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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월호, 사색의 창] 죄송열차 - 오기환

신아미디어 2013. 2. 22. 17:39

"봉투를 뜯고 접혀진 편지지를 편다. 편지지를 펼 때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책을 넘길 때 스르륵 스르륵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향긋한 종이 냄새가 감각을 자극한다. 또 손가락으로 편지지를 펼 때나 책장을 넘길 때 느껴오는 짜릿한 손맛. 그 손맛은 e북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일과는 또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즐거움을 안겨준다"

 

 

 

 

 

  죄송열차  오기환

 

   며칠 동안 서해안을 둘러보았다.
   지난달 말경에 책을 출판해서 가깝게 지내는 분들께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에 기차를 타고 서해안으로 길을 떠났다. 장항선 열차는 천천히 달렸다. KTX나 새마을호 같은 급행열차를 만나면 먼저 보낸 뒤에 천천히 떠나는 무궁화호, 완행열차. 배전반 장애로 전기가 나가면 컴컴한 그대로 달리는 열차. 이러저러해서 열차가 지연되어 죄송하다는 방송만 되풀이하며 덜컹덜컹 달리는 ‘죄송열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연신 검색하면서 여행을 시작했다.
   스마트폰에 신호음이 울리면 열어보고 또 열어본다. 문자 내용은 책을 보내줘서 잘 읽겠다는, 장정이 마음에 든다는, 서문이 끌린다는, 글이 좋다는 등의 찬사의 말들이 대부분이다. 칭찬은 물고기도 춤추게 한다지만, 그저 의례적인 말이려니 치부하면서 또 다음을 ‘클릭’ 한다. MP3가 LP를 몰아내고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카메라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금은 손안에 들어오는 전화기로 못 하는 것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전자우편은 편지를 써서 보내고 기다리는 수고를 생략하면서 실시간으로 지구촌 어디를 막론하고 순식간에 전달해 준다. 편리한 현대문명의 이기이다.
   사나흘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우편함에 편지와 책들이 쌓여 있다. 우편물의 대부분이 책을 받은 분들의 답례품이다. 편지와 책을 펴보았다. 볼펜으로, 연필로, 붓으로 때로는 그림을 그려 축하의 마음을 편지지에 담거나 자신의 저서에 서명한 것들이다. 우체국에 들고 가서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주소를 쓰고 우편번호를 찾아 적은 뒤에 우표를 붙여서 보낸 편지나 책들이다.
   봉투를 뜯고 접혀진 편지지를 편다. 편지지를 펼 때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책을 넘길 때 스르륵 스르륵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향긋한 종이 냄새가 감각을 자극한다. 또 손가락으로 편지지를 펼 때나 책장을 넘길 때 느껴오는 짜릿한 손맛. 그 손맛은 e북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일과는 또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와 즐거움을 안겨준다.
   서해안 여행 중에, 배터리가 다된 시계처럼 세월을 멈춘 듯싶은 마을을 지나다가 식당 문을 밀고 들어갔다. 가정식 백반을 주문했다. 이십여 분이 지났는데도 연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밥 줄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독촉을 했다. 한참 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두부접시와 묵은 김치를 드밀면서 좀 더 기다리고 한다.
   완행열차와 같은 밥상이 차려졌다. 꽃게장, 주꾸미볶음, 물미역, 꽁치구이…, 삼 년 묵었다는 김치가 상에 올랐다. 답례로 받은 편지나 책을 닮은 밥상 같다. 일 인분에 육천 원 하는 싸고 푸짐한 밥값을 치르면서 전화번호를 물었다. 달력 한쪽을 찢어주면서 적어 가라는 ‘너더리식당’ 안주인.
   도시 같으면 이만한 상차림이면 ‘한정식’으로 대접받으면서 밥값은 최소한 일이만 원은 받을 것 같다. 게다가 주문하자마자 금세 상이 차려지고 빨리빨리 먹어야 한다. 이런 밥상은, 많은 정보를 단말기에 담을 수 있고 기다림의 수고와 시간을 단축하거나 생략할 수 있는 전자책을 닮은 밥상일 것 같다.
   전자책 시대가 도래되었다고 외쳐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는 사람이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오직 정보와 지식뿐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그건 오해다. 독일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어린 시절 책읽기의 황홀함을 “책은 읽는 것이 아니다.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책읽기란 글자의 의미를 해석하고 지식을 얻는 것보다 즐거움과 행복을 찾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을 읽는다. 장항선 완행열차처럼 여유를 갖고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글과 글 사이의 행간과 여백을 지그시 바라다본다.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에 전해지는 그 감촉을 온몸으로 느끼며 책을 읽는다. 천천히 달리는 ‘죄송열차’ 안에서처럼.

 

 

오기환  ---------------------------------------------

   ≪창작수필≫ 등단, 저서: ≪뿌리≫, ≪여름, 그 뜨거운 여름≫, ≪셋이서 두 그릇≫, ≪겨울나무, 그 뿌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