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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13년 가을호, 책머리에] 결실의 계절과 소멸의 미학 - 이태동(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신아미디어 2014. 1. 6. 08:35

"가을에 피는 꽃이 애잔한 이별의 슬픔을 나타내면서도 유난히 짙은 향기와 더불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려는 초월적인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을은 슬픈 계절이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새롭게 발견할 때, 가을은 더 아름다운 계절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결실의 계절과 소멸의 미학     /  이태동(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천둥과 먹구름, 불타는 태양의 계절인 여름이 가고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왔다. 문밖으로 나오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황금 들판은 우리를 넓은 공간으로 안내한다. 날씨 좋은 날 기차라도 타고 집을 떠나 조금만 더 멀리 나가 보면 가을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새로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자줏빛 산기슭을 따라 흐르는 강은 맑은 물로 빛나고, 햇빛 쏟아지는 들판은 농부들의 가을걷이로 바쁘다. 과수원에서는 능금이 붉게 익어가고, 포도나무는 결실의 열매로 무겁다.
   그러나 가을이라는 계절의 풍요로운 뒤안길에는 겨울이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국화꽃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윽한 향기를 발하고 코스모스는 길섶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찾아오는 겨울의 비극적인 죽음을 예견하듯 애잔한 슬픔을 머금고 서 있다. 시인 한용운이 <님의 침묵>에서 뜨거웠던 생명력이 소멸되어가는 가을 풍경을 이별의 형태로 노래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서인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시인은 여름 동안 무성하게 자라던 생명력이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짙은 향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슬픈 현상에 깃들어 있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왜냐하면, 꽃과 결실의 계절인 가을은 다가오는 겨울이 맞이하게 될 죽음이라는 별리別離의 아픔 속에 남겨질 씨앗들과 함께 미래의 만남을 약속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못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 만큼 어여쁠 것입니다.


   “떨어지는 꽃,” 지는 해의 낙조, “못 마친” 노랫가락의 미묘함, “떠날 때의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떠나신 뒤의 …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없는 어여쁜 얼굴”은 모두 다 성숙한 결실의 계절이자 또한 소멸하는 생명과 이별하는 시간을 나타내는 가을의 미학이다. 이것뿐만 아니다. 가을이면 붉게 물들어  떨어지는 낙엽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뭇잎들은 숲 속을 산책하는 여인들이 책갈피에 넣어 간직해 두려고 할 만큼 곱게 물이 들어 땅 위에 떨어져 있다. 깊어가는 가을 나뭇잎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물들어 보이는 것은 식물학적인 현상이지만, 상상력을 가진 인간에게 그것은 죽음을 맞아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주고 있다.
   가을에 붉게 물들어 떨어진 나뭇잎들은 뿌리를 덮고 있는 흙 속에서 잘 썩어 다음 해에 나무를 더 푸르게 자라도록 만든다. 낙엽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흙으로 썩어 거대한 뿌리가 상징하는 초월적인 생명의 강으로 침윤되어 흘러들어 다시금 새롭게 변신하여 재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용운이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영국 시인 존 키츠가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성숙의 결정”이고 “미의 극점”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키츠가 가을에서 “변화 과정과 [원초적] 정지 상태의 결합”을 발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나뭇잎은 사멸이라는 비극적인 과정을 통해 거대한 뿌리에서 숨 쉬고 있는 원형적 진실을 나타내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오지 않았던가.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 역시 비록 이미지의 사용은 달리하고 있지만, 개체적인 삶과 역사의 진행 과정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나룻배와 행인〉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신의 그림자를 품은 생명, 즉 영혼을 지닌 존재의 움직임과 그 진폭을 탁월한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행인이 흙발로 짓밟듯이 고통스러운 육신 속에서 시간의 강을 건널 때까지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신이 ‘나그네’라면, 그를 싣고 강을 건너는 나룻배인 ‘나’라는 존재는 생명력을 순간적으로 가진 인간임에 틀림이 없다. ‘나’라는 개체는 ‘행인’이 가는 방향이 진리를 찾는 길이라고 믿고, ‘나그네’를 싣고 그와 함께 강물을 건넌다고 함은 자신은 사멸하지만, 역사 속에 자신이 살아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지만, 역사를 관통해서 흐르는 거대한 생명의 흐름 속에서 호흡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는 역사적인 움직임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록 추상적이지만 모든 사물은 정지되어 있지 않고 변화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무엇인가 이루어간다고 말했고, 에드먼드 후설 또한 모든 사물의 움직임에는 상호 간의 관계 속에서 진리를 실현하려는 인간의지가 담겨있고, 그것은 의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말했다.
   가을에 피는 꽃이 애잔한 이별의 슬픔을 나타내면서도 유난히 짙은 향기와 더불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려는 초월적인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을은 슬픈 계절이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가 그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새롭게 발견할 때, 가을은 더 아름다운 계절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