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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L-Museum-Holic -문학관에 빠지다·②] 채만식문학관 현실, 슬픔이 걸어나오다 - 유민자

신아미디어 2013. 9. 24. 07:54

"문학은 인간의 삶속에서 헐벗은 마음을 위로한다. 지쳐서 미쳐가는 우리네 삶을 올곧게 세우는 힘이 있다. 아이러니한 풍자를 앞세워 호방하게 웃게 만들어주고, ‘마음 힐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삶의 허기를 채우게도 만든다. 멍든 가슴에 생기를 뿌려주며 위안을 받는, 문학세상이다. 살면서 정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 건강한 오늘을 밀고 당기는 것이, 문학의 힘이다. 문학의 텃밭은 우주를 넘나드는 위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아낌없이 씨 뿌린 작품들의 밭두렁 사이로, 원고지의 여백 사이로 스러져 이승으로 떠난 작가 채만식. 일제말기 가난으로 눈물을 찍으며 혹사당한 정신적인 굴절 덕분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친일작가 논란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작가. 가난한 일상 속으로 자신의 생명줄보다 원고지 한 권을 귀히 여겼던 문필가 채만식. 아픔에서 빛을 일군 작가의 생애가 여울져 보인다."

 

 

 

 

 

 

 

 채만식문학관
 현실 , 슬픔이 걸어나오다    유민자

 

 

   채만식을 찾아가는 길은 어려웠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꺾으며 그를 찾았다. 그렇게 채만식은 교과서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어제의 역사는 오로지 작품을 통해서만 들여다보라며 인사를 청하는 듯 했다.
   그는 민족사의 아픔을 역사의 구비마다 생생히 그려낸 리얼리즘 작가였다. 《탁류》, 《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소년은 자란다》 등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거친 한국근대문학의 대표 작품을 쏟아냈다. 전통과 근대의 경계선에서 그가 기록한 문학적인 삶은 치열하게 민중 가까이 있었다. 채만식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의 속살로 보여 주었다.

 

   마음에 없는 의를 부르짖으며 뜻에 없는 논論을 함이, 어찌 마음에 없는 노래를 부르며 뜻에 없는 웃음을 웃는 창부娼婦와 다름이 있으랴. 창백한 인텔리의 지적 매음賣淫이여! 나는 내 자신을 이렇게 저주한다. 차라리 ‘쇠사슬 이외에는 더 잊을 것이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숙명에 자족하는 충견…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운은 결정이 되었다. 남은 것은 시간이다. 나는 맹세한다. 목숨으로서 현재와 양립치 아니하기를 맹세를 한다.

-호연지기(채만식의 필명),
수필 〈속임 없는 고백, 나의 참회-잡지기자 참회〉중에서

 

   20대 후반의 작가 채만식은 동아일보 신문기자였다. 지식인의 솔직한 내면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보인다. 이 글은 1929년 개벽사에서 발행했던 《별건곤》지면에 실린 글이다. ‘타오르는 장작더미에서 나무와 재를 볼 것이 아니라 불꽃을 보라’던 발터 벤야민의 인류의 문학예술에 대한 대답을 떠올린다. 그의 작품의 이해 너머로, 인간의 이해로 넘나드는 인간과 문학을 생각한다.
   털털거리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올라타 역사와 문학의 자리를 오가는, 그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곳은, 내 생각과 달랐다.

 


길 위에서 아픔을 만지다

 

   그랬다. 채만식 묘소를 찾아드는 길은 잡풀들로 무성했다. 한낮 맹렬히 쏟아 붓는 햇살이, 나와 동행하는 고샅길을 따라왔다.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너머 채만식묘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계남마을 입구에 있었기에, 마을을 오가는 주민에게 웃으며 물었다. 한 사람은 영 모른다며 고개를 흔들었고, 또 나이 든 한 사람은 손가락으로 방향만을 일러주었고, 또 다른 젊은 청년은 저 너머 봉분은 본 듯도 하다면서 유명한 문인 묘역이 정말 우리 동네에 있느냐며 오히려 나를 향해 되물었다. 그들은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었다. 마을 깊숙이 눈길을 주어도, 푯말의 다음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멈추고 돌아서기를 반복했던 길 위에는 강렬한 햇발이 나를 잡고 오래도록 놓아주질 않았다. 작가의 묘역은 황량한 풀숲너머에 자리해 쉬이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개의 비석, 외로운 봉분 하나를 보았다.
   마치 그 자리는 한 낮이 한 밤중인 듯 고요함을 덮고 황량함을 덧씌운 외딴섬을 닮았다. 황망한 마음에 묘역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내 발자국을 뒤쫓던 올망졸망 야생화와 저 너머 올곧게 선 키 큰 소나무들이 오래 된 동무인양 묘역을 향해 인사하듯 서 있었다. 작가 채만식의 감성적인 묘사 한 모퉁이가 떠올려진다.

 

   풀포기 군데군데 간드러진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있다. 제비꽃은 자줏빛, 눈곱만씩 한 괭이밥은 노랗다. 하얀 무릇꽃도 한창이다. 대황도 꽃만은 곱다. 할미꽃은 다 늙게야 허리를 펴고 흰 머리털을 날린다. 구름이 지나가느라  그늘이 한때 덮였다가 도로 밝아진다. 솔푸덕에서 놀란 꿩이 질겁하게 울고 날아간다.

- 채만식, 단편소설〈쑥국새〉중에서(1938)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세상소리가 꿩의 날개에 내려앉아 하늘로 오르는 것인가. 때 마침 산허리에서 “쑥국, 쑥우꾹 쑥꾸욱” 쑥국새(뻐꾹새) 울음소리가 내 어깨너머로 들린다. 팔랑거리며 어딘가에서 날아든 노랑나비가 푸른 빛이 감도는 현호색 풀꽃에 앉았다가, 웅성거리는 사람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언뜻 바람 한 점이 유랑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몰고 와, 나를 향해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내 뺨을 어루만지며 지나친다. 
   두 개의 비석이 풀숲을 비집고 채만식 묘역을 알리려는 듯 불쑥 튀어있다. 묘지를 중앙으로 왼편 것은 이전에 세운 것이고 오른편으로 새로 세운 비석이다. 왜일까. 옛비석 옆구리에 새겨진 이름을 누군가 짓이겨 파헤친 흔적이 보인다. 상흔이다. 중앙고보 2학년인 18세 때 집안의 강권으로 그는 한 살 위였던 함라면 은선흥殷善興과 사랑 없이 결혼하고 3남매를 두었으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숙명여고 출신인 둘째부인 김씨영金氏榮과 재혼한다. 아팠던 가족사의 시작이다.
   채만식이 누운 땅을 뒤로 하고 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거미줄이 여기저기 걸쳐지고 흉흉한 몰골의 옛 가옥 앞을 지나쳤다. 그 집 앞에는 포클레인 한 대가 서 있고, 70넘은 노인 한 분이 서 계시기에,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채만식의 마지막 집필가옥이란다. 멍했다. 새로이 쳐다보니 기울어져가는 가옥 한 켠에 황토먼지 한 바가지를 뒤집어 쓴 듯한 누우런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컹컹대며 맹렬히 꼬리를 흔든다. 반기는 낯빛이 왠지 아슴하다. 노인은 나를 향해 성토하듯 혼잣말로 중얼댔다.
   “채만식이 일제 앞잡이라나, 뭐라나”
   “허물어져가는 이 집도 손 댈 수도 없지만, 저어기 있는 채만식문학관의 명패까지 떼어내야 한다고 난리야”
   노인의 말소리에서 슬픔이 걸어 나왔다. 한限이 가슴에 뭉친 듯 내게로 몰려왔다. “누가, 누가요?” 계남 마을에서 무척이나 오래 살았다는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돌아섰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참이 지난 2009년에야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채만식의 이름이 올려져있다. 그의 작품들로만 보아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어쩌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을까? 왜일까? 하는 의구심을 안은 채 군산 길섶을 향했다. 금강하구에는 비둘기의 힘찬 날갯짓 속으로 희망이 날아올랐다. 금강하구 둑을 지나자, 다작의 작가 채만식문학관이 보인다.
   금강철새조망대에서 1km 거리에 있는 채만식문학관. 구불길의 표시를 따라 걸으면 문학관이 보인다. 채만식 풍경너머로 봄소식의 사자인 노랑제비꽃이 깔려있고, 이별의 슬픔을 간직한 금잔화도 보인다. 분홍빛 꽃잔디가 오가는 사람들을 불러 세웠다. 꽃구름이 문학관 주변을 호위했다. 
   전시관을 들어서니 채만식 일대기가 한 컷 한 컷 조명되어 있고, 〈배비장전〉친필 원고도 보인다. 일층에서 이층으로 올라서는 길은, 과히 백릉채만식 계단이었다. 채만식 연혁이 계단 오름마다 써있고, 철부지 아이들이 그 계단 벽을 타고 저마다 알록달록 그려낸, 채만식 상像의 특징을 살려 기념 페이퍼에 그려놓았다. 마치, 채만식의 문학세상으로 아이들을 초대하는 아이디어인 듯, 참신했다. 2층에는 채만식의 학창시절 모습들이 보였고, 40분 영상세미나실, 문학강의실 그리고 색칠해서 그려 낼 채만식 상징 기념 종이가 놓인 체험실이 있었다.
   도대체 작가 채만식은 누구인가. 작가 채만식의 호흡 속으로 내 숨결을 맞춘 후, 작가의 작품에 앉는다. 문학관 1층에는 교과서속에서 오고간 작가 채만식의 발자취가 내 눈 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문학세계와 그의 아픔과 고뇌에 대해서 터무니없이 모르던 내가 그 속으로 빠져든다.

 

   〈인텔리〉…… 인텔리 중에도 아무런 손끝의 기술이 없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졸업증서 한 장을 또는 조그마한 보통 상식을 가진 직업 없는 인텔리…… 해마다 천여 명씩 늘어가는 인텔리…… 뱀을 본 것은 이들 인텔리다.
   〈부르즈와지〉의 모든 기관이 포화상태가 되어 더 수효가 아니느니 그들은 결코 꾀임을 받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흔들리우는 셈이다. 개밥의 도토리다.
   인텔리가 아니었으면 차라리…… 노동자가 되었을 것인데 인텔리인지라 그 속에는 들어갔다가도 도로 달아나오는 것이 99%다. 그 나머지는 모두 어깨가 축 처진 무직 인텔리요, 무력한 문화 예비군 속에서 푸른 한숨만 쉬는 초상집의 주인 없는 개들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다.

-채만식의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 중에서

 

   자기비하로 가득하다. 그는 스스로 “창백한 인텔리의 지적 매음賣淫”이라고도 했다. 민족문학과 서구 풍자문학 사이를 오가며 빈정대며 야유하는 풍자적인 미의식 작가이면서도, 현실의 부조리에 항거하며 존재감이 빛나던 정신적인 문인이었다. 작가 채만식은 소설·희곡·평론·시나리오·방송극본·수필·가요·동화 그리고 신변잡사의 글, 상업적인 글까지 모든 장르를 취한 문필가였다.
   소설가 채만식은 1902년 6월 17일 임피면 읍내리 274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정서의 씨앗이 되어준 작가의 고향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마을이었다. 채만식의 필명은 백릉, 백릉생 정도였지만 호연당인 활빈당, 운정거사, 북웅, 북웅생, 당 S 쌍 S, 화서, 채우라고도 전한다. 그는 1923년 처녀작 〈과도기〉를 시작으로 1924년 〈세 길로〉로 《조선문단》 3호에 이광수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 1949년 마지막 장편 《소년은 자란다》까지 27년간 써낸 소설만으로도 93편이다. 
   그의 작품들은 소지주小地主의 몰락을 바라보며 민중의 애환을 그린 《탁류》, 땅을 통해 바라본 경제사적 변동에 큰 획을 긋는 《태평천하》, 지식층의 실업의 현실을 담아 자본주의 실태 상을 묘사한 《레디메이드 인생》, 해방 후 어지러운 세상풍경 너머로 새로이 시작되는 나라를 소년으로 빗대어, 자신을 홀연히 지켜내는 소년의 눈물겨운 삶이 녹아있는 《소년은 자란다》 등등, 채만식다운 구어체로 만들어낸 빛나는 한국근대문학의 대표작품들이다.
   그의 소설은 특별했다. 작가의 정신적인 근간을 이룬 자유 자주 평등사상을 밑바탕으로 삶의 자유로운 영혼을 표현하면서, 때로는 일제 식민지하의 갈등 반목 억압으로 수난당하는 소외된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야유적인 미소와 냉기어린 저주도 담곤 했다. 1층에서 2층을 이어지는 채만식 계단을 오르며 촘촘하게 이어지는 바람 같은 생각들이 나를 덮었다. 정처 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상념들을 뒤로 한 채, 채만식 문학비를 만나러 월명공원을 찾아 나섰다.
   어려운 길을 또 찾아 헤맸다. 결국 길을 잃었다. 월명공원 입구에서 채만식문학비의 위치를 확인까지 했지만, 흥천사를 끼고서 114개 계단을 오른 후 오순도순 사람들의 정겨운 말소리와 오랜 일재잔재인지 그 건물 깨어진 창마다 노니는 활기찬 비둘기의 날갯짓을 보면서, 왠지 나는 힘없이 터덜터덜 길을 걸었다. 곧바로 갈림길이다. 숲의 생명이 넘실거리는 12km 산책로의 시작을 알리는 그 아름다운 길 어디에도 문학비를 알리는 작은 푯말은 없었다. 금강하구언이 보인다는 월명공원 77만평 여러 갈래의 길에서 길을 잃었다. 양손을 내저으며 호기 있게 걷는 주민에게 물었다. 공원 숲길을 낯익게 걷는 사람에게 채만식 문학비를 아느냐고 물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못 봤어요” “몰라요” “공원 내에 문학비도 있나요?” “쭉 올라가 보세요. 저 너머에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문학비 비슷한 게 있어요.” 나는 사람에게 묻고 또 물으며 생명소리가 나직이 들리는 숲길을 따라 올랐다. 하지만 문학비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왜 사소한 표식조차 없는 것일까?’ 내 머리가 가슴에게 하는 속엣말이 들려왔다. ‘에이, 내려갈까? 포기할까?’ 그러다가, 언뜻 저 위쪽으로 수시탑守市塔을 지나라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때마침 공원 길섶 분홍빛 왕벚꽃나무 꽃잎이 내 머리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왕벚꽃나무 뒤로 원시적인 생명길이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붉은 빛 산당화가 낮게 핀 그 길 너머로 올라서고 있었다. 숲길을 오르고 또 오르며 걷다가 왠지 그 길 너머로 올라서만 싶은 길을 찾아 들었다. 분홍빛 벚꽃 잎이 무수히 깔린 길섶을 지나 외돌아서니 채만식의 문학비가 신기루처럼 서 있었다. 비로소, 1984년에 제막된 백릉 채만식의 문학비와 만났다. 전면에는 탁류의 일부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그의 일대기가 자세하게 적혀 있다. 
   우거진 풀숲에 둘러싸인 채만식문학비는, 흩어진 내 감성을 불러들였다. 마치, 그 자리는 휘날리던 벚꽃의 꽃말인 “정신의 아름다움”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쉬는 자리에서 웃고 있었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 - 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 -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小白山脈이 제주도濟州道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 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蘆嶺]와 지리산智異山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가지고 장수長水로 진안鎭安으로 무주茂朱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려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市街地)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 채만식의 소설 《탁류》중에서

 

   《탁류》에서 눈물의 강이라고 불렀던 금강이 산책길 건너 보였다. 이곳에는 군산시내와 금강 하구 둑, 서해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고 들었지만, 깊숙한 나무숲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울울창창한 숲을 헤치니 “탁류째 얼려 좌르르 쏟아져버”려 군산까지 흘러와 서해바다와 합쳐지는 금강이 보였다. 그저 한 아름의 눈물이 앞을 가려 탁류濁流라 했던가. 그 탁류너머로 보이는 곳이 《탁류》의 주인공 정주사가 살던 마을이라기에, 그 작품 속에 배인 생생한 토박이말이 떠올려짐과 동시에 정주사가 돈으로 팔아넘긴 초봉의 절대적인 아픔이 내 영혼으로 휘감겨왔다.    

 


 채만식, 아직 끝나지 않은

 

   민족의 수난인가. 현실인식을 밑그림으로 식민지시대를 살아낸 농촌의 생활상 그리고 도시의 지식인 지주 빈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았던 작가 채만식. 그려낸 인물유형마다 그 시대의 사회구조와 맞닿아 있어 풍자문학으로 작가적인 힘을 실었던 작가 채만식. 1945년 해방 전후부터 현 시대까지 한 작가의 몸살을 앓은 정신적 상흔은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인가. 해방 전후 작가 채만식의 작가정신을 내 상념위로 얹는다. 역사와 현실사이에 그가 훼손을 당한 일제말기 친일적인 행동의 몸부림을 되짚어 보는 현실의 우리다. 

 
   많은 수효의 영리한 사람들은 저희 이익과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진심으로 일본사람을 따랐다. 역시 적지 아니한 수효의 사람이 핍박받을 용기가 없어 일본사람에게 복종을 하였다.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 해방의 투쟁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은 외국으로 망명을 않고 지하로 숨어다니면서 꾸준히 투쟁도 하였다. 용맹하지도 못한 동시에 영리하지도 못한 나는 결국 본심도 아니면서 겉으로 복종이나 하고 용렬하고 나약한 지아비의 부류에 들고 만 것이었었다.

- 채만식 단편소설 〈민족의 죄인〉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의 비애인가. 잘잘못에 대한 변명을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삶의 실상이다. 실수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 누군가의 약점을 찾아내어 구설수에 올려 하늘에 메어다는 것도, 현실적 삶의 실상이다. 종일토록 겸허히 살아도 나도 모르게 저질러지는 실수에 눈물겨울 때가 있다. 현실로 슬픔이 걸어 들어와 내 손을 움켜쥐고 놓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먼저 우리가 되어 소통의 거리를 좁혀야, 꿈 짓는 내일이 살아나 비로소 웃는다.
   채만식은 문학을 “역사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 보았기에, 그 시대적인 민족상을 글의 아이러니로 표현했다. 부정적인 인물을 앞세우며 긍정적인 인물을 희극적으로 극대화하였다.
   풍자소설 세태소설을 묘사하며 지식인의 허상을, 현실적으로 폭로하던 작가는 친일파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다. 일제말기 친일적인 글을 쓴 것을 인정한 채만식. 이미 어제의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지난 흔적을 지워내려는 오랜 노력의 공이 들어 있음이다. 채만식으로 살아낸 어제에 대한 작가적인 공을 연구 분석하여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학은 인간의 삶속에서 헐벗은 마음을 위로한다. 지쳐서 미쳐가는 우리네 삶을 올곧게 세우는 힘이 있다. 아이러니한 풍자를 앞세워 호방하게 웃게 만들어주고, ‘마음 힐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삶의 허기를 채우게도 만든다. 멍든 가슴에 생기를 뿌려주며 위안을 받는, 문학세상이다. 살면서 정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 건강한 오늘을 밀고 당기는 것이, 문학의 힘이다. 문학의 텃밭은 우주를 넘나드는 위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아낌없이 씨 뿌린 작품들의 밭두렁 사이로, 원고지의 여백 사이로 스러져 이승으로 떠난 작가 채만식. 일제말기 가난으로 눈물을 찍으며 혹사당한 정신적인 굴절 덕분에, 아직도 끝나지 않은 친일작가 논란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작가. 가난한 일상 속으로 자신의 생명줄보다 원고지 한 권을 귀히 여겼던 문필가 채만식. 아픔에서 빛을 일군 작가의 생애가 여울져 보인다. 부모님이 정해준 처와 사랑으로 선택한 처 사이에서 죄의식에 억눌린 채 방황하는 그 시대의 채만식다운 아버지상像도 아프게 엿보인다. 작가적 생명을 서글픔으로 이음줄을 매단 채 빛을 일군, 짧은 생애가 돋보인다. 공들인 감성씨앗을 움틔워 30여년을 일구어낸 다작의 작가. 운명 직전까지 남루한 병인 폐결핵과 더불어 사과 궤짝에서 붓을 든 작가의 예술혼이 가슴으로 아슴아슴 안겨든다.
   원고지를 실컷 머리맡에 두고 싶다던 그. 원고료가 원고지 값보다 적어서 밑질 지경이라고 푸념을 했다는 그. 꽃을 좋아하면서 집안에 꽃을 두지 않았다는 그. 남의 집을 찾아가 식사를 하면서도 숟가락을 손수 고쳐 닦았다는 결벽증의 작가 채만식.
   그의 흔적을 찾아 종일토록 푯말 찾기 하였는가. 채만식 문학관을 찾아 나선 첫 시작부터 서울로 돌아서며 내일 아침을 생각한다. 미래로 향한 작가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떠올린다. 어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것인가는 내 몫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라는 저서가 아른거린다. 그 책은 돈이라는 코드를 통해 문학세계를 재해석을 한다고 했다. ‘돈이 현실이라는 등식으로 이루어질까?’ 태곳적 원초적인 신비가 머리에 맴맴 돈다. 원시적인 생명의지가 머리에 맴돌다가 가슴으로 엉켜 붙는다. 어제라는 역사너머로 아픔이 머리에 맴돌다가 가슴으로 엉켜들어 맹렬히 달려든다.
   하얀 마름꽃을 좋아해서 붙였다는 필명인 백릉白綾. 평생토록 가난을 벗 삼다가 조화대신 생화를 꽂아 달라고 했다던 그의 상여. 유언대로 들꽃에 싸여 세상너머로 떠났다. 어려운 시기에 세상을 떴기에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질 말고,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에 활활 태워 달라.” 작가의 소박한 유언인 것이다. 2013년인 지금. 근대문학의 현실이 아픔이 되어 현실 속으로 걸어 나왔다. 시대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흐른 창작 작품들은 60년의 세월너머에 꽂혀, 항일문학이냐 친일문학이냐는 최근 현황에 꽂혔다. 작가의 서정적인 묘사가 온 몸을 콕 찌른다.
   그는 49세의 나이로 험난했던 민족사속으로 짧은 생을 사른, 불꽃이었다.

 

 

 

유민자  -----------------------------------------------

   서울출생. 《한국수필》신인상(2005), 《수필과비평》 평론 등단(2012), 저서로는 《라온하제》 《2009 한국명수필선집》공저 《아침문학》공저, 아침문학회장 역임. 현재 사색의 향기 문학기행 회장. 본지 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