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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이계절의 소설] 젊은 소설가들의 상상 세계: 2013년 봄의 소설들 - 노대원

신아미디어 2013. 12. 18. 08:13

"배상민의 소설은 웃음과 눈물로 범벅된 루저들의 세계다. 소설로 상연되는 채플린 극장이 있다면 이와 같을까? 작가의 소설들은 이 시대의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절망한 자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연민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정직한 비관주의가 낙관의 의지와 만나 이루는 하모니가 그의 소설을 활력 있고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무언가 다르다. 작가는 유쾌한 사회학자에서 유쾌한 ‘인류학자’로 변신하기를 꿈꾸고 있는 듯 하다."

 

 

 

 

 

 

 

 

 젊은 소설가들의 상상 세계      /  노대원
     —  2013년 봄의 소설들

 

 

 

 어느 고릴라에 관한 유쾌한 인류학 보고서

 

   배상민의 소설은 웃음과 눈물로 범벅된 루저들의 세계다. 소설로 상연되는 채플린 극장이 있다면 이와 같을까? 작가의 소설들은 이 시대의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절망한 자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연민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정직한 비관주의가 낙관의 의지와 만나 이루는 하모니가 그의 소설을 활력 있고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왔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무언가 다르다. 작가는 유쾌한 사회학자에서 유쾌한 ‘인류학자’로 변신하기를 꿈꾸고 있는 듯 하다. 배상민의 〈미운 고릴라 새끼〉(‘좋은소설’ 2013 봄호)의 첫 대목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아프리카 콩고 내륙 지방에 산다는 보노보 원숭이는 때와 장소는 물론 암수도 가리지 않고 짝짓기를 한다. 좋아하는 상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상대가 있더라도 보노보 원숭이는 평등하게 짝짓기를 해준다. 그런 방식 때문에 녀석들은 다른 유인원과 달리 짝짓기 상대를 놓고 다투지 않는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여자는 나와 짝짓기를 할 때도 있지만 잠은 거의 내 어미 방에서 잔다. 어미도 나도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자를 곁에 두려고 서로 경쟁하지는 않는다. 여자는 자유롭게 그러나 골고루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준다. (66면)

 

   〈미운 고릴라 새끼〉는 표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를 패러디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오리가 아니고 고릴라여야만 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소설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에게 내놓고 있다. 여기서는 잠시 그 답을 미루고, 이 소설의 특장에 대해서 먼저 말하도록 하자. 작가는 〈미운 고릴라 새끼〉에서, 인간 삶의 행태를 보노보 원숭이와 고릴라와 비유하고,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대조하기도 한다.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the naked ape)’로 보고 그들의 삶을 관찰한 동물행태학자 데스먼드 모리스의 작업1)을 떠올리게 된다.
   데스먼드 모리스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추켜세우며 자랑하는 인간들을 철저히 동물의 삶을 연구하는 관점으로 짝짓기, 기르기, 싸움, 먹기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관찰했다. 이 작업은 확실히 그 독창성만큼이나 흥미롭고, 어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연구 성과 이상으로 독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앎과 통찰을 제공해 준 보고서이다. 인간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며, 따라서 인간의 삶에서는 사회와 문화적 요인이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 삶의 근본적인 핵심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작가는 정말 소설로 동물행동학 보고서를 쓰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물론, 실제로 〈미운 고릴라 새끼〉는 인간 행태를, 즉 ‘나’의 가족들을 면밀한 동물 관찰 보고서의 스타일로 적어 내려가고 있다. 원숭이들이 인간들의 몸짓을 따라하듯이 작가가 동물행태학자나 인류학자들의 말투를 능글맞게 흉내 내는 것을 보고 독자들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채플린처럼 뛰어난 희극 배우가 그렇듯이, 뛰어난 작가는 웃음을 터뜨리는 말짓과 몸짓 뒤에 서글픈 눈물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다.
   그 숨겨진 눈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미운 고릴라 새끼〉는, 그 능청스러운 패러디 화법을 증발시켜 버리고 그 뼈대만을 추리면, 사실상 불행한 가족 이야기이자 ‘나’의 서글픈 인생 이야기(실패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소설의 초반부 이야기는 어떤가. ‘나’의 어린 시절, 행복했던 ‘스위트 홈’의 나날이 가고, 어느 날부터 집을 떠나 계란 장수를 하는 아비는 어미에게 의처증적인 폭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너는 어떤 놈의 종자냐’고 하며 ‘나’를 패려고까지 한다.2) 어미의 극적인 반격 이후 부모는 이혼을 하고 ‘나’는 아비와 떨어져 살게 된다. 거칠게 요약된, 이 슬픈 가족 이야기는 소설에서는 전혀 슬프지 않게 서술된다. 아니, 오히려 마치 사물의 명암이 뒤바뀌어 보이는 음화(陰畵)처럼 능청스럽고 유쾌하게 서술된다.

 

 

   이 소설의 선행 텍스트인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본래 일종의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를 구현하고 있는 서사라는 것을 떠올려 보자. 미운 오리 새끼는 자신이 백조라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자신의 부모가 타인이며 자신 역시 고귀한 출신이라는 공상이 실현되는 가족 로맨스이다. 이 공상의 이면에는 부모의 이상에 대한 불일치가 있었다. 〈미운 고릴라 새끼〉의 주인공이자 이야기꾼(narrator)인 ‘나’의 인생 역정 또한 가족 로맨스를 공상할 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그는 부모가 주고받는 가정 폭력을 성실하게(?) 보고 자라 ‘조직’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는 그는 말 그대로 고릴라처럼 살아간다. “내 영역에서 암컷을 놓고 수컷끼리 시비가 붙으면 주먹을 써서 쫓아내는 일이 주된 임무였지만 시비 붙을 일이 없을 때는 나에게 할당된 암컷을 관리하기도 했다. 동물의 왕국에서 보던 고릴라와 오차범위 ‘±5%’에 근접하는 수준의 생활이었다.”(72면) 짝짓기, 싸움, 먹기를 중심으로 고릴라의 생활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 그의 조직 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조직 생활, 특히 룸살롱 영업을 위해 계란 마케팅에 골몰하는 대목은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로만 치부하기 어렵다. 소설의 중반부에 상당한 분량으로 서술된 룸살롱의 계란 마케팅은, 그 부조화의 독특함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영업과 마케팅, 승진, 고용보장, 구조조정,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의 단어와 그것이 이루는 비유에 주목해 보면 평범한 직장 생활과 노동을 빗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조직 폭력배의 영업이라는 특수성과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보편성이 대립되는 성격들이 주인공에게 부여되면서 이 소설만의 고유한 수사학은 힘을 얻는다. 그러면 이제 최초의 질문에 답해 보자. 우리의 주인공은 어째서 고릴라에서 보노보 원숭이로 스스로를 받아들이면 안 되었던 것일까? 다음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일종의 미운 오리 새끼였던 셈이었다. 자기 영역과 암컷을 지키는 일이 전부인 고릴라들 틈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릴라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나는 고릴라들과 달리 암컷이든 영역이든 무엇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아비의 죽음 이후 무엇인가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인생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내가 고릴라 종류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86면)

 

   지금, 주인공은 패배자의 언어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기 영역과 암컷을 지키는 일”에서 패배한 고릴라의 처지로 빗대어진다. 배상민 소설의 여러 주인공들이 다양한 상황 아래서 패배와 몰락을 경험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 소설 역시 기존 소설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전자를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소유와 폭력적인 경쟁 구도가 고릴라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면, 유전자보다는 ‘정(情)’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박애와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보노보 원숭이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주인공이 고릴라에서 보노보 원숭이로 살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누군가 보노보 원숭이의 삶을 꿈꾸고 있다면, 그 공상의 불쏘시개는 분명 우리네 삶의 극심한 피로로부터 온 것이리라.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종언

 

   2000년대를 수놓은 젊은 소설가들은 이른바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의 답답한 청춘을 그려왔다. 이를테면,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나 김애란의 〈성탄특선〉이 대표적이다. 물론, 더 많은 소설들을 이 목록에 추가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 소설에서 젊은 주인공들은 고시원과 자취방 같은 비좁고 누추한 거처에 터를 잡고 힘겹게 살아가면서 가난한 연애를 이어왔다. 소설 속에서 이십대였던 그들에게도 세월은 비껴 가지 않았다. 그들 또한 삼십대가 된 것이다. 그들 역시, 어느덧 결혼을 하고 신혼집을 꾸리면서 입주와 출산이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김애란 소설의 경우는 어떤가. 작가의 등단작 〈노크하지 않는 방〉(《달려라, 아비》, ‘창비’, 2005)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가 자취방에 사는 대학생을 그렸다. 그 후 두 번째 단편집에 실린 〈침이 고인다〉(《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에서는 목동의 입시학원에서 강사를 하면서 원룸에 월세로 사는 이십대 여성을 그렸다. 세 번째 단편집에 실린 〈벌레들〉(《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에서는 재개발 지역 인근의 저렴한 빌라에서 신혼살림을 꾸리는 여성이 등장했다. 이처럼 김애란 소설들을 한 줄에 엮어 읽으면, 그 행로가 바로 이십대 초반과 이십대 중반, 이십대 후반 또는 삼십대 초반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성장 과정임을 알게 된다.
   〈벌레들〉은 88만원 세대가 결혼을 하고 신혼 거처를 마련해서 임신을 하게 된 시점을 다루었다. 아르바이트와 인턴, 구직 활동에 목숨 걸던 그들이 간신히 결혼을 하게 된 이후의 생생한 감각적 리얼리티를, 우리는 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취방에서 원룸으로, 또 다시 변두리 전세 빌라로 방의 크기는 넓어졌으며, 고독하게 혼자 쓰던 방은 이제 부부 둘이서, 아니 뱃속의 아이까지 함께 쓰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의 곤궁은 여전하다.
   정한아의 〈예언의 땅〉(‘문학동네’ 2013년 봄호) 역시 88만원 세대의 ‘어른 되기’를 다룬 소설들의 신호탄이다. 김애란의 <벌레들>에 나오는 신혼부부는 대학가의 아르바이트 청년에서 주거 조건이 가장 열악한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변두리의 재개발 지역에 사는 노동 계급이 되었다. 이에 비해, 정한아의 〈예언의 땅〉에 나오는 신혼부부는 한결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들은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서 ‘내 집 마련’의 꿈을 향해 달린다. 그것이 바로 행복한 중산층의 생에 주기를 이루는 전형적인 행동 양식이므로. “번듯한 직장과 30평형대 아파트와 중형 승용차를 후경으로 삼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4인 가구의 가족사진은 산업화가 가져다 준 물질적 풍요의 구체적인 표상이었다.”3) 


   그리하여 그들도 앞선 중산층 선배 세대들이 그리 했듯이, 아파트를 구입한다. 서울 근교 경기도에 삼십사 평형 아파트를 분양받는 것이다. 아파트 부지에는 “흙먼지밖에 날리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암시와 예언으로 가득한 땅으로 보였다.”(255면) 번듯한 아파트에서 중산층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희망찬 예감 때문이었으리라. 그 ‘암시와 예언’의 힘은 지독해서, “그후 아파트 중도금과 대출금 이자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눈을 가린 말처럼 달렸다.” 심지어는 “그 이 년 동안 그들에게는 휴가도, 명절도, 여행도 없었다.”(256면) 중산층을 향한 그들의 꿈은, 그러나 금세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대출을 받아 마련한 아파트 값는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고 아파트 입구에 개통될 예정이던 지하철 구간은 전면 백지화된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요컨대, 우리는 여기서 몇 년의 세월이 지나 88만원 세대가 ‘하우스 푸어(House Poor)’라는 이름표를 새롭게 다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박해천에 따르면,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도시의 집단 주거 공간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측면에 걸친 중산층의 성장 신화와 관련된다. 물론, 정한아의 <예언의 땅>은 이 신화의 종언을 알리는 문학적 징후이다. 작가가 속한 80년대생은 이십대 청춘을 비좁고 어두운 골방에서 ‘알바와 스펙 쌓기’에 골몰하면서 어려운 연애를 이어가다 결혼 이후에도 새로운 곤혹과 싸워야한다. 성장 신화는 이미 기대할 수 없는 먼 옛날의 이야기이므로, 그들에게 미래는 어둡다.
   이 전망의 부재는 임신에 대한 기피나 출산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난다. 김애란의 <벌레들>에서 정체 모를 벌레들의 출몰에 괴로워하던 주인공은 재개발 지역의 한복판에서 혼자서 극도의 공포를 감당한 채 출산을 앞두게 된다. 정한아의 <예언의 땅>은 어떤가. “아이는 나중에 가질 수 있지만, 아파트는 우리 눈앞에서 당장 사라질 것처럼 보였잖아.”(270면) 이 부부는 그런 이유로 아이를 없애려고 했다. 김애란과 정한아의 두 소설에서 이 젊은 부부들은 공통적으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임신과 출산이 행복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미래’를 낳을 수 있는 안온한 희망의 둥지를 찾을 수 없었다. ‘예언의 땅’은 그렇게 불모의 땅으로, 황량한 벌판으로 변하고 만다.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 불길한 미래를 예감하게 하는, 삶의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정한아 소설에 이 순간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눈으로 뒤덮인 바깥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방이 새하얀 벌판 같았다. 언젠가 지은은 영준과 손을 잡고 저 땅을 걸었다. 그때로부터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지은은 영준에게 묻고 싶었다. 얼어붙은 땅이 다시 녹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그 속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것이 삶인지, 죽음인지, 긴 잠인지, 아니면 곧 깨져버릴 꿈인지. (272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종언

 

   불행한 자만이 불행한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상처 입은 자만이 상처 입은 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세월이 흐르면서 오히려 절절히 통감(痛感)하게 된다. 물론, 전달되고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 어찌 타인의 고통뿐이랴. 나의 고통을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하고 이해와 공감을 얻는 일 또한 희소한 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나의 고통으로 비로소 너의 고통을, 나의 상처로 가까스로 너의 상처를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겨우’ 알게 되거나, 겨우 ‘아는 척’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김보현의 〈박쥐〉(‘계간문예’ 2013 봄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박쥐〉는 박쥐 모양의 데칼코마니처럼 어떤 두 부부의 불행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포개어져 있다. 물감을 한쪽에 바르고 반으로 접었다 펼치면 박쥐의 펼쳐진 두 날개처럼 대칭의 형상을 이루는 데칼코마니(decalcomanie) 말이다.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화장실에 박쥐가 있다는 회사 직원 ‘조’의 전화를 듣고 나섰다 박쥐를 찾는 수상쩍은 남자와 대면한다. 남자는 실은 아내를 찾고 있었다. 사고를 당해 건물 외벽 청소를 하지 못하게 된 남자 몫까지 열심히 일하던 아내가 실종되었단다. 남자가 아내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발견한 것이 벽면에 붙어 있는 박쥐들. 보통 사람들이라면 징그러워하거나 불길해 마지않는 이 날짐승에게서 남자는 기이한 상처의 연대를 맺는다.

 

   “처음에는 박쥐인 줄 몰랐어요. 왜 안 날아가지, 하고 관심을 갖고 살펴봤더니 안 날아가는 게 아니라 날지를 못하는 거였어요.”
   남자는 떨어진 박쥐의 몸을 만지작거리다가 날개 안쪽에 곰팡이가 슨 것처럼 불균질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박쥐는 새랑 달라서 날개가 상하거나 찢어지면 회복이 안 된대요. 수의사한테 그런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는데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젠다이를 타기 시작했어요.” (104면)

 

   남자는 날개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해 날지 못하는 박쥐들을 집으로 데려온다. 그는 벽에 붙어 있는 박쥐들에게서 문득 자신의 삶을 보았던 것일까. 남자와 그의 아내는 박쥐처럼, 벽에 붙어 가느다란 생을 이어왔던 것이다. 박쥐는 우리가 두루 알고 있듯이 야행성 동물이자 흡혈 동물이다. 그리하여 박쥐는 불길한 밤의 흡혈귀로, 기회주의적 배신자의 상징으로 공포, 그리고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작가는 기어이 그런 혐오스러운 동물로 분류된 박쥐를 날개에 상처를 얻으면 재생과 회복이 불가능한 가련한 동물로 재발견해 낸다.
   서술자인 ‘나’가 남자를 생각하며 저 가련한 박쥐들을 떠올린 적이 있다. “나는 수직 하강하는 붉은 선분을 바라보며 남자의 방을 상상했다. 찢어진 날개로 제 몸을 감싼 박쥐들이 검은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맺혀 있는 어둡고 습한 방.”(105면) 이 처량한 박쥐의 이미지는 이제 소설사에 새롭게 등재되었다. 다시 말해, 이 소설에서 박쥐의 저 회복 불능의 날개는 인간의 깊은 상처에 관한 은유다. 실제로 남자는 건물 지하 환기통에 거꾸로 처박힌 채 발견된 여자의 비보를 듣게 되지 않던가. 그 역시 박쥐의 날개처럼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를 얻게 되었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남자가 박쥐에게서 자신을 보았듯이, 남자의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나’ 역시 박쥐에게서 자신을 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박쥐의 흉한 얼굴을, 박쥐의 퇴화된 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눈빛을 발견한다. “저 검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뭔가를 볼 수 있다면, 그 눈으로 본 나 역시 저렇게 흉하고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107면) 그렇다. 그녀 역시 남자처럼 아물지 않는 날개의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처는 박쥐를 돌보던 남자의 상처와 정확히 대칭되는 지점에 있다. 그녀의 남편은 자살을 시도하며 한강에 뛰어든 생면부지의 사내를 구하고 자신은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남편이 강물 깊이 가라앉을 때 그녀의 삶 역시 함께 가라앉아 버렸다. 이 부부가 이미 도시의 우울이 선사하는 기묘한 “안온함”(110면)에 중독되어 살아왔다 해도 그녀가 느끼는 우울의 깊이를 완성시켜 준 것은 분명 남편의 죽음이었으므로. 어쨌거나 남편은 죽고 남편 대신 한 사내가 살아남았다. 제 삶을 강물 속에 흘려 버리려던 사내였다. 그러니 그 또한 박쥐의 상처를 지닌 자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사내는 증오의 대상이자 남편이 세상에 남기고 간 일종의 유언이자 대리인이다. 그녀가 그 사내 ‘조’를 굳이 온라인 쇼핑몰의 직원으로 고용한 까닭은 처음에는 의아하지만 그래서 이해가 된다. ‘나’의 고백에 의하면, ‘조’는 “포로”이자 “인질”(115면)로 사로잡힌 자이다. 아물지 않는 박쥐 날개에 핀 곰팡이처럼 상처를 가리면서 상처를 상기하게 하는 존재.
   죽음과 죽음, 그리고 그 죽음들이 남기고 간 깊은 슬픔들이 바로 이 소설을 이루는 주된 정념이다. 그러고 보니, 작가의 등단작 〈고니〉(‘자음과모음’ 2011년 겨울호)에 이어서 이번 작품 역시 상실과 애도의 서사다. 〈박쥐〉는 저마다 아물지 않는 상처들을 간직한 채 겨우 살아가는 자들이 서로를,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 속에서 허우적거리지만, 그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를 진정으로 알게 하는 가느다란 끈일 수 있다. “자기와 연민과 자기 연민”(110면) 속에서 살아가던 여자는 날지 못하게 되어서야 타인을, 타인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얕은 꿈속에서 나는 남자가 창문 밖에 매달려 유리를 닦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았다. 남자의 노래는 끝없이 이어 붙으면서 버글버글 부풀어 올라 온 도시를 뒤덮었다. 남자의 정수리에 박쥐가 날개로 제 몸을 감싸 안은 채, 흡사, 볼링 핀과 같은 모양으로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흘러내린 담요를 추켜올리며 칼 맞은 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었으니 한, 두 번 더 깨어나더라도 곧 날이 밝을 거라고 발밑의 검은 강이 유언처럼 속삭이는 것 같았다. (115면)

 

   상처를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 듣기 거북한 것은, 그 말의 진부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 말이 담고 있는 무책임한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야 한다. 타인의 상처를 발견할 수 있는 상처만이 아름답다.

 

 

 

1) 데스먼드 모리스, 김석희 역, 《털없는 원숭이: 동물학적 인간론》, 정신세계사, 1991.

2) 이 대목 역시 인류학자의 관점으로, 혹은 유전자의 논리로 읽어볼 수 있겠다. ‘다윈의 대답’은 이렇다: 심리학자인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신데렐라 이야기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부모, 즉 계모나 계부(이 책에서는 ‘의붓부모’로 번역하고 있다.)에 의한 자식 폭력이 친부모에 의한 것보다 100배나 높은 이유를 진화이론을 통해 다윈주의적으로 설명한다. 마틴 데일리·마고 윌슨 저, 주일우 역, 《다윈의 대답4. 낳은 정과 기른 정은 다른가?》, 이음, 2008 참고.

3) 박해천, 〈아파트, 가족 로망스의 제2막〉, ‘한국문학’ 2011 여름호. 인용은 박해천의 블로그. 

 

 

 

노 대 원(魯大元)  -------------------------------------------------

   평론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 전공.  동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7년 제6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부문 수상.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