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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3월호, 통권209호 I 사색의 창] 날개 - 김순자

신아미디어 2019. 4. 10. 11:59

"어미를 위해 자식들이 치사랑의 날개를 폈다. 폭염으로부터 어미를 지키고자, 땡볕 새어드는 허름한 둥지에 그늘막을 쳤다. 왜가리의 날개처럼 탄탄한 울타리로 훌쩍 커버린 자식들의 날개가, 이제는 역할이 전도된 듯 어미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준다."


 





   날개      -    김순자


   올여름 더위는 유별났다. 수은주가 40도 이상 오르내렸으니 110여 년 만의 더위라는 기록이 나올 만도 하다. 폭염 주의보가 근 한 달여 지속되면서 온열병 환자가 속출하고 연일 쏟아지는 재난경보 메시지가 발을 묶어 놓았다. 떨어져 사는 자식들의 안부전화도 전에 없이 빈번하다. 바깥출입을 자제하시라는 당부의 말이 빠지지 않는다. 날개를 접고 새장에 갇힌 한 마리의 새가 된 기분이다.
   아파트 베란다에 놓아둔 달걀에서 병아리가 깨어 나오는 생생한 모습을, TV 화면을 통해 간접 목격했다. 고온의 날씨 탓일까? 난생처음 자연 부화하는 병아리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묘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 걱정도 됐다. 지구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온난화로 인한 지구환경 변화가 이대로 지속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더 벌어질까. 한 빙하 전문가는 10여 년 후 북극 얼음이 사라질 거라고 단언했다. 지속 가능한 삶의 터전, 지구촌을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지만 개인이나 단체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대적 인류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내리꽂히는 태양 볕이 바늘 칩처럼 따갑다. 동물도 식물도 버티기 힘든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양식장의 물고기들이 떼로 죽어 나가고 과수와 채소들도 잎마름병 피해로 초록빛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올여름 같은 폭염이 앞으로는 더욱 강세를 부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기후와 자연 환경에 적응하고 스스로 대처하기 위해선 강한 체력이 요구된다. 나이가 들수록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고 몸에 맞는 운동을 찾아 꾸준히 하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지구 환경 문제와 문명이 낳은 크고 작은 폐해들을 어찌 운동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랴. 황사,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오존 농도, 자외선 지수 등 신경쓸 일들이 하도 많아 세상살이가 수월하지 않음을 피부로 느끼는 요즘이다.
   목 늘이고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1시쯤 방문할 예정입니다. 괜찮으시죠?”
   “네.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긴 한데 가능한 한 그 시간까지 오도록 하죠.”
   오늘 설치공사 예약이 두 집이나 더 있어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없다고 했다. 중요한 일이 겹쳐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큰딸이 3주 전에 신청해 놓고 학수고대하던 에어컨 설치공사가 오늘에야 이루어질 모양이다. 마침 오늘은 큰여식 대학원 학위 수여식이 있는 날이다. 공식 행사를 마친 후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서둘러 온다고 해도 빠듯한 시각이었다.
   마음이 급하다. 미리 전화로 예약한 축하 꽃다발을 챙겨 딸애와 학교로 향했다. 교문 앞에는 반짝 등장한 꽃장수들이 졸업식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교정에 들어서니 잘 자란 나무들이 펼쳐 놓은 초록 그늘 아래 하객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신성함이 묻어나는 캠퍼스! 그곳에는 꿈과 열정과 젊음이 싱그럽게 넘실대고 있었다.
   석사모를 머리에 얹고 지정된 자리에 앉아 있는 딸의 뒷모습이 눈에 아프다. 그동안 직장 일에 몰두하면서 대학생 딸 뒷바라지하랴, 집안일 하랴, 제 공부하랴, 얼마나 힘들었을까. 늦은 나이에 용기 내어 석사 학위에 도전한 딸의 열정이 가상스러웠다. 학위 수여식을 마치고 느긋하게 추억사진 몇 컷 찍을 새도 없이 집으로 와야 했다. 집에 도착하여 한숨 돌릴 즈음 에어컨 기사님이 곧 도착한다는 전화가 왔다.
   거실 벽 쪽에 에어컨 설치 위치를 정하고 실외기와 연결할 배관 공사에 들어갔다. 벽을 뚫는 작업이 쉽지 않았다. 옹벽이 두껍고 그 안에 굵은 철근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기계가 굉음을 내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열 받아서인지 자꾸 멈춰 섰다. 천신만고 끝에 아기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리고 하얀 붕대를 감은 배관이 그 상처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그 다음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드디어 에어컨 시운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옹벽이 너무 고집을 부려 설치 시간이 배로 길어지긴 했지만 무사히 마무리되어 다행이었다.
   38년의 풍상을 겪어온 묵은 집이다. 둔덕진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 대체로 시원하고 통풍도 좋은 편이라, 그동안 여름나기에 별 어려움 없이 지냈다. 남서풍이 부는 날엔 맞바람이 쳐 선풍기도 바람 날개를 접고 쉴 때가 많았다. 아이들이 에어컨 얘기를 꺼낼 때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반대했던 이유도 비싼 전기료 문제도 있지만,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여름은 달랐다.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염천의 날씨가 인내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땀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선풍기 날개에선 후끈한 열바람만 내뿜어댔다. 하루 네다섯번씩 목욕을 해야 했고 그 횟수만큼 손빨랫거리도 늘어났다. 목욕탕에 머무는 동안은 얼마간 더위를 잊을 수 있었으나 거실로 나오는 순간 찜질방이 따로 없었다. 오죽하면 백화점 안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피서 아닌 피서를 하러 갔을까. 폭염경보 속 하루해가 더 길게 느껴졌다. 온열병에 쓰러지지 않고 24시간을 잘 버텨내는 게 그날의 생존 전략이 되었다.
   16평형, 아담한 체구의 냉방기는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시원한 바람을 퍼 나르고 있었다. 설산의 한 귀퉁이를 휘감고 내려온 듯한 신선한 바람! 금세 만들어져 나오는 바람이 신통하기 짝이 없다. 이제 더위를 물리쳐 줄 천군만마를 얻었으니 축 처져 있던 날갯죽지에 힘이 실린다.
   얼마 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던 어미 왜가리의 날개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태양 볕을 등지고 선 어미 왜가리가 날개를 활짝 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기 새들을 폭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위치를 바꿔가며 그늘막을 치고 있었다. 모성애가 물씬 묻어나는 아름다운 광경을 카메라가 순간 포착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 신체의 모든 기능이 조화를 잃고 쇠퇴해 가기 마련이다. 추위도 더 타고 더위도 유독 더 타는 것 같다. 더위에 지치다보니 입맛도 잃고 기력도 떨어져 힘겨운 여름나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어미를 위해 자식들이 치사랑의 날개를 폈다. 폭염으로부터 어미를 지키고자, 땡볕 새어드는 허름한 둥지에 그늘막을 쳤다. 왜가리의 날개처럼 탄탄한 울타리로 훌쩍 커버린 자식들의 날개가, 이제는 역할이 전도된 듯 어미의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