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자상한 모습 그대로다. 그가 마지막 선택을 하는 심정이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는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선택을 비판할 생각이 없다. 다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한 후회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삶의 모퉁이를 돌 때면 아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들린다."
아우의 목소리 - 박범수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 목소리가 작은 데다 퇴근인파로 혼잡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역번호로 남쪽 지방에서 걸려온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작은 목소리는 K가 죽었다고 말한 것 같았다. 다음 정차역에서 내려 모임의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1990년대 초반 회사 사정이 악화일로를 걸었다. 총무이사였던 나는 타개책으로 지방에 지사를 개소했다. 서울에 자리 잡고 살려고 하는 남쪽 지방 출신들을 모아서 내려갔다. 초행길인 그곳에서 아파트를 얻어 2년간 그들과 합숙생활을 했다. K는 서울에서 같이 내려간 창립멤버였다. 열 살이나 아래인 그는 사교적인 성격인데다 그곳 토박이여서 사무실의 중심 역할을 해나갔다.
퇴근 후 숙소 말고는 갈 곳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는 나에게 훌라나 포커 같은 카드게임을 가르쳐주며 형님은 연설은 잘하는데 잡기에는 왜 그렇게 약하냐며 웃곤 했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쯤 그는 서울여자와 결혼해서 살림집을 얻어 나갔다. 7명의 지사 창립멤버들은 모임을 만들어 봄, 가을로 만나왔다. 연장자이고 고참인 내가 형이 되었고 그들은 아우가 되어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내왔다.
두 달 전에 모임의 S가 전화를 했다. 급하게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김포공항 대합실에서 S를 만났다. S는 뜬금없이 K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의 의도가 불쾌했다.
“왜? K는 의리 있고 능력이 많은 사내야. 우리가 거의 20년을 만나왔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S는 평가 보증에 사고가 생겼고 사고의 책임이 K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현장조사보고서가 개발계획을 잘못 판단한 엉터리 서류인 줄 모르고 K가 결재를 했고 그로 인해 담보대출 회수에 사고가 생겼다는 것이다. 대출 손실액이 수십억이라고 했다.
S를 만난 얼마 후,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다. 후배들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K를 가운데 두고 후배들이 좌우로 앉았고 K 앞에 내가 앉았다. 나는 사건의 진상을 집요하게 물었다. 평가 전문가로서 현장조사보고서를 그렇게 쉽게 인정하고 서명할 수 있는지, 또 그 서류를 활용한 금융기관 담당자와 K는 어떤 친분이 있는지를 물었다. 내가 질문한 것은 후배들이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다른 후배들의 의혹이 정당하고 그 의혹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K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수십년간 평가업무를 해 온 사람으로서 그렇게 한 것은 나로서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K는 모두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에 당황했다. K와 헤어지면서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난 누구보다 아우를 믿어. 살다보면 귀신에 홀린 것처럼 꼼짝없이 당할 때도 있어. 이번 일은 상황 자체가 의심을 살 수밖에 없어. 부탁이야.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당당하게 대처해줘. 손해액은 별거 아냐. 후회 없게 행동하길 바라. 난 언제든 달려올 수 있어.”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해당 부동산을 답사한 후배들이 연락을 해왔다. 도저히 그 가격을 평가할 수 없을뿐더러 현장 직원이 조사한 이용에 대한 예측도 엉터리라고 했다. 해당 금융기관의 책임자와 대출받은 사람이 K의 오랜 지인이라는 것이 새롭게 드러났다. K는 누군가를 위해 회사 몰래 직원을 시켜 허위 평가서류를 만든 것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K는 자부심을 가진 당당한 사람이었다.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는 사실이 존재할 것만 같았다. 후배들과의 전화통화가 계속되었고 모두가 지쳐갔다. 사람들은 K를 불신했고 닥쳐올 재난을 걱정하며 K를 원망했다.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K가 전화를 했다.
“형님,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어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서늘하고 절박했다. 나는 사법적 판단을 받아 오해를 풀 때까지 현재의 고난과 굴욕을 견디고 무조건 살아서 헤쳐나가는 것이 동지들에 대한 예의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가 혐의를 벗는 유일한 길이었다.
K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어떤 조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며칠 후에 전화를 걸어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0대 때 선친은 전교조 활동을 했고, 5·16 후 구속되고 퇴직당했다. 전교조 집행부를 맡았던 둘 중 한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는 밑바닥 삶을 묵묵히 견뎌냈다. 판자촌에서 살면서 어머니의 야채 행상을 지켜봐야 했던 선친의 고통을 안다. 그래도 아버지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도움 받을 사람 하나 없는 남한 땅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은 고난의 강을 건너왔다.
소송에 휘말리거나 어떤 위기에 처하면 아버지 주변에 있었던 삶과 죽음을 떠올린다. 죽음도 삶도 산 자의 선택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누구도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K에게 힘주어 당부했다. 아우를 믿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결코 이 사건에서 도망가지 말라고.
영정 사진 속에서 K는 웃고 있다. 평소의 자상한 모습 그대로다. 그가 마지막 선택을 하는 심정이 가슴에 사무치게 와 닿는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선택을 비판할 생각이 없다. 다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못한 후회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
삶의 모퉁이를 돌 때면 아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들린다.
박범수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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