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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세상마주보기] 강벤 맥놀이 - 박종규

신아미디어 2013. 11. 11. 08:41

"그곳에 사람이 나와 있다. 어린 사람이! 그런데 꼬마는 허리를 굽히더니 무엇인가를 집어 우리 쪽으로 힘껏 던진다. 강 중간에 파문이 인다. 돌팔매다! 돌팔매의 파문은 차츰 사라지지만, 꼬마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이 안쓰러운 파장을 만든다. 둥둥둥 두둥! 내 가슴속 피돌기가 빨라진다. 맥놀이가 다시 시작된다."

 

 

 

 

 

 강벤 맥놀이     박종규


   둥둥둥둥둥~.
   차창 밖 강변 마을은 비색의 벼랑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움직이는 것은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물뿐, 강변엔 적요만 가득한데 홀연 잔잔한 북소리가 강물을 건너온다. 오랜 세월 쌓아온 퇴적층은 넓은 모래땅을 형성하였고,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판잣집들이 몸 부대껴 들어앉았을 것이다. 집들은 하나같이 잿빛이나 버드나무까지 타오르는 모래톱의 풀 이끼, 봄을 피워낸 벚나무, 전설이 묻어나는 암벽의 동굴 등 경관의 수려함에 넋을 빼앗기고 만다. 이 풍광을 먼발치에 있는 그림으로만 보기엔 너무 아깝다. 중국 단둥에서 시작한 압록강 탐사 일정은 백두산 턱밑까지 다다랐으나 이처럼 멋진 풍광은 흔치 않았다. 버스가 잠시 멈춘다.
   -선새앰들, 보천군의 보안서장이 탈북했다 잽니까.
   나는 안내인의 북한 말투를 애써 떨쳐내며 벼랑바위 주변에 시선을 고정, 상상의 노둣돌을 놓기 시작한다. 초가 누각을 세울 만한 자리가 몇 군데 보인다. 커다란 바위들 틈새에는 흔들다리를 놓아 이음줄을 삼을 것이다. 둥둥둥~ 점점 커지는 북소리의 리듬에 따라 잿빛 판잣집들을 하나둘 지워나간다. 땅을 아래로 비스듬하게 파 내려가 계단식 객석을 만든다. 고대의 원형극장에 초가를 씌운 것 같은 조가비 모양의 무대가 벼랑바위 배경에 안기면서 마을 터는 제법 큰 공연장으로 바뀐다. 그곳에 훌쩍 나를 옮긴다. 토사를 밟는 감각이 눈 덮인 새벽길을 걷는 듯 새롭다. 공연장 좌우에는 작은 초가들을 올망졸망 앉힌다. 저녁에는 쏟아지는 별빛 아래서 난타페스티벌이 펼쳐질 것인데 타악기의 경쾌한 리듬은 벼랑바위를 타고 올라 고요 속에 잠든 별 무리까지 흔들어 깨울 것이다.
   둥둥둥 두둥둥!
   북소리는 고조되어 병풍바위에 메아리친다.
   -량강도 보천군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로 유명한 곳입미다. 량강도에서는 보안서장이 탈북한 기이, 어저는 당 간부들두 탈북하는 정돔니다.
   통일을 이룬 미래의 아침, ‘강변 공연장’은 이미 동북아의 명소가 된 것일까. 중국은 물론 러시아, 일본인들까지 관객들이 차츰 불어나고 있다. 공연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강변을 산책하노라니 강물 소리가 소소하다. 강물은 통일 이전부터 이곳에서 피고 진 인적人跡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아이들의 물질 소리, 장작 패는 소리, 봄을 일구는 쇠스랑 소리, 고통 속에 살아갔을 모든 소리까지 물살에 섞으며 흘렀을 반토막 세월이 역사 속으로 흘러든다.
   둥둥둥둥 두둥둥!
   공연장 주변을 맴돌던 북소리가 불기둥처럼 밤하늘로 번져 오른다. 객석이 많이 채워진다. 조금 있으면 타악기들의 두드림이 이 땅을, 강물을, 밤하늘을 일깨워 하늘 밖까지 고동칠 것이다.
   “문제는 탈북 김미더.”
   탈북, 탈북! 안내인 조 선생의 쉰 소리에 시나브로 북소리가 사그라진다. 이제까지 만들어 놓은 공연장 이미지마저 서서히 지워지고 있다. 하지만 북소리는 내 가슴으로 파고들어 이내 나의 고동 소리가 된다. 맥놀이다!
   나는 상상의 공간을 빠져나왔으나 여전히 강변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마을은 줌 아웃되어 다시 차창에 갇히고 있다. 널빤지로 야트막하게 둘러친 판잣집의 담장이 다정하다. 그 너머 마을에 제법 큰 가옥이 있다. 그러나 공연장이 사라진 너른 들판은 여전히 적막뿐, 사람이 없다. 강변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강물만이 기척 없이 흐르고 있다. 그 안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리고 있을지 모른다. 넓은 실내에 풀 죽은 주민이 모여 있고, 김일성 부자 사진 앞에는 인민복 차림의 한 사내가 눈을 부라려 연설을 하고 있고…….
   - 조 선생, 마을에 사람들이 보이질 않아요!
   - 그러기다 말임메다. 탈북, 요거이 문제 김미더. 요즘은 만두 몇 개를 얻자구 여자들이 중국에 건너가 몸을 파는 정돔니다. 상품가치가 있는 뺀뺀한 여자들은 차 운전 칸 안에 태우구 나이 든 여자는 운전 칸 우에 태웠는데, 추바서 고새 얼어 죽었던 김니더.
   너무 커버린 나무는 누리에 뿌리를 뻗쳐 위세가 등등하다. 나무가 쇠하기 시작하면 잔뿌리들은 생존을 위해 더욱 필사적이 된다. 잔뿌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은 민중의 몫이다. 장기 집권의 폐해다. 남쪽은 그걸 민주화로 막아냈다. 전세계의 독재국가가 그 길에서 돌아섰다. 어두운 과거의 잔상들이 오렌지빛 햇살로 씻겨나가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얼마 전 한 탈북 인사는 북한에서의 인민들에 의한 오렌지 혁명 가능성이 영 프로라고 잘라 말했다.
   - 선새앰들은 일찌감치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슴더. 압록강, 두만강의 상처를 보듬어서 한 동포의 정을 나누며 사는 풍요한 강벤 마을로 만들어야 할 소명이 선새앰들한테두 있다구 생각함다.
   조 선생은 압록강의 기적을 꿈꾸고 있다. 우리가 돌탑을 쌓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그 길을 가다 보면 때가 올 터이고, 굳이 통일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풍요로움은 남북을 하나로 이어 주는 필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저기 좀 봐요, 꼬마가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아요!”
   일행 중 누군가 반갑게 소리친다. 아, 그곳에 사람이 나와 있다. 어린 사람이! 그런데 꼬마는 허리를 굽히더니 무엇인가를 집어 우리 쪽으로 힘껏 던진다. 강 중간에 파문이 인다. 돌팔매다! 돌팔매의 파문은 차츰 사라지지만, 꼬마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길이 안쓰러운 파장을 만든다.
   둥둥둥 두둥! 내 가슴속 피돌기가 빨라진다. 맥놀이가 다시 시작된다.

 

 

비색: 청자색 / 임미더:입니다 / 어저는: 이제는 / 김니더: ~것입니다 / 이김다: 이것입니다 / 강벤: 강변의 입말

 

 

박종규  -----------------------------------------------
   한국문인협회 제도개선위원,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국제 펜 회원. <바다칸타타>표지화 퍼포먼스 60회차 진행 중. 경인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