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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1월호, 사색의 창] 여전사女戰士 - 최금복

신아미디어 2014. 5. 12. 21:49

"수필은 나를 드러내는 글이라고 한다. 하지만 글로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과거를 지닌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 놓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 여인이 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내세울 것 없는 삶이라고 위축되었던 마음에 불끈 용기가 솟는다."

 

 

 

 

 

 

 여전사女戰士       최금복

   수필은 나를 드러내는 글이라고 한다. 하지만 글로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과거를 지닌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 놓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한 여인이 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내세울 것 없는 삶이라고 위축되었던 마음에 불끈 용기가 솟는다.

 

   결혼 전, 청량리역 근처에 있는 직장엘 다닌 적이 있었다. 출근을 하려면 윤락가가 있는 골목을 지나야 했다. 아침에는 한산했지만 퇴근길엔 젊은 여인들로 북적였다. 짙은 화장에다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칠 때면 여인들이 노골적으로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유혹해 왔다. 뒤돌아볼 새 없이 뛰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 길은 지름길이었고 야간근무로 피곤해진 몸은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했다. 때론 양복 입은 신사가 여인들에게 윗도리를 빼앗기고 매를 맞다 줄행랑치는 웃지 못할 광경을 본 적도 있었다.
   그 무렵, 우연히 여성잡지에서 어느 여인의 수기 한 편을 읽게 되었다. 주소를 보니 내가 지나 다니던 골목이었다. 그녀도 자신이 그곳에서 생활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는 어려운 가정이 많았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회사를 다니는 맏딸인 처녀들이 많아 공순이란 말도 생겨났지 싶다.
   그녀에게도 남 못지 않은 꿈이 있었다. K대를 입학해 부모님의 힘이 되어드렸던 그녀였다. 장애의 몸이 되리라곤 예상치도 못했다. 오로지 야망으로 가득 찬 이십대였다. 맏딸로서 동생들의 학비를 책임져야 하기에 제 발로 그곳을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번 돈을 꼬박꼬박 송금했다. 물론 발신주소는 밝히지 않았다.
   여인은 골목을 지나는 남성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다. 손님과 밤을 보내고 아침 햇살이 들창을 두드릴 때면,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환한 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을 보고 손님의 십중팔구는 마구 때리고 발길질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이 흉측하고 팔 한쪽이 없는 장애자였다. 그녀가 그곳에 오기 전까지는 알아주는 K대학교 학생이었다.
   1960년 4월 중순,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대열에 동참했다 참가한 것이 화근이었다.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라고 쓴 대형 피켓을 서슴없이 손에 들었던 용감한 여대생이었다.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트럭에서 괴한으로부터 총탄기습을 당했다. 피를 흘리며 차에서 굴러 떨어져 얼굴을 긁히고 팔도 한쪽 잃게 되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엔 4·19 후속 과업을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 여인의 처절한 사연이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여인의 희생은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나,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장애자라는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래 아무도 모르게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그녀는 손님에게 새로운 삶의 도움을 청했다. 작은 가게를 하며 재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립던 부모님과 상면도 했다. 그녀는 수기로 자신을 드러냈다. 과거에 가졌던 직업의 편견으로 더 이상 불행해지진 않을 것이라고……. 또 남들은 손가락질할지언정 남은 생애는 꿋꿋하게 살아가겠노라고.

 

   그런데도 난, 항상 외적인 아름다움과 그 사람이 가진 직업이 인간이 가진 가치의 대부분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 누가 내게 전직을 물어오면 우물쭈물하기 일쑤였다. 굳이 농사꾼이었던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직업에 따라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필을 쓰는 데 있어서도 그렇지만 어디를 가나 주제가 초라하게 느껴져 매번 나 자신에 대해 못마땅하기만 했다. 신변잡기부터 시작되는 나의 글은 발표할 때마다 농사짓던 이야기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윤락가에서의 생활을 수기로 드러낸 용감한 여인도 있건만, 혼자만 발가벗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끝까지 숨겨서 될 일도 아니었다. 진솔하게 쓰지 않으면 후속작품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래 이왕 시작했으니 체험을 바탕으로 내면의 세계를 한 올 한 올 실타래를 풀듯 거짓 없이 써 나갔다.
   몇 편의 작품을 쓰다 보니 내 글의 언어가 지닌 미적인 감수성과 예술적 기교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농사일을 했다는 것만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일종의 직업으로 떳떳한 일이었다. 다 도시인이면 누가 농촌을 글 소재로 다룰 것인가.
   남들이 마다하는 특수작물인 호프를 제일 먼저 심었고 높은 소득을 올렸다. 그것을 보고 거지반 사람들은 뽕나무를 베어내는가 하면 보리를 심던 드넓은 농지에 호프지줏대를 세웠다. 그뿐인가. 누가 뭐라 해도 난, 가시가 따갑다고 시큰둥했던 아까시 건초작업을, 온 동네가 참여할 수 있도록 부추겨 산골마을의 부를 일으킨 여전사가 아니던가. 장작을 땐 화덕 같은 무더위 속에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호프넝쿨 장대질하던 기량을 살려, 나만의 색깔로 써나가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리라.
   내 모습 이대로 당당해지자. 늘 머뭇거리던 발걸음은 새로운 각오를 굳힌다. 그리곤 문학회를 향해 전철역 계단을 힘차게 내딛는다.

 

 

최금복  ---------------------------------------
   ≪수필시대≫ 등단.  동아일보 제1회 투병문학상 수상. 수필집: ≪물 위의 옛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