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의 꽃망울이 터지면서 퍼져 나올 향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 듯 올해 여름방학에는 얼마만큼 성장해서 돌아올지 아들녀석이 자못 기다려진다."
봄이 오는 길목에 - 임정순
햇살이 따사로운 걸 보니 어느새 봄이 오나 보다. 베란다 화분에서도 쭉쭉 꽃대가 솟아오르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바람 끝이 찬데 새봄을 알고 꽃 피울 준비에 나선 걸 보니 한겨울 추위를 이긴 것이 보기에 대견하다. 어찌 그리도 계절의 변화를 아는지 신기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다.
겨우내 집 안에 들여놓지 않아 잎들이 누렇게 변한 것도 있고 끝이 까맣게 말라붙은 것도 있지만 주인의 소홀함에도 의연하게 꽃을 피우려 하고 있다니……. 미안한 마음에 마른 잎을 정리하고 물을 흠뻑 주니 조롱조롱 매달린 꽃망울들이 금방이라도 그윽한 향기를 내뿜을 것같아 황홀해진다.
전에는 풀처럼 그저 초록 잎들만 무성한 난에 별 매력을 못 느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난이 꽃을 피우면서 내뿜는 그윽하고 은은한 향기를 느끼게 되면서 왜 난을 키우는지 알게 됐다. 꽃도 화려하지 않지만 그에 어울리는 진하지 않은 향기가 그야말로 바람결에 실려오듯 은근해서 참으로 좋았다.
이 집에 이사 온 후 베란다가 따스해 겨울에도 난을 그대로 두었더니 봄이 되면 그 향기로 게으른 주인을 매혹시키고 있다. 난은 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고 추위를 견뎌야 꽃을 피운다고 한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집 안에 장식품으로 놓아둔 화분에서는 꽃대가 나올 기미도 없다. 고생을 겪고서야 제구실을 한다니 인생살이와 비슷한 것 같다.
소리를 하는 사람이나 연기자도 고통을 이겨야 농익은 멋을 표현하게 된다 하지 않던가. 어디 예술가뿐이랴. 그래서 옛말에도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나 보다.
사람들은 누구나 편하고 풍요롭게 살기를 원한다. 더구나 자식들에게는 고생 같은 걸 시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천명이라는 나이에 이르고 보니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도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이를 잘 극복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간절히 원하는 것도 고생 끝에 얻어야 보람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지난여름 일이 떠오른다. 외국에서 돌아온 대학생 아들이 방학 내내 군대에서 휴가 나온 친구 만나랴, 입대하는 친구 보내랴,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격조했던 친구들이랑 만나는 걸 이해 못할 것까지 없지만 날마다 그러고 다니니 한심해 보였다. 그런데 한술 더 떠 해운대로 놀러 가겠다고 한다.
저도 염치가 없었는지 그 비용을 마련하려고 친구랑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단다. 수입이 나은 분야는 물류창고나 이삿짐 나르는 일이라며 새벽에 나가길래 속으로 ‘그래 고생도 좀 해봐라.’ 싶어 두고 봤다. 그런데 두 시간쯤 후에 터덜터덜 돌아왔다. “인력사무소에 갔는데 장마철이라 허탕을 쳤다.”라고 한다. 거기 앉아서 몇 시간 기다리면서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모두 기운 없이 발길을 돌리는데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 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음고생을 좀 한 것이 열 마디 잔소리보다 효과가 크구나.’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순간 녀석은 지금껏 체험하지 못한 세상을 본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언제 나갔는지 아들이 없었다. 또 새벽에 일을 구하러 나간 것이다. 평소에는 밥 먹으라고 깨워야 겨우 일어나더니……. 안쓰런 생각과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얼마 후 친구랑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게 됐다고 전화가 왔다.
어제와 달리 일자리를 얻어서인지 목소리가 밝다. 그런데 부모 마음이란 게 그런 것인지 하루 종일 속이 탔다. 하필 밖에 이삿짐 차가 와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아들 또래 아이를 보자 더욱 걱정이 됐다. 날씨는 푹푹 찌는데 짐을 나르려면 요령도 없이 얼마나 힘들까, 혹시 뭘 깨거나 망가뜨리지는 않을지, 일을 못한다고 센터장에게 혼나지나 않는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루 내내 시계만 보고 걱정으로 시간을 보냈다.
참다 참다 전화를 걸어보니 받지도 않았다.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보통 오후 네 시쯤이면 일이 끝난다고 했는데 여섯 시가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용돈 좀 주면 될걸, 나를 책망하며 가시방석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날 늦게야 돌아온 아들은 꾀죄죄한 몰골에 잔뜩 지쳐 있었다 욕실로 뛰어들어가 씻고 나오더니 무용담처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하필 딸네랑 두 집 살림을 합치는 이사라 짐이 많아 늦게야 끝났다.’고 한다.
아침에 늦잠 잘까 싶어 거의 밤잠을 설치다시피 하고 가서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무사히 온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돈 벌기가 이리도 힘드니 앞으로는 절대 돈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하는 걸 보니 그 동안 녀석에 대한 노파심이 조금은 덜어진 것 같다.
며칠 후, 자신이 번 돈으로 해운대 여행을 떠나는 아들이 저렴한 숙소를 구하느라 애쓰는 게 안돼 보였다. 친구들이랑 편하게 지내다 오라고 좀더 나은 곳을 구해주었다. 스스로 여비를 마련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없었다면 나도 그런 배려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난초의 꽃망울이 터지면서 퍼져 나올 향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 듯 올해 여름방학에는 얼마만큼 성장해서 돌아올지 아들녀석이 자못 기다려진다.
임정순 ---------------------------------------------
전북 남원 출생. 경상대학교 졸업. 전 EBS작가.
당선소감
다가오는 봄의 기운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꽃샘추위다 뭐다 아직 웅크리며 엄살을 떠는데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 새순들이 올라와 있다.
매년 요맘때면 나는 늘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람에 흔들리던 앙상한 가지며 이름 모를 잡초들도 모진 추위를 잘도 이기고 저렇듯 희망의 새움을 틔우는데 ‘나는 뭘하며 살았나.’ 훌쩍 지나버린 세월이 아쉽고 게을렀던 내 자신이 밉고 초라해서다. 늘 생각은 있으면서도 실천에 인색한 나를 채찍질해 수필의 길로 이끌어주신 부모같고 때론 친구 같은 선생님 덕분에 올봄은 나도 새로운 발걸음을 조심스레 내디뎌 본다. 아직 미숙한 작품을 뽑아주신 ≪수필과비평≫ 관계자들께도 감사드린다.
이제는 누군가의 한마디 또는 무심히 지나치던 모든 사물들까지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이 좋은 글감이 되도록 바쁘고 사려깊게 살아보련다. 그리하여 나 자신, 또는 그 누군가에게 아주 작더라도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과비평 2014년 5월호, 제151호 신인상 수상작] 용湧물 - 노춘희 (0) | 2014.05.03 |
---|---|
[수필과비평 2014년 4월호, 신인상수상작] 날개가 아파요 - 한가희 (0) | 2014.04.10 |
[수필과비평 2014년 4월호, 신인상수상작] 무인도에서 - 김위경 (0) | 2014.04.10 |
[수필과비평 2014년 3월호, 제149호 신인상 수상작] 무거운 빵 - 최정인 (0) | 2014.03.09 |
[수필과비평 2014년 3월호, 제149호 신인상 수상작] 망우초忘憂草 - 오세길 (0) | 2014.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