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행에서의 목성木星은 나무의 기운을 의미하며, 앞만 보고 뻗어나가는 성질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목기木氣는 봄, 푸른색, 동쪽에 해당된다. 나무는 물이 있어야 자라고, 뿌리로 흙을 괴롭히며, 자기 몸을 태워 불을 만든다. 이러한 나무의 성질과 문학 작품에서 차용되는 있는 표현구조는 다소 다를 수 있으나. 이를 전제로 해서 수필 작품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나무 물질상상력이 수필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탐색하려 한다."
‘나무’ 물질 상상력 - 유한근
서양 철학의 뿌리는 4원소론이다. 처음 주창한 사람은 엠페도클레스였으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도 물, 공기, 불, 흙을 우주 혹은 전체를 구성하는 물질로 생각했다. 이를 기반으로 바슐라르 물질 상상력을 그의 철학, 문학의 이론 바탕으로 삼았다. 이 네 물질이 인간의 상상력을 촉발시켜 준다는 그의 물질 상상력 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다. 이에 반해 동양에서는 오행론을 철학의 뿌리로 삼았다. 만물을 주관하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가 그것이다. 공기는 없는 것, 혹은 비어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흙[토土]에 목, 금을 포함시켜 5원소, 오행으로 세분화했다. 한편, 불교, 밀교에서의 인식논리는 육대六大에 기반을 둔다. 여기에서의 육대는 땅[지대地大], 물[수대水大], 불[화대火大], 바람[풍대風大], 공간[공대空大], 인식[인대認大]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논리인 초기 밀교의 육대법신사상으로 발전하여 후에는 육진六塵, 육관六官으로 변용된다.
이러한 동양의 인식논리를 바슐라르의 물질 상상적 이론의 전개방식 차용하여 동양의 오행론과 육대이론에서 물질 상상력으로 적용시킨다면, 우리의 물질상상력은 바슐라르의 그것보다 훨씬 깊어질 것이라는 착안을 나는 오랫동안 해왔다. 그러나 동양의 인식론에서 나무[木]를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로, 그리고 만물을 주관하는 물질로 생각한 것은 오행론이다.
오행에서의 목성木星은 나무의 기운을 의미하며, 앞만 보고 뻗어나가는 성질을 의미한다. 주역에서 목기木氣는 봄, 푸른색, 동쪽에 해당된다. 나무는 물이 있어야 자라고, 뿌리로 흙을 괴롭히며, 자기 몸을 태워 불을 만든다. 이러한 나무의 성질과 문학 작품에서 차용되는 있는 표현구조는 다소 다를 수 있으나. 이를 전제로 해서 수필 작품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나무 물질상상력이 수필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탐색하려 한다.
실낱같은 가지 끝까지 수분을 보내고 영양분을 만들어 잎을 키우는 나무는, 아기를 안고 젖 물린 어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나무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가지를 뻗고 잎을 피워 성장을 거듭한다. 햇볕이 뜨거운 여름이면 싱그러운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쉬게 하지만 그 녹음은 거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나무가 뜨겁게 살아내면서 만든 넉넉함이다. (……) 나무들의 질서는 정연하다. 저마다 뻗은 가지와 몸을 바로 세우고 일생을 살아간다. 아무리 무덥고, 메마르고, 강풍이 불어도 태어난 땅을 지킬 뿐 떠나지 않는 게 나무의 일생이다. 나무의 생명, 아니 식물의 생명력은 사람의 생명력보다 강하다.
-한석근의 <나무>에서
한석근의 짧은 수필 <나무>는 나무에 대한 작가의 인식 과정을 쓴 글이다. “군자처럼 정직”한 나무, “뜨겁게 살”면서 넉넉함을 만드는 나무, 인고하며 질서를 지키는 나무,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 수필은 생명력이 강한 나무에 대한 나름의 인식을 열거한 수필이다. 이러한 나무의 속성을 이해하고 인간도 자연에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말하고 있는 에세이다. 오행의 목성의 의미 중 앞만 보고 하늘로 뻗어 나가는 성질을 환기시켜주는 수필이다.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 됩니다 아버지. 그동안 당신은 자식들의 바람막이였고 든든한 기둥이셨습니다. 때론 회초리셨습니다. 지금도 당신은 주머니에 금돈 열 냥 대신 자식들에 대한 염려 열 냥을 넣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 주머니엔 당신에겐 아무 힘도 되지 못하는 걱정과 욕심들만 가득 들어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제가 당신의 든든한 지팡이가 될 수 있을까요? 회초리보다 더 큰 몽둥이로 아프게 패 주십시오. 아버지!
당신의 그 깊고 깊은 은혜를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아버지! 더 이상 허물어지시면 안 됩니다 제발! 아버지!
-권천학의 <지팡이 사던 날>에서
권천학의 <지팡이 사던 날>은 지팡이가 필요하게 된 아버지와의 외출에서 느낀 아버지와의 사연, 그 관련 에피소드를 진솔하게 토로한 수필이다. 은행나무 고목처럼 늘 자식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셨던 아버지. 든든한 기둥이었고 회초리였던 아버지의 늙음에 대한 회한과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의 지팡이가 될 수 있을까를 의혹하며 토로한다. 이 수필에서의 지팡이는 어쩜 아버지에게 있어 버팀목이 되는 나무에 대한 표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수필에서의 나무는 가족간의 버팀목이 되는 셈이다. 아버지가 은행나무 고목이라면, 자신의 아버지의 버팀목이 되고 싶다는 토로가 그것이다.
나에겐 어머니가 커다란 나무였다. 어머니는 우아한 꽃도, 청초한 난도 아니었다. 그저 쉴 수 있는 그늘이었고 기댈 수 있는 무던한 버팀목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가난이라는 눈바람이 휘날렸지만 우리 집안에 에워쌌을 냉기를 나는 모르고 지냈다. 나무 같은 어머니의 덕이었다. 홀로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도 그 무게를 한탄할 줄 모르던 벙어리 나무. (……) 은행나무 고목 앞에 서 있다. 커다랬던 나무는 이제 새순을 내는 것마저 힘에 겨워 보인다. 쇠잔하여 부서져버리는 등껍질 위에 나는 손을 살며시 올려본다.
-김대겸의 <내 안의 나무 한 그루>에서
김대겸의 <내 안의 나무 한 그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있다.”라는 이세 히데코의 동화 속의 한 구절로 시작하는 것이 그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의 마음속의 한 그루 나무는 초등학교의 은행나무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것은 어머니인 셈이다. 늙고 초라한 은행나무처럼 병중이신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작가는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버팀목” “홀로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도 그 무게를 한탄할 줄 모르던 벙어리 나무”로 인식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어머니를 ‘벙어리 나무’로 인식한 부분이다. 그것은 어머니를 말없이 삶의 모든 고통을 인고한 여성성과 모성을 은유한다. 그리고 말없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는 의미를 함유한다.
이처럼 권천학의 수필과 김대겸의 수필은 대상이 다르나, 자식이 어버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버팀목’으로 대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는 봄여름엔 푸름과 녹음에 가려 특징이 잘 분별되지 않는다. 하나 가을이 되면 그 나무의 진가와 수형이 드러나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열매를 보면 그 쓰임새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뿐인가, 단풍을 보면 그 나무의 속성 또한 알 수 있지 않던가. 졸참나무의 단풍을 보라. 개결하고 깔밋한 단풍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맑고 훈훈하게 해준다.
사람도 생의 가을을 맞이하면 나무처럼 참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가 살아온 뼈대와 일궈온 열매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을, 내 생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제 몫을 제대로 일구며 살아왔는지, 이 가을에 졸참나무가 삶의 갈피를 되작이게 한다. 속 빈 강정이니, 빛 좋은 개살구니 하는 말만은 면해야 할 텐데.
-정태헌의 <졸참나무 생각> 결말 부분
정태헌의 <졸참나무 생각>은 “그해 봄, 우린 처음 만났다. 땅 끝 전망대를 오르는 자드락길, 그는 저만치에 서 있었다.”로 시작된다. ‘우리’, 그가 만난 대상은 졸참나무이다. 이 나무를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훤칠하고 미끈하며 볼품 있는 나무”로, “회백색 거친 수피에 세로로 골이 깊게 팬 것일 뿐, 한데 조선 백자 같은 투박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이 드는 나무로 표현한다. 그리고 “졸참나무 열매를 보면 똑 닮았다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뿐 아니라, “몸피가 오종종하고 키가 작”은 것을 “찰기가 있고 결이 고운 중년 사내”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졸참나무를 “자신의 처지를 푸념하지 않는” “변두리 한곳에 붙박혀 ”사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처럼 “개결하고 깔밋한 단풍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맑고 훈훈하게 해준다”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이 수필은 위의 수필처럼 큰 나무의 버팀목이나 삶을 고통을 기대게 하는 기둥으로 인식하고, 훈훈함으로 넉넉함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커다란 나무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나무뿌리가 땅바닥에서 한 뼘이나 불쑥 솟아 있었다. 일 미터도 훨씬 넘는 긴 쇳덩이 같은 것이 독수리의 발가락처럼 떡 벌어진 뿌리. ‘판근’이다. 산비탈 자갈밭 같은 척박한 곳에서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나게 크고 단단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 가시나무들이 살아남기 위한 변신도 놀라웠다. 건드리기만 하면 찌를 듯 날카로운 호랑가시나무 잎이 위로 갈수록 그 뾰족함을 벗어놓고 둥근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장을 벗어버린 홀가분함과 여유로움까지 느껴지는 천연덕스런 얼굴. 아니, 가시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다는 듯 수줍어하는 것도 같았다. 동물의 손발이 닿지 않은 곳에서까지 창검을 번득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찌뽕나무의 가시는 줄기가 변한 것이다. 동물들이 지나가는 높이까지는 무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살가죽을 발라내어서라도 무기를 삼아야 하는 생명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수줍은 듯 보이는 동그란 호랑가시나무 잎도 그 안에 날카로운 가시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포탄이 날고 요란한 포성 속에 피 흘리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소리 없는 전쟁인지도 모른다. 숲은 날마다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김이경의 <환상숲에서>에서
김이경의 <환상숲에서>에서는 제주도의 ‘곶자왈공원’ 숲의 감회를 쓴 수필이다. 제주도 말로 ‘곶’은 숲을, 그리고 ‘자왈’은 가시덤불의 이르는 제주 말이라는 설명으로 이 수필은 시작된다. 위에 예시한 인용문은 ‘소리 없는 전쟁’이라는 소제목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소제목이 의미하는 바, 특히 숲을 이루는 가시나무의 생명 지키기 위한 생존경쟁의 현장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소제목 ‘디딤돌’에서는 덩굴식물들의 디딤돌이 되었다가 죽은 나무들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지막 소제목 ‘자연은 그냥 두는 거야’에서는 소나무와 관목과의 상관 관계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다. “소나무가 자라면 햇빛을 받지 못한 관목들이 죽는다. 소나무는 덩굴에 감겨 죽는다. 그리고 다시 관목이 자란다. 나무가 덩굴을 올리는 것도 너그러움이 아니고 덩굴이 나무를 휘감는 것 또한 탐냄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 먹고 먹히는 것은 섭리이고,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질서다. 한 생명이 죽은 자리에 다른 생명이 자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가 그것이다. 나무들의 생존경쟁을 통해 자연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이 자연의 일부임을 망각하는 것이 오만”임을 환기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큰 나무에 기생하면서 버팀목 혹은 디딤돌을 파괴시키는 덩굴나무들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수필이다.
아직 팔월이라 나무들은 푸름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제철은 잊고 허덕이는 나무 하나가 있다. 도도히 달려가는 대열에서 낙오된 초원의 누우처럼 불안하게 보인다. 푸름을 간직하고 있어야 할 시기에 혼자 병든 몸으로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그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고, 오히려 처절하게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
눈매 선한 남자. 늘 허허대는 그는 다른 사람이 장기 하나쯤 빼 달라 해도 쾌히 주었을 사람이다. 근심 없는 사람처럼 웃음 달고 살던 남자, 사는 것이 힘에 부쳐서 찡그린 얼굴 대신 웃음으로 허허로운 가슴을 채우려 했나 보다. 그라고 어찌 우뚝 선 나무처럼 보란 듯이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홀로 앞서 계절 옷을 급하게 주섬주섬 입은 모양새로 서 있는 나무의 빠른 단풍이 아리다.
-김사랑의 <안개 속에서>에서
김사랑의 <안개 속에서>는 서두부터 감각적 표현으로 시작된다. “새벽 강변길을 따라 걷는다. 그녀보다 조금은 일찍 잠에서 깬 안개가 산책길로 기어 올라와 그녀를 이끈다. 그 안개 속을 걷는다. 저편에 보이는 나무가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다가는 손으로 눈을 훔치고는 다가선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의 그녀는 작가 자신이다. 안개 속의 나무는 강변길의 나무일 수도 있고, 위의 인용문의 “제철은 잊고 허덕이는 나무”, 혹은 민속촌에서 본 “단풍 든 나무처럼 병마에 허덕이는 남자”를 의미하다. 복선으로 이중적 의미를 만드는 트릭이다. 이를 입증하는 부분은 결말 부분의 “……안개가 그 나무를 휘덮는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그가 아직도 헤픈 웃음을 날리고 있고”가 그것이다. 그 남자는 “단풍 든 나무”이다. 작가의 민속촌 출타 며칠 전에 이 세상을 뜬 남자이다. 그 남자를 ‘그’라고 지칭해서 쓰고 있지만, 친족 혹은 인척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의 “어찌 우뚝 선 나무처럼 보란 듯이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홀로 앞서 계절 옷을 급하게 주섬주섬 입은 모양새로 서 있는 나무의 빠른 단풍이 아리다.”에서 ‘아리다’라는 언어가 그것을 입증해준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절제된 표현이다.
당산나무가 늦여름의 어스름 저녁 불빛에 운다. 그 아래 서서 숨죽여 우는 내가 가엾다. 흰 상여꽃이 멀어져 간다. 이제야 뒤늦게 내 어머니의 당산나무 아래에서 빌고 있다. 황색, 적색, 백색, 흑색의 깃발이 잠시 흔들린다. 나를 안아 위로한다.
-배복순의 <땡감> 결말 부분
위의 <안개 속에서>와 같은 특집인 ‘한국민속촌, 무늬로 남은 이야기’에 같이 실린 배복순의 <땡감>은, 기원의 대상으로서의 당산나무를 모티프로 한 수필이다. 당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 제사를 지내는 나무이다. 작가는 문학행사 전에 민속촌마을 입구에서 당산나무를 만난다. 오색 깃발이 펄럭이는 아래에서 울렁증이 생기고, 전율을 느낀다. 그리고 환상을 갖게 된다. “어느새 깃발은 꽃을 만들어 낸다. 하얀 꽃이 자꾸 피어오른다. 꽃은 더 많아진다. 하얀 종이꽃을 잔뜩 매단 상여가 훠이훠이 느릿느릿 지나간다. 상여꽃 속에 꺼이꺼이 소리도 못 내고 울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판타지 공간으로 그린 것뿐이다. 작가와 어머니는 관계를 단적으로 요약해주는 문장은 “나는 어머니에게 평생을 바구니에 주워 들고 온 땡감처럼 떫기만 했다.”가 그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제대로 우려낸 감처럼 달착지근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못난이’였다고 슬프고 아프게 느낀다. 그래서 작가는 당산나무에 기원을 드리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감나무와 땡감의 역할은 어머니와 작가의 사연을 매개해주는 나무인데 반해, 당산나무와 오색 깃발은 기원을 통해 얻어지는 마음의 위로를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달고 깊게 빠졌던 초저녁잠이 엷어질 무렵이면 아람 벌어 떨어지는 밤톨들이 베갯맡을 툭툭 건드린다. 후두둑 떨어지는 것은 참나무 낙엽더미로 굴러 들어가는 알밤 소리고 제법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은 나무둥치를 후려치며 굴러 떨어지는 굵은 밤알들이다. 밤나무가 아람 벌 때면 아침이 부옇게 벗겨지기도 전에 동네 집집마다 남부여대 자루를 메고 나선다. 추석 달이 이울어 서쪽 하늘에 걸려 있는 새벽,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부풀리고 밤나무 숲으로 몰려든다.
-정연희의 <알밤 한 톨에서 배우는 것> 서두 부분
정연희의 환경연재에세이 네 번째 이야기 <알밤 한 톨에서 배우는 것>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 밤나무와 알밤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수필이다. 위의 인용문은 이 수필의 서두 부분이다. 새벽녘에 밤 숲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이 수필은 시작된다. 아무리 늦게 밤 숲에 와도 빈 손으로 보내지 않는 밤 숲의 푸근한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뒤 이 수필은 “뽀오얀 새벽달과 저수지 물안개를 바라보며” 밤 숲길을 걷다보면, 나를 기다려주는 밤, 부끄러운 듯 알밤을 드러낸 밤알. “떡갈나무 잎 그늘에 몸을 반쯤 감추고 곁눈질로” 유혹하는 알밤들에게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아래 인용문에서 보여주는 생명감이다.
손바닥이 뿌듯하도록 굵은 밤알을 손아귀에 잡을 때의 그 실팍함……, 아! 그런 것이 순리의 기쁨일까. 땅의 숨결, 그리고 땅에서 나는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건네는 생명의 고백, 묵묵하게 한철을 가득 차게 살다가 건네주는 겸손의 절대적인 무게./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명의 결실은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을까. 가슴이 떨렸다. (……)
-정연희의 <알 밤 한 톨에서 배우는 것>에서
밤알을 손아귀에 쥐고 느끼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순리의 기쁨’ ‘땅의 순결’ ‘생명의 고백’ ‘겸손의 절대적인 무게’이다. 그렇게 작가는 인식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온 생명은 결실, 그 무게는 얼마나 될 것인가를 의혹하며 전율한다. 자기성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수필이 전하고자 하는 바 메시지는 연재 테마가 그러하듯 환경 문제이다.
아람이 벌고 나면 밤나무 숲은 만신창이가 된다. 더러는 가지가 꺾이기도 하고 돌이나 장대에 맞아 가지가 찢기기도 한다. 짓밟힌 밤송이에 해작질한 낙엽더미, 밤나무 밑에서 자라던 어린 나무들은 온통 밟혀 제 구실을 할 것 같지 않다. 밤을 주워 간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행패를 부리고 간 흔적만이 남는다. 그러나 인간이 입치레를 위해서 무슨 짓을 하건 밤나무는 그저 묵묵할 뿐이다. 내년이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새 잎을 밀어내고, 짓밟혔던 흔적을 감추고도 남을 싱싱한 숲을 이룬다. 그리고 다시 묵묵하게 알밤을 키운다./ 손아귀에 잡힌 실팍한 밤 한 톨의 무게에 나의 내면內面을 비추어보며 부끄러움 때문에 눈을 감는다.
-정연희의 <알 밤 한 톨에서 배우는 것> 결말 부분
위 수필의 결말 부분을 보면, 이 수필은 단순한 자연 훼손 혹은 환경 파괴 문제를 다뤘다기보다는 자연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는 힘. 그 힐링 에너지가 있음을 환기하기 위한 수필로 이해된다. 알밤을 내어주고, 자신이 떨군 낙엽을 거름 삼아 봄이 되면 잎을 내고 꽃을 피워 알밤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 그 나무보다도 못한 인간을 경계하기 위해 이 수필은 쓰여진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부끄러움 때문에 눈을 감는다”고 토로한다. 인간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또한, 이 수필 테마를 확대 이해할 때, 우리는 에코페미니즘에 가 닿아 있음을 알게 한다. 이 연재가 끝날 때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여성성이 지니고 있는 생명과 자연 파괴 현상을 연결시켜 정립된 생태학적인 여성주의적 사상을 함유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에세이의 서두에 개진한 나무라는 물질 상상력이 수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조야하게나마 살펴보았다. 특히 시에서 모티프로 많이 차용하고 있는 나무 이미지가 수필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과 동일시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때로는 인고를 통해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표상물로, 때로는 넉넉함으로, 버팀목으로, 그리고 하늘로 비상하는 밝은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작가에 따라 나무 물질 상상력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인식은, 나무가 인간의 등가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을 오행론에서는 간과하지 않았음을 새삼 알게 된다.
유한근 ------------------------------------
동아일보 신춘 평론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외. 평론집 ≪문학의 모방과 모반≫,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한국수필비평≫ 등 다수. 명상언어집 ≪별과 사막≫. 동화집 ≪무지개는 내 친구≫ 등 저서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신곡문학상 대상, 여산문학상 등 수상. 현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교수. ‘인간과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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