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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수필] 호박꽃 - 김신희

신아미디어 2013. 11. 29. 08:14

"누가 호박꽃을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하는가? 그 큰 꽃봉을 활짝 터뜨려 충만함으로 삶을 노래하지 않는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목일 뿐인 게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아름다우면서도 수더분한 자태로 호박꽃은 아름답다."

 

 

 

 

 

 

 호박꽃     /  김신희

 

   비 내린 유월의 아침, 싱그럽게 다가오는 풍경 하나가 있다. 고향집 앞마당에서 보았던 호박꽃이다. 분칠한 듯 노랗게 피어 있는 담장의 호박꽃에는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이 눈부셨다.
   어머니는 벌써 울 밖의 남새밭을 둘러왔다. 비가 아니어도 어머니의 하루는 늘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긴 하지만, 간밤에 내린 비에 어머니는 동동걸음을 치셨다. 이럴 때는 가족들도 덩달아 말이 늘고, 말소리가 높아진다. 아침을 준비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음은 마당 저편 담장에 가 있는 듯, 아니 벌써 몇 번이나 종종걸음을 치셨다. 밤새 두어 길이나 넘늘어진 호박넝쿨을 걷어 얹기 위해서다. 어제까지만 해도 잔걸음을 치던 호박넝쿨이 밤새 담장을 덮은 때문이었다.
   잎이 심장처럼 생긴 이 ‘박’과의 한해살이 식물도, 여느 식물과 마찬가지로 주인의 발소리를 밝히는 식물이다.
   앞마당 볕이 잘 드는 담장 아래와 사랑채 추녀 밑에서 뿌리를 내리고 순이 자라 넝쿨을 뻗을 때쯤, 어머니는 참나무가지나 대나무가지로 지지대를 놓아 주었다. 그러면 그것을 의지하여 담장을 타오른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건만 볼세라 들킬세라 그렇게 오른다. 그러다 비라도 만나는 날은 무성하게 담장을 덮었다. 어디 이뿐이랴. 남새밭이나 들머리의 척박한 땅에서 터 잡은 호박넝쿨은 자유분방하기가 그지없다. 특히 비를 만나는 날이면 남새밭 한 귀퉁이에서 가만가만 엎드렸던 호박넝쿨이 때를 만난 듯 기세를 부린다. 고추며 가지가 조랑조랑한, 밭고랑을 치고 드는 것쯤은 대수도 아니다. 그러니 영락없는 점령군들이다. 그러나 호박넝쿨이 아무리 기세를 부려도 어머니의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게 마련, 그러니 안팎으로 종종걸음을 칠 수밖에 없다. 
   “야들 좀 보게. 겁도 없이 어쩌자고 이렇게 무법천지를 만들었으까잉! 제 있을 자리를 알아야 할 것인디 말이여. 남의 땅을 넘보다니.”
   얼기설기 뻗어나 있는 남새밭에 호박넝쿨을 제 있을 자리로 옮겨주었다. 미처 손보지 못한 것에 대한 표현이나, 그런 어머니의 말 속에는 되새김을 하게 하는 무언가가 담긴다.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는 유쾌한 맛이다. 
   유월의 비는 이렇듯 내 유년의 고향 집 앞마당 풍경 속으로 나를 이끌어준다. 거기에는 동분서주하시던 어머니 모습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어머니가 아침상에 올릴 애동호박을 딴다거나, 호박잎을 딴다거나, 또는 밤새 내린 비에 담장을 벗어나 있는 호박넝쿨을 걷어 올리던 어머니, 그 부지런하기가 이른 아침에 피는 호박꽃을 닮아 아름답게 회자된다.   
   호박꽃은 여름 내내 우리 집 앞마당 풍경이 되어 주었다. 담장에 걸린 호박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간댕거릴 때, 똬리를 만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어머니였다. 미처 그러지 못했을 때는 매달린 그대로, 호박은 우리 집 앞마당만의 멋진 풍경이 되었다.
   여름에는 푸른 애호박을, 가을에는 황금빛 둥근 호박을 앞마당 담장 이엉 위에 척 얹혀놓는 여유, 삶이 막바지에 이르러 된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고지고를 줄기차게 사명감처럼 수행遂行하고 있었다.
   요즘 우리들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호박. 눈여겨보지 못하던 시절, 그러나 농촌에서 나고 자라, 이렇게 심성 곱고 순박한 호박을 심어 가꿔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삶에서 기억 될 만한 이야기 하나를 잃은 것은 아닐지…….
   더러는 넝쿨이 웃자라 우북해 보일 때가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줄기 마디마다에 스치기만 해도 눈물이 어릴 것 같은, 푸르고 실한 애호박을 발견하게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긴 여름, 애호박은 뜨겁고 지루한 삶의 한가운데 누워, 볕에 몸을 달구며 긴 기다림을 한다. 몸을 불리고 풍만한 몸매를 만들었다. 그리고 타는 듯 내리쬐는 가을볕에 요염하게 자태를 드러내어, 가을의 전령사임을 자랑하질 않던가.
   누가 호박꽃을 “호박꽃도 꽃인가.”라고 하는가? 그 큰 꽃봉을 활짝 터뜨려 충만함으로 삶을 노래하지 않는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안목일 뿐인 게다.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아름다우면서도 수더분한 자태로 호박꽃은 아름답다.

 

 

 

김신희  -------------------------------------------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오음계》 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