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월간『수필과비평』[2019년 3월호, 통권209호 I 사색의 창] 모로코 여창 - 김양희

신아미디어 2019. 4. 10. 12:33

"모로코를 떠나오던 날, 탕헤르 항구에는 세찬 바람이 부슬비를 뿌리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야 배가 오려나. 그 배는 또 언제 떠나려나. 인샬라!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모로코 여창      -    김양희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지금이 가장 생의 절정.’ 그 말은 맞다. 딸과 함께 떠나온 가족여행의 지금이 생의 절정임에 틀림이 없다. 암스테르담 경유하여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내다본 하늘 길은 온통 솜털에 싸인 백색의 향연이다. 인천공항에서 암스테르담까지는 열두 시간 비행.
   “우리 지금 구름 속에 있는 거야?” 옆에 앉은 딸아이가 말을 건넨다.
   네덜란드 항공기엔 좌석마다 모니터 화면이 부착돼 있다. ‘에어리언’의 불빛처럼 푸른 스크린이 내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다 쏟아지는 졸음 때문에 화면에 집중할 수가 없다. 거대한 철 나비는 금속 굉음을 내며 하늘을 날고 대부분의 승객은 잠이 들었다. 시트에 기대며 남편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검버섯이 많아진 피부에 세월의 신산이 얹혀있다. 검은 안대에 약간 벌어진 입으로 그는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까.
   인생의 쉼표를 찾아 나선 길. 시간은 우리에게 더러는 가라 하고, 또 오라고 한다. 집을 나선다는 것은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는 것. 그것은 충전이요 휴식이요 여행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장시간 비행에 지쳐 도둑고양이처럼 스며든 리스본의 밤하늘, 한밤중 기내 창을 통해 내려다본 시가지는 황금알갱이를 뿌려놓은 듯 현란하고 고요하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낯선 도회의 풍물과 마주하는 밤의 대기 속에서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마주한다.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카보다로카는 땅 끝 마을 곶이 있는 작은 마을이다. 평지가 없는 구릉의 암반지대에는 끝없이 올리브나무가 심어져 있고 투어버스엔 구슬픈 음률이 흐른다. 마음의 현을 요동치게 만드는 슬픈 노래 ‘파두’의 나라 포르투갈.
   항해 나간 남자를 기다리는 숙명이란 뜻을 간직한 파두는 슬픈 듯 흐느끼는 듯 한이 서린 정조가 우리나라 <아리랑>과 많이 닮은 듯하다. ‘아말리아로드리게스’로 인해 유명해졌으나 지금은 마리사의 파두가 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파두를 들을 때마다 나는 곧잘 맹그로브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바다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으나 수면 위로 떠올라 꿋꿋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수생식물, 끊어질듯 이어지는 파두의 매력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리스보아(리스본)의 사월은 보라색 도시다. 도시 전역을 뒤덮은 보라색 등꽃이 나른한 태양과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영국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만들어진 에드워드 7세 공원을 시작으로 벨렘지구 문화센터의 벨렘 탑, 그리고 제로니모수도원의 순례가 이어진다. 마누엘 양식으로 지어진 벨렘 탑 광장에서 멋진 팬플루트 연주를 하고 있는 거리악사의 모자에 기꺼이 지폐를 넣는다. 우리가 아는 리스본은 영어식 발음. 여기서는 수도명이 리스보아다.
   해 저물 무렵 성모발현성지 파티마에 도착했다. 1917년 5월에 양치는 세목동에게 성모마리아가 나타남으로써 파티마에 태양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루시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 세 어린 목동들이 놀던 자리엔 하얀 대성전이 들어섰고 광장에 높이 솟은 십자가는 침묵의 기도를 부른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백 년 전 성모의 메시지는 러시아의 회개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다.
   그때 성지 한복판에서 문득 떠올린다. 하늘의 뜻이 열린다면 포르투갈을 함께 여행하고 싶다던 사람을. 마음속에 항상 살아있는 그의 안녕을 위해서도 타오르는 촛불 하나 불을 붙인다. 사람에겐 세월이 지날수록 만나고픈 사람이 있고, 그 그리움이 이룰 수 없는 별리의 그림자로 남아있는 이도 있다.
   사월의 지는 해가 따갑게 머물고 있는 파티마에는 세계 가톨릭성지의 정수라 할 만큼 삼십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광장과 중앙 탑을 배경으로 좌우 주랑에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일행 중 가톨릭신자들은 미사의 아쉬움을 접은 채 마침 시작되고 있는 묵주기도의 예절에 잠시 참례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묵은 파티마호텔의 밤은 어느 때보다 정갈하고 고요했다.


   진초록 물결은 성난 바다인 듯 검푸른 몸을 뒤척이며 거친 숨을 내쉰다. 지브롤터 해협 건너 아프리카 북부도시 모로코로 가는 길은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투우의 도시 론다에서 타리파로 이동, 언제 올지 모르는 페리에 승선하기 위해 다섯 시간 가량이나 지친 기다림을 견딘 후였다. 모로코 탕헤르 항구에 도착한 것은 밤이 꽤 이슥해진 시각이었다.
   ‘앗살라 말리쿰!’-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튿날 해 뜨기 전 여명을 가르며 낯선 도시의 새벽을 달린다.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도시 ‘카사블랑카’를 향하여. 1960년대에 성행한 이 영화는 전체가 뉴욕에서 촬영되고 지명만 빌렸을 뿐이란다. 차창에 달라붙는 이슬비. 안개 속에서 유엔광장을 지나치는데 <카사블랑카> 영화에 나오던 닉스카페의 가상간판이 보인다.
   빨간색 바탕에 오각형 별, 모로코 깃발이 관청 군데군데 펄럭인다. 대서양을 배경으로 우뚝 선 핫산 탑. 무하마드 5세 핫산 왕릉. 높다란 종탑에서는 아잔이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킹덤 오브 모로코’로 인해 더욱 잘 알려진 모로코의 언어는 이슬람 말, 종교도 코란도 모두 이슬람 언어다.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들은 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한 손에 칼, 한 손엔 코란! 그것은 그들 종교와 삶의 의미 전부이다.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여성의 성적인 모든 것을 가리기 위함이다. 페스의 메디나에는 삼백 개가 넘는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하늘 아래 만인이 평등하다는 이슬람사상. 머리에 터번을 쓴 모로코인들이 거리 곳곳에서 박하차를 팔고 있다.
   황량한 벌판의 모로코 빈민촌을 스친다. 남루한 천 조각이 너덜거리는 움막에 한 가족이 사는 모습은 문화적 충격이다. 사막 같은 평원은 계속이어지고 사하라의 건조한 모래바람이 스치는 도로변 휴게소에서 민트차 한 잔으로 칼칼해진 목을 축인다. 점심은 모로코 전통음식인 ‘구스구스’인데 닭고기에 각종 야채를 넣은 노란 찜 같은 메인음식이 커다란 접시에 푸짐하게 나왔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페스의 좁은 뒷골목은 모든 것이 중세 그대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칠 정도의 좁은 흙먼지 미로를 따라 조악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데 상표는 대개가 메이드인 차이나이다. 그 좁은 미로에 두세평 정도의 조악한 상점들이 이천사백 개나 들어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줄로 늘어선 관광객에게 따라붙는 호객꾼들을 피하며 행여 일행을 놓칠세라 숨 가쁘게 걷는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나라 모로코. 모로코지방 갈라디아 사람들. 그들의 해는 흙먼지 속 미로에서 지고 또 뜬다. 정교하고 화려한 철제조각품들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데 곳곳의 상점에선 곱슬머리 장인들이 작은 망치로 작품 제작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기행의 모로코를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화학제품을 전혀 쓰지 않고 고대시절 방법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천연가죽 염색장소이다. 알록달록 수놓은 가죽 샌들이 가득 쌓인 상점에서 염색공장인 테너리를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왜 저렇듯 원시적인 방법을 고수하는 것일까. 사막의 따가운 햇살, 그들 노동자들의 진한 땀 내음에 배인 밥벌이의 지겨움. 백화점에 진열된 화려한 피혁제품의 이면에는 그들의 숭고한 땀이 스며있다.
   모로코를 떠나오던 날, 탕헤르 항구에는 세찬 바람이 부슬비를 뿌리고 있었다. 얼마를 기다려야 배가 오려나. 그 배는 또 언제 떠나려나.
   인샬라!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