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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이 계절의 시]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 - 황치복

신아미디어 2013. 12. 18. 08:14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에는 불안과 매혹이 공존한다. 죽음이 항상 삶의 이면에 들러붙어 있으면서 삶을 위협하기도 하고, 추동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인간을 한계 상황으로 몰고가는데, 그러한 한계 상황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경험에 대해 특별한 정서적 효과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다룬 지난 계절의 작품에서 우리는 죽음이란 항상 우리의 삶에 밀착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풍요롭고 의미있는 것으로 탈바꿈시켜주는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음이 삶에 미치는 영향      /  황치복

 

 

   지난 계절의 계간지에 실린 신작 가운데 유독 죽음을 다루고 있는 시편들이 눈에 띄었다. 근래에 드문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서인지 계간지의 시편들에서 죽음에 대한 사유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계절에 시인이 골몰했던 죽음에 대한 사유를 읽고 있으면서 아이러니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사방 천지가 꽃잔치로 출렁거리고 있는 봄을 겪으면서 죽음에 대한 사유를 접하는 것이 어딘지 어색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생명의 에너지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포만감 후에 아련한 애상이 찾아오듯이, 그리고 행복의 절정에서 불행의 예감으로 불안이 시작되듯이 죽음은 생명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절에 이미 배태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독 죽음에 대한 시편들이 눈에 들어온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역설하고 있는 실존적 진실을 굳이 되새기지 않더라도 죽음은 하나의 혁명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통해 유의미한 삶을 살도록 하는 강력한 기제임에 틀림없다. 장례식이라는 것이 산자를 위한 축제이듯이, 죽음은 죽음보다는 삶의 지평에서 유의미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삶이 기대고 의지하는 동력원이 죽음이라는 점, 그리고 삶에 대해서 거울 역할을 하면서 삶으로 하여금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산자들에게 행사되는 폭력이고 이별이고 상처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죽은 자들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더욱 폭력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돌연 충격적으로 산자들을 엄습하여 평온한 심정을 찢어놓고 깊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산자들이 쉽게 해방될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서 삶이 지속되는 동안 은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지인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무의식을 형성도록 한다. 따라서 죽음은 산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밝은 면과 함께 어두운 면을 드리워서 입체성을 지니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또한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심리적 기제를 형성하기도 한다. 죽음은 산자들로 하여금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경험하도록 한다. 잠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역을 달리하여 존재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항력적인 무기력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산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을 통해 한(恨)이라는 심리적 한계상황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상황은 죽은 자의 흔적과 가치를 이승의 삶에 붙잡아 두려는 노력을 강화하기도 한다. 즉 삶은 죽음을 자신의 영역에 남기면서 그것의 가치를 음미하고 재평가하면서 삶의 가치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죽음은 더 이상 무화(無化)가 아니라 생성의 기제로 탈바꿈될 수 있다.
   죽음은 이처럼 산자들에게 매우 유의미한 사건으로서 양가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다루는 시들은 모두 이러한 양가의 가치를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이 지닌 삶의 종결로써의 파괴, 그리고 영원한 분리로써의 이별이라는 폭력적 상황을 수용하면서 그것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이승의 삶에 접목시키려는 시도가 죽음을 대하는 시적 태도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읽게 될 신작들도 대체로 이러한 경향의 자장 안에 있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성대리
나뭇잎 하나에서 우주를 만난 사람
꽃 떨어진 후의 꽃나무처럼
빈 등잔, 하늘의 기름만 고인
빈 그릇에 지상의 침묵만 고인
겨울 속으로 느린 그림자가 걸어온다
패랭이꽃 같던 영혼 느리게 걸어온다
생전에 그 보랏빛 좀 더 가까이 사귀었더면
내 삶도 조금은 더 간절해졌을는지
저녁 놀, 풀잎, 별, 빈산, 물에 잠긴 나무
그렇게 살다 가는 일도 축축하기야 하겠지만
시든 산국화 같은 흔적 깨끗이 말라있구나
나는 온몸의 더듬이를 열고
새 날아간 길 지워진 하늘 쳐다본다

— 조창환, 〈슬로비디오〉(‘계간문예’ 2013 봄호).

 

   산과 벌레의 시인이었던 이성선 시인의 시비를 참배하면서 시인의 생전에 추구했던 가치를 기리는 작품이다. 시인은 작고한 시인의 시비 앞에 와서 살아 있을 때 고인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와 생전에 지녔던 인품들을 떠올리면서 아련한 추억에 젖어든다. 고인을 추모하는 행위는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경험이자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재생시키는 추체험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제목으로 “슬로비디오”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슬로비디오”라는 명명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성선 시인을 추모하는 행위는 과거의 시간들을 조목조목 불러오는 것이기 때문에 “슬로비디오”이기도 하지만, 그분의 삶이 “느림”의 삶을 체현했기 때문에 “슬로비디오”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은 작고한 시인의 이미지가 “느리게” 걸어온다고 상상한다. 즉 “겨울 속으로 느린 그림자가 걸어온다/ 패랭이꽃 같던 영혼 느리게 걸어온다”라고 표현하면서 작고 시인의 영상이 “느림”에 있음을 표나게 강조하고 있다. 시인에게 “느림”이란 작고한 시인의 캐리커처로 인식되고 있거니와, 그러한 느림으로 인해 고인은 “빈 등잔”, 혹은 “빈 그릇”의 이미지로 다가오게 된다. 사실 “느림”은 세속적 욕망의 비움을 체현하는 삶의 양식이기 때문에, 느림의 실천은 곧 비움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탈속의 삶으로써 비움의 삶을 실천했기에 고인은 “나뭇잎 하나에서 우주를 만난 사람”일 수 있었고 “꽃 떨어진 후의 꽃나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에게 고인은 “저녁놀, 풀잎, 별, 빈산, 물에 잠긴 나무”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자연물과 등가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된다. 고인은 인위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화되어 버린 삶을 살아온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승과 저승의 간격은 건널 수 없는 것이어서 고인이 떠난 후의 고인이 남긴 이승의 흔적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시인은 그러한 시간의 파괴 작용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며 과거의 행적을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한 마리 새처럼 날아가버린 고인의 흔적을 쫓으면서 “온몸의 더듬이를 열고” 있는 모습에서 이러한 열망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죽음은 삶에 대해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파괴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고인이 생전에 추구했던 가치와 의미는 이승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삶이 항상 되돌아가고 싶은 영혼의 거처가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고인의 삶이 시인의 고향처럼 마음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눔아 비누는 한 개면 됐지 왜 두 개가 필요해

 

도 닦아 부처되라고 준 돈 그걸 함부로 쓰면 되것냐

 

중놈 믿을 것 못돼 집을 버리고 떠나 온 놈들 어떻게 믿어

 

넘치는 물량에는 향기가 없어 중은 중답게 살아야 향기지

 

뱃속에 밥이 적고 입속에 말이 적고 마음속에 일이 적어야지

 

제일 위대한 종교는? 절이 아니고 친절이지

 

산에 와서 뭘 채우려고 하지마 산처럼 텅 비워

 

산 하나 펄펄펄 눈 속에 파묻히고
새 한 마리 펄펄펄 깃털속에 파묻히고

 

꽃이 피기 시작했어 물 맛이 참 좋아 이 꽃하고 살아야겠어

 

한 송이 꽃을 통해 산의 신성한 침묵을 느껴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 김성춘, 〈山의 어록〉(‘계간문예’ 2013 봄호).

 

   얼마 전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생전에 베풀었던 가르침을 회상하면서 고인을 추억하는 시이다. 구도의 길을 걸었던 스님답게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경구와 지침들을 전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가르침은 그분의 삶이 체현했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수용될 수 있다. 이제는 열반에 들었기에 이러한 가르침은 더욱 마음에 사무치게 되고, 생전의 고인의 모습은 안타까운 그리움의 대상으로 부각될 수 있다. 시인은 굳이 법정 스님의 어록을 “산의 어록”이라고 명명하면서 독자들에게 그것을 전하고 있는데,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산과 같은 삶을 살았던 고인의 행적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산과 같은 삶을 살았던 고인의 가르침은 역시 “비움”으로 집약될 수 있다.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 그리고 정신의 향기를 지녀야 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뱃속에 밥이 적고 입속에 말이 적고 마음속에 일이 적어야지”라는 구절에 고인의 삶의 지침이 녹아 있다. 고인은 산을 “텅 비워”진 형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산이 세속에서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다. 산은 꽃도 키우고 새도 키우는 가득 찬 공간일 수 있는데, 산이 텅 비었다는 것은 바로 산에 “밥”과 “말”과 “일”이 적기 때문에 텅 비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밥과 말과 일에서 초탈해 있기에 고인은 “물 맛이 참 좋아”라고 하면서 밋밋한 “물 맛”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이 꽃하고 살아야겠어”라고 하면서 자연과 하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또한 고인은 한 송이 꽃에서 “산의 신성한 침묵”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러한 진술에서 우리는 “염화미소(拈華微笑)”의 불교적 깨달음을 떠올릴 수도 있다. 시인은 이처럼 고인이 생전에 추구했던 깨우침와 언행을 회상하여 전달해 주고선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면서 회상을 종결시켜 버린다. 이러한 단절은 삶의 절제와 자연의 이치에 대한 강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없이 늘어지는 가르침은 인간의 속정이 개입된 것이며, 자연의 이치는 엄정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삶과 경계를 달리한 죽음의 모습은 항상 삶의 이편에 머물러 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삶의 영역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의미로 가득 차게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영역에서 현존으로 경험할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런데 이상에서 살펴본 죽음은 구도(求道)의 길을 걸었던 시인과 종교인이기에 세속인의 관점에서 볼 때 고상한 의미와 깨우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장삼이사의 세속적 삶을 사는 사람에게 지인의 죽음은 이처럼 초월적인 것일 수가 없다.

 

   한 줌 가루가 된 그대를 봉인하고 돌아서서 절 앞뜰을 에돌아 흐르는 늙은 느티나무 아래와서야 낮은 소리로 울음 우는 가을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여름 내내, 살아가는 일이 죽어가는 일이라 해도 산 동안은 결코 함부로 살 수 없다던 그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다 내려 놓으세요 물소리를 닮은 낮은 목소리 주지스님은 왜 절 앞 산책길에 나무아미타불을 새기는 것조차 못하게 하셨을까요?

 

   그대 만났으므로 비로소 나 세상에 나온 일이 의미 있어 졌는데 그대 봉인의 세계로 돌아간 지금 나는 눈 속에 갇힌 짐승처럼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습니다

 

   봄이 오면 봉인된 당신의 마음도 한 잎씩 파랗게 돋아날까요? 맑은 물은 생전 처음 흘러가는 것처럼 낭랑한 목소리로 흔들리는 잎새들을 읽어내려 갈까요?

— 윤정구, 〈봉인(封印)〉 전문(‘계간문예’2013 봄호).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고 혼자 남게 된 사람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과 같은 적막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 사람의 흔적과도 같은 “한 줌 가루”를 봉인하고 돌아선다. 충격과 고통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심적 상태는 장례를 치르고 나서야 울음으로 터진다. “다 내려 놓”고서 순리에 따를 것을 권하는 주지스님의 목소리도 홀로 남겨진 시적 주체를 위로하지 못한다. 사별하고 홀로 남겨진 자신을 “눈 속에 갇힌 짐승”으로 비유하고 있는 대목에서 시적 주체의 절박함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한 줌 가루”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일이 죽어가는 일이라 해도 산 동안은 결코 함부로 살 수 없다”는 인생관 또한 시적 주제에 또렷이 남겨져 있다. 고인은 아마도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노래한 것과 같이 삶에 대한 절박함과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일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죽어가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삶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처럼 삶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영위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더욱 애절하고 안타까운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생관은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그 사람을 변화시키며 오랫동안 이승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봉인된 고인이 영원히 무화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봄이 오면 봉인된 고인의 마음이 파란 나뭇잎으로 돋아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파란 나뭇잎으로 돋아나는 경우는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시적 주체가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나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며 방황할 때 고인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나뭇잎처럼 피어나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고인이 파란 나뭇잎으로 피어나는 경험은 매우 생동감 있고 감동적인 장면이기에 시적 주체는 그것을 처음 겪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경험할 것이며, 그러한 경험은 삶에 생동감을 부여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이 주기적으로 재발하는 때는 아마도 기일(忌日)과 같은 날이 될 것이다.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간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 강성은, 〈기일(忌日)〉 전문(‘문학과사회’ 2013 봄호).

 

   죽은 이를 주기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기일(忌日), 즉 고인이 사망한 날인 제삿날이 있기 때문이다. 기일에 가족과 친지들은 한자리에 모여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에 숨겨두었던 추억을 끄집어낸다. 기일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시간이며 따라서 이승과 저승이 경계를 허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일을 죽은 이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슬픈 날이지만,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의 시공에서 만난다는 점에서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음은 산 자들의 입장에서 두렵고 괴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산 자들은 죽음을 되도록 멀리 하려고 하고, 죽은 자를 되도록 빨리 기억에서 지워내려고 한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물건을 태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죽은 사람이 남긴 사물은 죽은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어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도망치고 싶은 산 자들의 심리는 이러한 유품과 유물을 기피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은 더욱 확대되어 망각하고 싶은 존재와 관련된 물건을 버리는 것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처럼 멀리 하고 싶었던 죽음이라 하더라도 산 자들은 결코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간이 지나고 기일이 돌아오면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추억하기 위해 다시 모인다. 그리고 자신이 버리고자 했던 기억들의 조각들을 서로 맞추면서 죽은 자의 시간에 동참한다.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기일날 죽은 자의 행적을 더듬는 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이승의 시간에 저승의 시간을 덧붙임으로써 입체적이고 풍요로운 시간이 되도록 한다. 죽음은 산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 자신이 죽어서 죽은 자와 만나게 될 미래를 당겨옴으로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자리에 중층적으로 포개지는 그러한 시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시간의 질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예술적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빠져들던 그 생각
내가 모르는 목적지나 고향에 대한 생각
언젠가 나의 나이가 그곳에서 완성되리라는 생각
그런데 그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중략…)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고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
애인 얼굴을 보고 저것은 구름이 아닐까,
의심하는 바보 같은 생각

 

얼마 전 후배가 심근경색으로 죽었을 때는
그 생각이 아주 멀리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 나는 후배의 영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우리보다 먼저 죽었을 뿐이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죽어서는 안된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대학원생들에게 말하듯
나 자신에게 엄숙한 투로 말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나오자마자 그 생각이 엄습했다

 

누군가 너무 빨리 도약했다는 생각
누군가 너무 일찍 추락했다는 생각
도대체 그 이상하고 모호한 생각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어쩌면 그 생각은 심지어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
세상이 아주 조용할 때에
아무도 억울하게 죽지 않았던 때에
굶주림과 예속이 없었던 때에
생각할 게 아무것도 없었던 때에 시작됐을 것이다

 

어떤 바보는 그 생각으로 염려와 한숨을 빚었을 것이다
인적 하나 없는 들판의 바람이 멈출 때까지
마침내 신이 손가락을 들어 희생양을 가리킬 때까지
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생각 때문에
아이들이 곤히 잠들었을 때도 홀로 깨어 있었을 것이다

 

시는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 심보선, 〈어떤 생각〉 부분(‘창작과비평’ 2013 봄호).

 

   시의 핵심적인 구절인 “내가 모르는 목적지나 고향에 대한 생각/ 언젠가 나의 나이가 그곳에서 완성되리라는 생각” 등은 곧 죽음에 대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더 나아가 신의 섭리나 자연의 이치와 연결되어 있다. 시인은 서울역에 드나드는 열차를 보면서 그러한 상념에 빠져드는데, 그러한 상념은 불안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고요한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으로서 어떤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의구심, 혹은 고정된 것이란 허상에 불과하며 그 이면에서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밟고 있다는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상념은 시인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완성”에 대한 생각이자 “목적지나 고향”에 대한 생각으로써 어떤 충일감을 내포하고 있다. 즉 죽음은 본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귀향 의식,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완수하고 완결성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목적의식 등이 중층 결정을 이루고 있다.  즉 즉음에 대한 생각은 하나의 완성이자 귀향이라는 의식과 불가피한 변화이자 몰락의 과정이라는 불안의식이 공조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완성이자 귀향이라는 생각 때문에 시인은 “누구도 먼저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 너무 빨리 도약했다는 생각”, 혹은 “누군가 너무 일찍 추락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즉 죽음은 정해진 길의 종착지에 있으며, 그 종착지에 도달하는 것이 완성이자 귀향인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삶을 종결하는 것은 그러한 완성과 귀향의 의미를 완성하지 못한 불의의 사고가 된다. 그래서 시인은 “누구도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는 항상 있기 마련이고, 실존적 개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를 알지 못한다. 즉 귀향이나 완성의 의미는 사후적인 의미 규정으로써, 그것을 예측하거나 계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실존적인 개인들의 죽음은 돌발적인 사건으로써의 성격을 가지게 되고, 그러한 죽음의 사건적 성격은 모든 산 자들을 불안감에 휩싸이게 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돌발적 죽음에 대한 상념은 “염려와 한숨을 빚”어내기도 하고, 한밤중까지 “홀로 깨어 있”도록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것이 궁극적으로 “시”를 탄생시켰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생각 속에는 “시”라는 예술 장르에 대한 다양한 관념들이 담겨 있다. 시란 곧 불완전한 인간이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발명한 위안물이라는 것, 그리고 시란 죽음의 불확실성에 대해 대응하기 위한 고안물이라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시는 불특정한 시기에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목적지와 고향에 미리 도달하는 수단, 혹은 시란 다가올 죽음을 미리 선취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완성으로 이끄는 매개물이라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죽음이란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고안해낸 다양한 예술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겠다.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에는 불안과 매혹이 공존한다. 죽음이 항상 삶의 이면에 들러붙어 있으면서 삶을 위협하기도 하고, 추동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경우이든 인간을 한계 상황으로 몰고가는데, 그러한 한계 상황으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다양한 경험에 대해 특별한 정서적 효과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죽음을 다룬 지난 계절의 작품에서 우리는 죽음이란 항상 우리의 삶에 밀착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풍요롭고 의미있는 것으로 탈바꿈시켜주는 의미 있는 경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황 치 복  -----------------------------------------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문학평론가).  200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