‘영상’을 시인의 몽상의 힘에 의해서 끌어내주기 때문이며, 그것을 편하게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시에서 이러한 그의 힘은 쉽게 발견된다.
깊은 밤, 몰래 잠자리를 빠져나와
어둑한 마루 한 구석에
달빛이 샘솟아 나오는 손거울을 보았다.
손을 얹어보면 손을 환하게 물들이며
손가락 사이로 샘물처럼 흘러 넘치는 달빛.
나는 손거울 속으로 들어가
잠든 식구들이 차 던진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달빛 숨쉬는 그들의 숨결에 귀를 귀울였다.
불면 떠내려 갈 듯 달빛 속에 잠들어
물가에 매어놓은 나뭇배처럼
제 숨결에 흔들리며 잠들어 있다.
나는 그들이 내쉬는 숨을 들여마셔
다시 그들의 몸 속으로 불어넣었다.
우리가 한방에 누워
서로의 숨결을 빨며 잠들어 있을 때
나무들은 우리의 잠든 이마 위로
달그림자 드리우고
이파리마다 환하게 숨쉬고 있다.
그러나 밤 늦게 홀로 거울 밖을 나서면
나무들은 어둡고
식구들은 참 바람에 휩싸여 있다.
- 시 〈손거울〉 전문
이 시의 제목은 〈손거울〉이다. 손거울이라는 사물 속으로 시인은 빨려 들어가 그 곳에서 자신의 내면보다는 가족의 잠을 만나고, 그들의 숨결을 통해 가족과 동일화 되는 자신을 느끼며 ‘절대 고독’을 체감한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행복한 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험적인 죽음과 만나는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가에 매어놓은 나뭇배처럼”에서 ‘나뭇배’가 저승으로 떠나는 배로 느껴져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숨’ 때문이다. 역동적인 숨의 움직임 때문이다. 숨을 이미지로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미지를 정신적 이미지로 바꾸는 그의 힘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 고독’ 속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있어 밤과 꿈과 몽상의 차이는 현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차이이다. 밤의 꿈을 꾸는 사람은 자아를 잃어버린 어둠일 뿐이다. 그러나, 시인의 몽상은 다분히 철학적이다. 몽상적인 시인은 자신이 꿈꾸는 자아의 중심에서 바슐라르가 《몽상의 시학》에서 말한 바 있는 ‘코기토(cogito)’를 형성한다. 상상력의 원천적인 힘이 되는 ‘상상하는 의식’ 즉 코기토를 형성한다. 그래서 의식의 빛이 존속하는 정신 활동을 하게 되고, 현실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탈출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여행을 하게 된다. 그 여행은 유령과도 같은 시인의 ‘영혼’이다. 그 영혼을 우리는 시인 한재영의 시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소름이 돋는다.2)
이런 생각은 나만의 느낌일까? 앞서 말한 바, 그와 나는 문청시절 혹은 나의 장충동 시절부터 만났다. 그는 그 때도 시인이었고 지금도 시인이다. 그때도 그는 장충동에서 살았고 지금도 장충동에, 가족, 우리의 마음 속에 실존하고 있다. 이를 누구도 부정할 힘이 없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바슐라르를 떠올린 것도 그와의 만남이 30년 전의 바슐라르에 관한 우리들의 담론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때 그는 밤에만 시를 썼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시를 썼다. 취직이나 생계나 가정을 갖는다는 따위의 일상들은 접고 시를 목숨으로 생각하고 시만 썼다. 나는 그에게서 ‘시가 목숨이 될 수 있다’ ‘시가 곧 생명이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진솔하게, 처절하게, 죽을 힘을 다해 그는 시만을 생각했다. 그의 영혼을 저당 잡은 것도 시이고, 그의 몸을 담보한 것도 시였다. 그의 영혼과 몸은 몽상 그 자체였으며, 그 힘은 역동적인 이미지 그 자체였다.
시 〈노숙자〉에서 그는 ‘풀’과 ‘길’을 통해 삶의 카오스 혹은 자연의 혼돈을 말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는 인간의 자연으로의 귀의를 얘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제 스스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무명無明의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코 앞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재영 시인은 이 시 마지막 연에서 “스스로 제 앞을 묻고 있는/이 길은 또 어쩔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따라서 이 시는 단순한 이미지의 시라기 보다는 삶에 대한 혼돈이나 애매모호함을 실존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로, 삶의 끝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 공간을 가지고 있는 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시에서 ‘풀’은 자연의 표상물이며 존재 그 자체이나, ‘길’은 인위적인 삶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럴 때, 인위적인 삶, 혹은 인간의 삶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고 자연을 표상되는 ‘풀’에 묻히게 된다는 인간 존재에 관한 선험적 인식을 이 시는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 〈노숙자〉는 타자에 대한 연민과 실존을 명증하게 그려 놓고 있는 시이다. 자신으로 부터의 실존적 확대가 잘 드러난 시로 이해된다. 이 시에서 ‘별’은 사람들이 꾸는 꿈이고 이상이고 기쁨을 의미한다. 그리고 ‘창’은 편안한 집의 표상이지만 소통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모티프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저’와 ‘이불’은 인간 삶의 실존적인 물질이미지이다. 그러나 이 시의 의미 공간은 연민과 실존이다. 이렇게 시인 한재영이 쓰고 있는 시는 자신으로부터 인간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연민에서 실존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시 〈주일〉을 읽으면 그의 시에 있어서의 다른 국면을 알게 된다. 그의 새로운 시의 지평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도 시인 한재영의 섬뜩한 이미지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한편의 영상을 보는 것처럼 조용하고 서정적이다. 하지만, ‘피벽돌’ ‘겨울비’ ‘암붉은 벽’ ‘박쥐들’ ‘잿빛 새’ ‘비의 숲’ ‘좁은 문’ 그리고 ‘검은 사제’ 등의 시어들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영상과 그 의미 공간은 만만치 않다.
시인 한재영, 그는 ‘시의 사제’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예감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시의 지평을 종교적인 국면으로 확대해 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현실이 종교적인 새로운 경험을 가능케 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영적 가치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짐작 때문이기도 하다. 종교적인 체험이 그의 내적인 삶의 풍요로움, 그리고 이미지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스스로 넘쳐흐르는 것을 그가 즐길 수 있다면 몰라도, 그 속에 안주하여 구원 받기를 원할 때 그의 시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그가 ‘시의 사제’이기를 기대한다.
3
그는 시의 사제인가? 이제 비로소 그는 시의 사제가 되었는가? 사제司祭는 “가톨릭 등에서 일정 품급의 자격을 구비하고 성사聖事와 미사를 집행하는 성직자”를 의미한다. 모든 종교에서 신관神官 역할을 하는 특정의 직업인으로, 신과 소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진리와 생명의 증거를 보이는 사람이다. 시의 사제는 특정한 종교를 떠나 초월적인 존재와 소통하여 인간에게 삶의 본체와 그 생명을 보여주는 존재이다. 아래의 인용시 〈수련〉에서처럼 ‘수련’이라는 존재를 물과 물고기를 통해 그들의 유기적인 꿈을 보여준다.
물의 꿈 속을 노니는 물고기인듯
수련은 물의 꿈으로 핀다.
초여름
나른한 오후
물은 거울처럼 빛나
물 위에 물의 꿈이 펼쳐질 때
수련은 꿈 속에 피어
자신을 꿈꾸는 물을 꿈꾼다.
-유작시 〈수련〉 전문
이 시는 수련을 “물의 꿈 속을 노니는 물고기”로 은유한다. 그리고 수련 꽃이 피는 것을 꿈 속에서 피는 것으로 표현하고, 물이 거울처럼 빛나는 것을 시인은 꿈을 펼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마침내는 수련이 피는 것을 “자신을 꿈꾸는 물을 꿈꾼다”고 말한다. 물과 물고기와 수련과 초여름의 오후 등이 수련에 의해 하나가 됨을 이 시는 표현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 그 실체를 언어로 환치시켜 놓고 있는 시이다.
모든 존재의 그림자는 존재에 붙어있지만
날짐승의 그것은
존재의 비상으로 존재와 분리된다.
그것은 언제나 갑자기 바닥에 출현한다.
거침없이 대지의 표면을 가로지르며
그 어느 것에도 부딪치지 않고
사물을 핥고 굴곡을 어루만지며 묵묵히 전진한다.
비상의 높이만큼 거리를 유지하면서
존재의 속도를 정확히 따라가고
먹이의 머리 위를 맴돌며
불안해하는 두 눈을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크기를 재어보고
하강하는 지점에서
피묻은 자신의 존재와 다시 만난다.
-유작시 〈날 짐승의 그림자〉 전문
위의 시 <날 짐승의 그림자>에서 ‘날 짐승’은 단순한 조류라기보다는 모든 생명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존재’라고 하는 시어는 이 세상에 있는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시어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는데 관건이 되는 것은 ‘그림자’의 정체이다. 모든 존재에 붙어 있는 그림자. 그 그림자는 일반적으로 허상을 의미한다. 존재가 사라질 때 없어지는 허상이다. 이 시의 1연은 ‘날 짐승의 그림자’는 비상으로 인해 소멸됨을 말한다. 말 짐승이 날아다닐 때는 그림자가 없어지지만, 그것이 땅으로 내려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생겨나는 존재가 그림자이다. 그러나 그 그림자는 2연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어느 것에도 부딪치지 않고” “사물을 핥고 굴곡”을 이루기도 한다. 사물의 만남에서 거리를 유지하고 주인(?)인 존재와 속도를 같이한다. 그러기 위해서 불안해하고, “냄새를 맡고 크기를” 잰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처럼 “하강하는 지점에서/피 묻은 자신의 존재와 다시 만난다”. 여기에서 “피묻은 자신의 존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생명성일 수도 있고, “피묻은”이 의미하는 바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삶의 실체일 것이며, 생명성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인식을 깔려 있을 때, 그것은 무위자연적 사고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선지식에 의하면
그래 이것은 정말 꿈일지도 모르지
헛되고 또 헛되어 망상이라고도 하지
불가해한, 생각할수록 고통스런 꿈일지도 모르지
누군가 꾸는 꿈 속에
모든 얼굴을 지닌 한 얼굴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누군가의 꿈 속에서 태어나
그의 꿈이 되고
그 속에서 나의 꿈을 꾸었으니…
하지만, 나 또한 그를 꿈꾸나니
그의 꿈도 나의 꿈인 것을.
-유작시 <환등幻燈> 전문
위의 시 <환등幻燈>에서 환등幻燈의 사전적 의미는 “그림, 사진, 실물 따위에 강한 불빛을 비추어 그 반사광을 렌즈에 의하여 확대하여서 영사映射하는 조명 기구. 또는 그 불빛”을 의미한다. 이 시의 1연에서의 ‘선지식’은 장자를 비롯한 동서양의 모든 선각자를 의미할텐데, 이것을 ‘꿈’이라는 시어를 근거로 할 때 ‘장자’에 대입해도 마땅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장자의 ‘호접몽’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꿈 속에서 태어나/그의 꿈이 되고/그 속에서 나의 꿈을 꾸었으니…” 때문이다. 타인의 꿈에서 태어나 그의 꿈이 된다는 경지와 그 속에서 나의 꿈을 꾼다는 경지는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심일여 物心一如의 세계를 얼굴과 꿈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기 때문이다. 사물事物과 나,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을 선지식의 인식을 이 시는 모든 얼굴과 한 얼굴, 그의 꿈과 나의 꿈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시인 한재영은 이제 시와 하나가 되었는가? 한재영이 시이고 시가 곧 한재영인가? 이러한 화두를 그는 나에게 소천하면서 던져준다.
1) 시 <무제>는 장례식장에서 한 시인의 부인과 상의하여 붙인 제목입니다.
2) 한재영 시집《반가사유》발문 <이미지의 역동성, 그리고 연민을 통한 인간 이해> 에서 발체함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 문학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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