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상으로 출발하여 시인 이상으로 생애를 마감한 박제된 천재, 이상에의 추억은 이제 마무리를 요하고 있다. 나는 뉴욕시절에 이상의 미망인 변동림여사에게 이상 관련 증언을 공개하기를 부추겼다는 점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 연구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를 남겨두고 있다고 판단된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말한 바, 이상 관련 비밀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자꾸나.”"
박제된 천재의 비밀,
화가 이상과 시인 이상 / 윤범모
* 시인과 화가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 이상
그렇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박제된 천재’ 이상(1910-1937), 그처럼 비밀을 많이 간직하고, 게다가 비밀 관련 풍문을 많이 남기고 간 작가도 흔치 않다. 불과 27년이라는 짧은 생애, 그러면서도 그는 수많은 업적과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상, 그의 육신은 비록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어 많은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상, 과연 그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본고는 이상의 애초 희망직업은 문인이 아니라 화가였다는 점, 그리고 이상의 실체와 생애 후반부의 모습을 ‘미망인’ 변동림(김향안)의 육성을 통하여 재정리하고자 한다. 이상이 지닌 비밀의 실체 일부라도 재확인하고자 한 의도에서 출발하는 작업이다.
시인 이상의 소년시절, 그의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했다. 건축분야 자체가 미술의 한 장르임은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이상은 화가의 자질이 넘쳤고 실제 그림을 잘 그렸다. 이상의 소년기가 식민지 치하가 아니고 만약 평화시절이었으면, 어쩌면 그는 화가의 일생을 걸었을지 모른다. 그만큼 그의 문학세계는 미술적 요소와 공유되는 접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은 미술분야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경성공고 졸업 앨범에 이미 본명 김해경 대신 이상이라는 필명이 나오는 바, 이는 공사장 관련 기존 속설과 다른 부분이다. 절친한 친구인 화가 구본웅은 이상에게 졸업선물로 휴대용 미술 도구상자 즉 사생상寫生箱을 주었다. 이에 이상은 본격적 회화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감동했고,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아호를 상자의 상箱이라는 글자와 상자의 재료인 나무[木]를 넣은 성씨 가운데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이李씨를 선택하여 오늘의 이상李箱이 되었다는 것이다(구광모, 〈우인상과 여인상〉). 흥미로운 주장이다. 이상이라는 필명이 친구의 선물인 미술도구 상자에서 연유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회화작품은 자화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이상은 19세에 자화상을 그린 바, 몇 가지의 메시지를 전달한다(임종국, 《이상 전집》, 1956). 이 〈자화상〉은 경성공고 졸업반 시절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속칭 〈1928년 자화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화는 전해지지 않지만 흑백 도판에 의하면, ‘보다 큰 예술적 실험과 계획을 위한 포석으로서 일종의 페르소나 즉 연출된 가면일 가능성이 크다(김민수, 《이상 평전》). 이 자화상은 좌우대칭을 무시하면서 고뇌에 찬 소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려 했다. 왼쪽 눈의 동공은 그리지 않고 까맣게 처리한 것과 더불어 배경의 어둠과 얼굴 조명의 강렬한 명암 대비 등에서 그렇게 읽혀진다. 이상의 자화상, 정말 ‘화가 이상’은 ‘일을 저질렀다’. 그는 1931년 제10회 조선미전에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미술가를 위한 어떤 시설 하나 반반한 게 없었다. 즉 미술학교나 미술관은 물론 화랑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미술가들은 악조건 속에서 작가 활동을 해야 했다. 작품 발표 무대를 들라면 총독부 주최의 연례 공모전인 조선미전이 권위를 누리면서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같은 조선미전에 이상은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한 것이다. 이는 놀랄만한 ’사건‘이지 않을 수 없다.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생들은 졸업미전에 자화상을 의무적으로 출품하게 되어있었고, 이들 작품은 모교에 보존되어 있다.(식민지 시절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 43명의 자화상이 오늘날 도쿄예술대학에 보존되어 있다.) 흑백의 도판에 의하면, 이상의 입선작은 색채 실험이 두드러졌을 것 같다. 윤곽선 등 형태 묘사에 주력했다기 보다, 아니 이 부분은 오히려 소략疏略하게 처리되었고, 분방한 필치의 색채 구사로 작품의 특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 같다. 이상은 왜 자화상 그리기에 주력했을까. 이는 식민지 암흑기에 자연스럽게 생긴 자존의식의 발로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자아의식이 강한 화가일수록 자화상 그리기에 주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화 작품의 경우, 측면상이지만 《청색》지(1939)에 유고 형식으로 소개된 연필화 〈자화상〉은 정면상이다. 속필의 묘사력을 통하여 얼굴의 특징을 요점 정리한 이 소묘는 이상의 개성적 성품을 잘 보여준다. 이상은 박태원 초상 등을 그린 바 있다.
구본웅(1906-1953)의 유화 작품 가운데 〈우인상〉(1930년대)은 이상의 초상화로 알려졌다. 야수파 혹은 표현주의적 필치로 강렬한 인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파이프를 입에 물고 뭔가 불안한 듯 출렁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외형 묘사에 충실했다기 보다 주인공의 성격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다. 반면에 구본웅의 작가 입문시절의 조소작품은 매우 사실적 묘사에 치중했음을 알게 한다. 조선미전 입선작 〈두상 습작〉(1927)은 김복진의 영향을 짐작하게 하듯 사실주의적 정통성의 형상력을 담보한다. 이로서 보면 기왕의 주장처럼, 이상은 구본웅의 영향으로 미술작업을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구본웅의 단계를 넘어 현대예술의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내면화 단계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김민수).
구본웅과 이상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우선 이들은 신명학교의 입학동기이다. 구본웅이 네 살 연상이지만 이들은 친구 사이로 우정을 나누었다. 고교시절 화가지망생으로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는 공통점도 있다. 뒤에 이상이 다방 사업 실패를 연속하자 구본웅은 부친이 운영하던 인쇄소 겸 출판사인 창문사에 이상을 연결시켜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상과 구본웅, 이들 사이의 재미난 일화는 너무 많다. 키다리 이상과 꼽추 난장이 구본웅이 함께 길을 걸어가면, 동네 꼬마들이 곡마단 왔다고 소동을 피웠다. 구본웅과 이상의 사이에 변동림의 존재를 망각할 수 없다. 구본웅의 부친 구자혁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지만 몰락 양반가문이었다. 구본웅은 일찍 세상을 떠난 생모 대신 계모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계모가 바로 변동림과의 이복자매 사이가 된다. 즉 변동림의 부친 변국선은 구한말 중추원 참의직을 지냈는데, 후처에게 변동림을 얻었다. 그러니까 변동림의 이복 언니가 구본웅의 부친과 결혼한 바, 구본웅에게 변동림은 계모의 이복동생이 되고, 절친한 친구 이상의 부인이 되는 기묘한 사이로 발전했다. 이상/ 구본웅/ 변동림(김향안), 이들의 관계는 매우 흥미롭다. 이들의 인간관계는 예술세계로도 발전되어 1930년대 문화의 일단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의 미술작품 가운데 현대성 부분은 《조선과 건축》 표지 장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표지 도안 현상 공모에 입상한 이 디자인 작품은 현대적 감각에 의거한 개성적 작품임을 확인하게 한다. ‘화가 이상’의 작업 사례는 여러 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자신의 소설 〈날개〉(1936)의 드로잉이나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등이 그것이다. 〈날개〉에서 보여주는 독특한 표현방식은 동시대 화가 누구보다 앞선 실험성을 보이고 있다. 나신의 누워 있는 여체를 중심으로 하여 하단부는 세워진 책들로 패턴화하고 상단은 영문 글자로 아달린과 아스피린이라는 수면제 이름을 반복하여 표기했다. 소설의 내용을 짐작하게 하는 삽화이다. 박태원 소설의 삽화는 하융河戎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이상 작품이다. 연재 삽화 27점은 몽타주 기법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방식을 활용하여 개성적인 화면 경영을 일구었다. ‘화가 이상’의 숨은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시각 자료가 아닌가 한다. 시인 이상의 원형에 화가라는 장르의 존재는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이상의 작품세계에서 미술적 요소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음도 그 같은 지적을 하게 한다. 더불어 시화 일률의 전통성을 스스로 체현해 낸 이상의 또 다른 면모를 주목하게 한다. 시인 이상의 원초적 동경심에 미술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 이상의 미망인 변동림의 증언
1980년대 중엽, 나는 뉴욕에서 살았다. 매월 환기재단의 연구기금을 받았고, 또 주말이면 김향안 여사를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나는 김환기 평전 작업을 위해 김향안의 증언을 기록했다. (아쉽게도 이 김환기 평전 작업은 중도 하차했다.) 그러던 어느 날, 향안 여사는 여성잡지 《주부생활》을 보여주면서 몹시 불쾌하다고 말했다. 우선 노인의 얼굴 모습을 페이지 가득 차게 확대하여 게재한 것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불쾌하다고 했다. 시인 이상 관련 언급 자체부터 고깝게 생각했다. 하기야 많은 사람들은 시인 이상과 김향안과의 관계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추측에 의한 오류도 적지 않았다. 나는 향안 여사에게 차제에 이상 관련 증언을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향안은 단 한 번도 이상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증언한 바 없었다. 그는 오로지 김환기 사업에만 몰입했고, 또 그처럼 화가의 아내로서 모범적 삶을 경영한 여성도 보기 어려웠다. 향안은 번민 끝에 드디어 이상과의 추억을 공개증언하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회고하는 1930년대의 젊은 시절, 그는 시인 이상과의 짧은 결혼생활을 추억했다. 그 내용은 《문학사상》(1986)에 연재했다. 김환기 사후 12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이상과 변동림, 김향안은 변동림이 김환기와 재혼하면서 새로 얻은 이름이다. 그러니까 변동림(김향안)은 20세기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어 살면서 위대한 예술가 2명의 배우자로 기록되는 특별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상과 변동림, 이들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문학사상》연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변동림은 유년시절을 송현松峴 마루턱에서 살았다. 어떤 궁가의 커다란 집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출타중이었지만 아버지 서재에는 불상을 모셨고 가끔 좌선과 독경 소리가 들렸다. 변동림은 학교 가기 전에 천자문과 소학을 떼었다. 부친(변국선)은 도쿄에서 의대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고종말년 중추원 참의參議를 지내다 합병 이후는 무직으로 살았다. 변동림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아테네 프랑세를 몇 달 다니다 귀국하여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오빠는 친구와 동업으로 다방을 경영했는데, 이상과 친구였다. 변동림은 매일같이 커피를 마시러 오빠 다방을 출입했다. 변동림은 오빠의 소개로 이상을 만났다. 당시 이상은 밤색 두루마기의 한복 차림이었다. 이상은 한복 입기를 즐겼다. 후리한 키에 곱슬머리였고 수염은 항상 파랗게 깎았다. ‘언제나 수줍은 듯 사람을 그리는 듯 쓸쓸한 웃음을 짓는 모습과 컬컬한 음성’의 사나이였다. 특히 변동림과 만나던 당시 이상은 기침을 하거나 각혈을 하지 않은 ‘건강한 청년’이었다.
“나는 그 비슷한 허허벌판을 이상을 따라서 한없이 걸어갔다. 한없이 걸어간 곳에 방풍림이 있었다. 우리는 방풍림 숲 속을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나는 날마다 이상을 만났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거기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상을 만났으며 우리 집에서 나오면 부근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상을 발견했다. 만나면 따라서 걷기 시작했고 걸어가면 벌판을 지나서 방풍림에 이르렀다. 거기는 일경도 동족도 없는 무인지경이었다. 달밤이면 대낮처럼 밝았고 달이 지면 별들이 쏟아져서 환했던 밤과 밤을 걷다가, 걷다가, 우리들은 뭐 손을 잡거나 팔을 끼고 걸은 것이 아니다. 각기 팔을 내저으며 자연스러운 자세로 걸었다.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때로 내 말에 상은 크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숲속에 메아리쳤던 음향을 기억한다.
“동림이, 우리 같이 죽을까?”
“우리, 어디 먼 데 갈까?”
이것은 상의 사랑의 고백이었을 거다. 나는 먼 데 여행이 맘에 들었고 또 죽는 것도 싫지 않았다. 나는 사랑의 본능보다는 오만한 지성에 사로잡혔을 때라, 상을 따라가는 것이 흥미로웠을 뿐이다. 그래서 약속한 대로 집을 나왔다. 나를 절대로 믿는 어머니한텐 친구한테 갔다 온다고 거짓말을 하고 조그만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방풍림의 추억, 나는 김향안에게 구체적으로 방풍림 동네가 어디냐고 질문한 바 있다. 그는 청량리 밖 갈대 숲이 우거진 곳이라고 기억했다. 그곳이 즐겨 찾던 데이트 장소였단다. 하지만 신접살림은 동소문 밖, 그러니까 혜화동 고개 너머 당시만 해도 외진 변두리였다. 아무튼 이상과 변동림은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벌판을 지나, 방풍림을 지나, 개울이 있고 언덕이 있는 곳, 그 개울가의 조그만 집을 신방으로 차렸다. 동소문 밖이었다. 이상은 이미 신부를 위해 기본생활 도구와 침구를 마련해 놓았다. 이상과 변동림의 결혼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낮과 밤이 없는 밀월을 즐겼다.’ 이상은 며칠에 한 번씩 시내 출입을 했고, 들어오는 길에 장을 보아왔다. 밥 짓는 일과 빨래는 아내가 맡았고 반찬 만드는 것은 남편이 맡았다. 이상은 소 내장 요리를 좋아했지만 신부는 간 천엽이나 곰탕을 먹지 못했다. 밀월이 계속되는 동안 서울에서는 ‘이상의 스캔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이 변동림을 유혹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변동림은 이상을 좋아해서 따라간 것이고 곧 도쿄로 떠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양가의 어머니들이 서둘러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주선했다. 1936년 6월 초순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0월에 이상은 일본으로 갔다. 그러니까 이상과 변동림의 결혼생활은 ‘3개월 남짓’에 불과했다. 이상에게 있어 도쿄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이상이 도쿄로 떠난 후 변동림은 빚을 갚기 위해, 일본행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는 바에서 일을 했다. 그 바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곳이었다.
* 이국에서의 최후, 이상의 요절
이상은 도쿄역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한 진보초[神保町] 이시카와[石川]에 숙소를 정했다. 이 지역은 고서점이 즐비한 곳이면서 전위예술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이상의 하숙집 방은 ‘해도 들지 않는 이층 북향으로 다다미 넉 장 반밖에 안 되는 매우 초라한 것’(이진순)이었다. 그러니까 이충렬의 김환기 평전인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013)에 “신혼생활은 이상이 신주쿠[新宿] 부근에 있는 김병기의 자취방으로 떠난 9월까지 석 달 남짓 이어졌다”라고 기술한 부분은 오류이다. 이상은 김병기의 자취방에서 체류하지 않았다. 나는 1980년대 뉴욕 사라토가의 김병기 자택에서 여러 날 묵으면서 김병기 일생을 녹음 취재한 바 있다. 김병기는 고희동, 김관호에 이은 서양식 유화 도입의 세 번째 화가인 김찬영의 아들이다. 그는 미술계의 중심부에서 많은 일을 했기에, 특히 1930년대 도쿄 유학생 사회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증언은 시사하는 바 적지 않았다. 그의 증언 가운데 이상 관련 부분의 녹취록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공개한다.
“주요한의 막내동생 주영섭朱永涉은 나의 친구로 가깝게 지냈는데, 동경에서 유치진의 작품을 연출한 적이 있었다. 그가 학생극예술좌 대표격으로 연출을 하고 내가 무대장치를 했다. 동경만 바다의 매립지에 세운 400석 규모의 축지 소극장으로 일본 신극운동의 메카같은 곳이었다. 김동원金東園, 이해랑李海浪, 이진섭李眞燮 등도 참여했다. 주영섭은 한국인 동경예술좌 대표로 리더쉽이 강했다. 나는 유치진의 〈소〉, 〈춘향전〉, 주영섭의 〈나루〉 같은 공연의 무대장치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동경에 와서 포스터를 보시고 연극하려느냐고 야단쳐서 그만두게 되었다.
한번은 주영섭의 친구인 이상李箱이 내방에서 자고 갔다. 이상은 주영섭과 가까웠고 그를 방문한 김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웃지 않았고 눈이 빛났는데 50대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내 침대를 그에게 내주고 나는 바닥에서 잤다. 그런데 그는 신경쇠약 환자같이 처마 밑 빗방울 소리를 세느라고 한잠도 못 잤다는 것이었다. 그는 빨간 바탕에 동그라미를 그린 내 그림을 보고 재미있다고 평했다. 당시는 새롭고 이상한 것을 보면 ‘재미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는 나중에 후데이 센진[不逞鮮人)]으로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가 죽었을 때 우리가 그의 장례를 치루었는데, 부인이라고 온 사람이 나중에 수화(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金鄕岸: 본명 卞東琳)이었다. 우리는 수화에게 한 번도 이상李箱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김향안을 보면 나는 장례식 때의 한국 시골 처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장례식은 가부라자까의 어느 일본인의 집에서 치루었다.”
김병기의 이상 추억, 이상은 빗방울 소리를 세느라고 한잠도 못 잤다는 것, 흥미로운 증언이다. 손님으로 와 주인의 침대를 차지하고 잔 이튿날 아침의 일성, 그것은 빗방울 소리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는 것, 이상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의 사망과 김향안의 존재, 그리고 친구 사이인 김환기와의 관계, 이들의 우정과 질곡은 또 다른 장을 요구한다. 아무튼 도쿄에서의 이상 사망, 그 언저리의 변동림 증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상하고 결혼했다. 50년 전에. 그 우리의 결혼생활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서울을 떠나서 성 밖에 멀리 나가서 밀월을 지냈기 때문에 3개월 후 임시 시내에 머문 것은 이상을 먼저 동경으로 떠나보내기 위해서고 뒤따라 들어갈 준비로 내가 직장(바-)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공부하고 싶은 욕망으로 동경행을 계획했고 그때 양가의 부모의 희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동경에 건너간 이상한테서는 도착한 소식 이후 편지가 없었다. 두 달도 훨씬 넘었을 무렵 동경 간다[神田] 경찰서 검인이 찍힌 노란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이상의 필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사실과 시말서를 썼는데 명문이라고 경관들이 감탄한다는 사연뿐이었다. 김해경金海卿이란 본명 이외에 이상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영어와 러시아 말을 공부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 왜경들은 반일反日 조선인 지식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구속했던 거다. 한 달 넘어 갇혀 있는 동안에 이상은 건강을 상했고 폐병이 재발했다. 그래서 간신히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동대東大 부속병원에 입원된 통지를 받고 나는 동경으로 건너갔다.”
변동림은 12시간 기차를 타고 8시간 연락선을 타고 또 24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도착했다. 다다미가 깔린 동경대 병원 입원실, 이상은 거기 누워 있었다. 변동림은 무릎을 꿇고 이상의 손을 잡았다. 이상은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변동림은 이상의 귀에 대고 묻는다. “무엇이 먹고 싶어?” 이에 이상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대답한다. “셈비끼야[千匹屋]의 메론”, 변동림은 메론을 사 와서 깎아 주었지만 이상은 받아 넘기지 못했다. 향기가 좋다고 미소를 짓는 것 같았지만 끝내 메론을 먹지 못했다. 담당 의사는 변동림에게 내일 아침 11시쯤 운명할 것 같으니 내일 아침에 오라고 말했다. 이에 변동림은 이상의 숙소에 가서 잠을 자고 이튿날 아침 병원 입원실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환자의 옆에 앉았다. 하지만 이상은 눈을 뜨지 않았고 변동림은 의사가 운명했다고 선언할 때까지 식어가는 손을 잡고 있었다. 이상은 그렇게 운명했던 것이다. 조우식, 주영섭, 김소운 같은 몇몇 유학생들이 유해실에 들렸다. 데드 마스크도 떴다. 그리고 며칠을 걸쳐 복잡한 수속을 밟고 유해를 받아 귀국하여 미아리 묘지에 안장했다. 비목碑木에 묘주 변동림이라고 기입했지만 그 이후 변동림은 단 한 번도 이상 무덤을 찾지 않았다.
이상의 임종, 이렇게 한 천재 시인은 이승을 떠났다. 이상의 데드 마스크는 화가 길진섭이 석고상으로 만들었다. 길진섭은 33인 길선주 목사의 아들이다. 석고 작업할 때, 굳은 석고를 벗기니 망자의 수염 여남은 개가 뽑혀 나왔다. 사망진단서를 떼기 위해 입원료를 청산해야 했다. 이를 김소운이 해결했다. 김향안의 증언에 의하면, 이상의 유품 일체를 시집의 가족에게 전달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의 여동생(김옥희)의 증언에 의하면, 가장 찾고 싶은 유품 가운데 오빠의 유고와 데드 마스크라고 했다. “오빠가 돌아가신 후 임이 언니는 오빠가 살던 방에서 장서와 원고뭉치 그리고 그림 등을 손수레로 하나 가득 싣고 나갔다는데 그 행방이 아직도 묘연하며, 오빠의 데드 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에서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님에게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이들 유품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화가 이상의 초기 작품은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시인 이상의 마지막 흔적은 데드 마스크, 역시 자신의 자화상을 타인의 손에 의해 제작하게 했다. 자화상, 이는 자존의식이 강한 예술가의 대외적 발언의 하나이다.
* 날개야 다시 돋아라
“글 속에 나오는 통속성, 유치한 연극, 이것은 이상의 잡문 속에 나오는 상례인 엄살(여성에 대한)이다. 나는 이러한 이상의 글을 싫어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독자)은 아내였던 변동림을 의심했다. 오늘까지도 이상 연구자들은 삼각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삼각관계는 부재라는 것은 시일을 따져 봐도 증명되지 않는가? 나는 오랫동안 상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한 이상의 작품이 나에게 불쾌한 유산으로 남겨짐으로써, 나의 남편이었던 이상에 대한 반세기의 무관심이 지속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을 용서했다. 용서하지 않았으면 나는 재혼하지 않았다. 이상은 시인이다. 소설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상의 시 〈오감도〉는 세계적 수준에 이른 탁월한 시라고 하는 믿음은, 그때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상의 잡문들은 고매한 시 정신에서 대단히 멀어져 있음을 느낀다.”(김향안)
이상의 아내 변동림의 내면풍경, 그것은 회한과 무관심의 점철이었다. 특히 이상의 소설에 나오는 퇴폐적 아내의 모습을 마치 변동림과 중첩시키는 시각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한다. 자신이 만난 이상은 건강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문학평론가의 평가를 인용한다.
“각혈을 하는 빈털터리 이상과 결혼한 것은, 이화여전을 나온 모던 걸 변동림으로서는 큰 모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변동림은 어쩌면 자기 힘으로 그를 재생시키려는 엄청난 내기를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아픈 남자를 양육하기 위해, 바에 나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궁지에 몰린다. 그리고 이상은 아내의 남자관계에 대한 의혹에 갇혀서 지옥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가 동경에 가서, 정조관념이 없는 모던 걸을 주인공으로 한 자전소설들을 썼다. 그러면서 거기 나오는 모던 걸 ‘임姙’이 위에 아내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키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일은 오만한 여인 변동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그녀는 마지막 날까지 그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못했다. 어쩌면 이상은 그저 일본의 모더니스트 류탄지 유[龍膽寺雄]가 그린 〈마코魔子〉 같은 파격적인 모던 걸의 한국형을 형상화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변동림은 이상이 사귄 첫 모던 걸이다. 이상은 그녀를 연모해서, 그 앞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한다. 처음 만나던 날, 씻지 않은 손으로 설탕통의 각설탕을 자꾸 꺼내 새까매지도록 만지작거려서, 여급에게 핀잔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런데 그녀가 조건 없이 투항해오자 이상은 갑자기 의처증 환자로 변한다. 시골 술집의 작부와 놀 때에는 여자의 정조에 대하여 초탈해 보였는데, 그의 성적 결벽증을 일깨운 것은, 상대방에 대한 콤플렉스였을까? 아니면 잠재해 있던 가부장적 관념의 부활이었을까? 19세기와 20세기가 동거하는 그의 난해한 여성관 이중성의 연장선상에 이상의 문학세계가 있다. 은장도도 쓰기 나름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환기는 결혼경력까지 있는 김향안을 헌신적인 아내로 업그레이드시켰는데, 이상은 그녀가 죽도록 노여움을 풀 수 없는 상처만 주고 갔으니, 남편으로서의 이상은 내가 보기에도 평점이 아주 낮다.”
-강인숙, 〈2010 이상李箱의 방〉, 영인문학관, 2010
이상 사망 반세기가 지날 무렵 김향안은 이상 문학비를 건립했다. 이상을 위한 유일한 모뉴멘트이다. 이에 앞서 변동림은 화가와 재혼했다. 1944년 5월 변동림은 김향안이 되어 화가 김환기와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인 시인 노리다케의 소개로 만난 이들은 예술가정의 탄생을 예고했다. 둘 다 재혼인 이들 커플은 한국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대장정의 거보를 내딛게 되었다. 김환기의 뉴욕시절, 무수한 점을 찍은 화면들, 예컨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같은 작품은 점화點畵의 예고편이었다. 이 작품은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염두에 두고 그린 것이다. 무수한 점들, 밤하늘의 별과 같은 점들, 이같은 점화 시리즈를 두고 김민수는 이상의 시 〈선에 관한 각서〉에 나타난 사각형 내부의 사각형으로 분화되는 구조적 특징과 관계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니까 이상의 시에서 표현된 점이 김환기의 그림으로 부활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니, 한걸음 더 나가 한국 최초의 추상 점화를 그린 사람은 김환기가 아니라 이상이라는 주장이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다. 그러니까 김환기는 생애의 마지막 부분에서 변동림과 이상이라는 두 점을 잇는 선이 되어주었다는 것, 흥미롭다. (김민수, 《이상평전》, 2012)
화가 이상으로 출발하여 시인 이상으로 생애를 마감한 박제된 천재, 이상에의 추억은 이제 마무리를 요하고 있다. 나는 뉴욕시절에 이상의 미망인 변동림여사에게 이상 관련 증언을 공개하기를 부추겼다는 점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 연구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를 남겨두고 있다고 판단된다. 비밀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다고 말한 바, 이상 관련 비밀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윤범모 -------------------------------------------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등단(1982), 호암갤러리(삼성미술관 전신)/서울 예술의 전당 미술관/이응노미술관 개관 팀장, 광주비엔날레 창립 집행위원 겸 특별전 큐레이터,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한국미술품감정가협회 회장, 사우스 플로리다대학교 연구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시집 《불법체류자》 출판(1988), 〈시와 시학〉 신춘문예 당선(2008), 시집 《노을씨, 안녕!》, 《멀고 먼 해우소》, 저서 《김복진 연구》 외 다수. 현재 시와시학시인회 회장,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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