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9년 7월호, 제213호 신인상 수상작] 인연 - 이장수

신아미디어 2019. 7. 6. 14:31

"다가오는 날에도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 나 자신을 좀 더 내려놓으려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당연한 역할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소중한 인연에 대한 사명감의 실천이라 믿는다. 어쩌면 나 혼자만이 걸어가는 외로운 길이 될지라도 말이다."







   인연     -   이장수


   초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휴식 시간을 틈타 회사 앞 화단의 나무를 손질하고 있는데 한 여사원이 다가왔다. 느닷없이 “월급을 올려주지 않아도 좋으니 일만 더할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아들과 1학년 딸이 있는데 최근 남편이 실직하여 자신마저 일하지 못하면 정말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런 얘기를 직속상관을 통하지 않고 바로 사장한테 청하게 된 것을 용서해 달라고도 했다. 그녀의 표정은 진실하고 간절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한참이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나는 그 여사원의 직속상사에게 그녀에 대한 근황을 물어보았다. 항상 일찍 출근하여 하루 일을 빈틈없이 준비하고 책임감도 강한 보기 드문 모범사원이라고 한다. 근로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이 때문에 재취업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도 들었다. 내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퇴근 후에도 그녀의 일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참 열심히 살아왔지만 최직해야 하는 현실에 황당해했을 것이고, 가족이 처한 현실 때문에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했고, 나에게 말하기까지 수없이 망설였음도 읽을 수가 있었다. 살아가면서 가끔 경험하는 일이다.
   그 일을 두고 며칠간 많은 생각을 했다. 시나브로 내 마음도 저미어갔다. 때로는 먼발치에서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행동 하나하나 나무랄 데 없는 근면 성실한 베테랑 일꾼이다. 그런데도 인간적인 배려 같은 것은 외면해야 하는 게 법규이고 현실이다. 그런 냉혹함이 허탈감을 넘어 자괴감에 빠지게 했다.
   고심 끝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결심을 내렸다. 더욱이 아들이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시기에 회사도 사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 간부들을 설득하며 공감을 얻어냈고 그 결과 그녀의 근무 기간이 연장되는 결정이 나왔다.
   이같이 열심히 살아온 사람 중에는 자녀들 학비와 생활고를 걱정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선 일자리마저 내놓아야 하는 게 당연한 현실이다. 근본적인 이유야 기업에 있든 정부에 있든 뼈아픈 현실인 것만은 분명하다.
   생산 현장을 돌아보면 아들, 딸 같은 사원들이 정녕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무엇보다 더한 감동이 전해져 온다. 더 잘해 주지 못해 늘 미안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저들의 열정으로 이 일터를 그 어떤 어려운 경제상황에서도 견뎌내며 함께 꽃피워 갈 것이란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한 번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그의 청이 간곡하여 가을의 정취가 무르익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탁 트인 바닷가의 찻집은 색색의 단풍들이 물들어 있고 창 너머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추의 절경이 연출되는 계절이었다.
   그는 아내의 근무 연장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외람되나 자신은 퇴직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전문직인 공작기계 전기 분야의 일자리가 흔치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볼 면목도 없고 하루를 보내기가 너무나 힘들어,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전기 분야의 원로에게 조언이라도 한번 듣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취업청탁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순간 몹시 놀랐다.
   사실은 며칠 전 중견기업을 경영하는 친구 회사에 공작기계 보전기술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있는 터였다.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또 한 번의 필연인가 싶었다. 서로 연락하여 취업이 성사되었다. 이후 친구로부터 “좋은 사람 추천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게 되었다. 그는 지금 그 회사에서 인정받는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이제 아버지와 남편의 자리에서 조금은 당당하게 설 수 있으리라. 그녀도 삶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좋은 인연을 만나 잔잔한 미소를 함께 나눌 수 있음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이다.
   가을 하늘 드높고 코스모스 향연이 절정인 신작로를 달린다. 약속 장소에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먼저 와 있었다. 그녀가 몇 번이고 식사 한 번 더 하자고 하여 이루어진 만남이다. 그간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뒤로하며 조금은 나아진 현실에 따뜻한 눈빛을 나눌 수 있었다. 모처럼 느껴보는 사람 사는 정감, 그 소소한 향기가 뭉클하다.
   그녀의 성실함으로 이어진 인연, 그 어려운 환경을 올곧게 극복해감은 대견한 일이다. 나도 그녀를 지켜보며 아파한 안타까움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느닷없이 찾아와 애절하고 간곡함을 얘기하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지금, 이 시각 나 자신이 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돌아보면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내가 더 감사해야 할 일이고, 더 고마워해야 할 인연이 아닌가.
   다가오는 날에도 아름다운 인연을 위해 나 자신을 좀 더 내려놓으려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주어진 삶에 대한 당연한 역할이고 더불어 살아가는 소중한 인연에 대한 사명감의 실천이라 믿는다. 어쩌면 나 혼자만이 걸어가는 외로운 길이 될지라도 말이다.

  

 


이장수  --------------------------------------------- 

   한국중천(주) CEO, 대한중천그룹 부회장 재임 중, 경남대학교 백남오수필교실 수강, 진등재문학회 회원 .
 



당선소감


   직장생활 40여 년. 업무차 200번도 넘게 외국을 다녀왔고, 그 일은 지금도 계속될 만큼 시간에 쫓기는 신세다. 이런 과정에서도 많은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인연>이다. 이렇게 맺어진 수필문학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인연이 되었다. 내 삶에 잔잔한 정서와 여유, 새롭게 다가오는 설렘으로 하루를 여는 건 이를 방증하는 게 아닐까.
   그동안 성심껏 지도해 주신 교수님, 그리고 살뜰히 배려해 준 여러 문우님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아직은 덜 여문 수필을 신인상으로 뽑아주신 수필과비평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녹록하지 못한 환경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우리 사원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이번 수상은 내 안의 삶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앞으로 산업현장에 있었던 크고 작은 희로애락을 수필에 담아보려 한다. 그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