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여행문화(여행작가)/여행문화 신인상 수상자

[격월간 여행문화 2019년 3·4월호, 여행문화 신인상 수상작] 고대의 전설과 신비가 녹아있는 모세의 언약궤 퍼레이드 기행 - 정명희

신아미디어 2019. 3. 5. 11:43

여행문화 신인상 수상자 "정명희"님의 기행수필을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고대의 전설과 신비가 녹아있는

   모세의 언약궤 퍼레이드 기행   - 에티오피아, 악슘

           - 사진 글   정명희


   인간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속성이 있고 현대인들은 그런 삶을 꿈꾸기도 한다. 고대왕국의 전설과 신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어쩌면 인간의 회귀본능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평화롭고 정적인 과거의 그림보다는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과 순간을 추구했다. 그로부터 불과 2세기가 지난 지금, 단순·담백한 과거 흑백사진이 다시 그리워진다.
   모세의 언약궤 신비는 성경은 물론 역사학자들에게 아직도 미스터리다. 에티오피아 고대왕국의 수도 악슘은 여전히 흑백사진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그곳은 신비를 감추고 있는 도시이자 인디아나존스 영화‘레이더스’의 소재가 된 전설의 도시다. 이스라엘에서 사라진 모세의 언약궤를 악슘의 정교회가 그곳의 성소에 보관하고 있다는 주장은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에티오피아인들도 언약궤가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는 믿음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듯하다.
   어떻게 모세의 십계명 언약궤가 이스라엘에서 사라졌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증표로서 모세에게 내린 언약궤(the Ark of Covenant)가 사라졌는데도 이스라엘 민족은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래함 행코크는 오랫동안 법궤의 행방을 추적·연구한 학자다. 그는 악슘의 성궤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온 법궤일거라는 견해를 강력히 주장한다. 1959년 개봉한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영화는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사랑얘기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시바여왕이 솔로몬을 찾아간 이유가 나온다.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바여왕은 솔로몬 왕을 쓰러뜨릴 묘책을 세운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양의 금, 향료, 보석을 가지고 솔로몬 왕을 찾아가 그의 지혜를 실험한다. 그러나 솔로몬 왕의 지혜와 용기에 크게 감동한 그녀는 원래의 계략을 포기한다. 결국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에 빠지게 되고 솔로몬은 국정을 소홀히 한다. 국민들의 신임을 잃은 왕은 궁지에까지 몰리고 시바여왕은 시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쓰러지기도 한다. 그녀는 신전을 찾아가 자신의 죄를 빌며 본국으로 돌아갈 것과 여호와를 경배하기로 맹세한다. 신으로부터 사죄 받은 시바여왕은 아들이 잉태되었음을 알게 되고, 아이가 태어나면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겠다고 결심한다. 또한 이스라엘 솔로몬 왕조와 깊은 우의를 다질 것을 신 앞에 맹세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악슘왕국은 4세기 아프리카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했고 랄리벨라에 제2의 예루살렘을 건설했다.
   솔로몬 왕과 시바여왕의 전설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구약성서에도 이렇게 적혀있다.
   ‘시바여왕은 금 120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께 드렸으니 시바여왕이 솔로몬 왕께 드린 향품 같은 것이 전에는 없었더라… 솔로몬 왕이 시바여왕의 가져온 대로 답례하고 그 외에 또 저의 소원대로 무릇 구하는 것을 주니 이에 저가 그 신복들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갔더라. ’시바여왕이 에티오피아로 돌아간 이후의 얘기는 에티오피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다. 시바여왕이 낳은 아들은 메네리크 1세가 되어 기원전 10세기 에티오피아에 솔로몬왕조를 세운다. 이 왕조는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퇴임하기까지 약 3천년을 이어간다. 솔로몬 왕조를 이어받은 악슘 왕국은 기원전 6세기에 건국되어 천년 이상 이어졌고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고의 제국을 다스리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3세기에 독자적으로 화폐를 제조하고 문자도 만들었다. 로마, 이집트, 인도 등과의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악슘제국은 당시 로마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과 견줄 만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추었고 예멘과 소말리아 일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아라비아 전역을 지배하려는 야심을 갖기도 했다.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당시 에티오피아가 얼마나 잘 살고 강력한 제국이었는지 언급했다. 페르시아 왕 캄뷔세스가 에티오피아에 염탐꾼을 보내 그쪽 상황을 알아오게 했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키가 훤출하고 힘이 세며, 먹을거리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들은 삶은 고기를 먹고 우유를 마시며 120년을 살고, 감옥의 죄수들조차도 황금족쇄를 찬다고 했다. 보고를 받은 캄뷔세스는 이성을 완전히 잃는다. 그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티오피아 원정길에 오른다. 원정 초반에 군량은 바닥났고 군인들은 동료까지 제비뽑기 하여 잡아먹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캄뷔세스 왕은 원정을 포기하고 결국 페르시아로 회군한다.
   에티오피아 고대왕국의 수도 악슘은 역사와 전설이 서려 있어 여행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흑백의 도시다. 시온 마리아 교회 성소에는 법궤를 보관하고 있는데 이를 보호하는 수도사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다. 법궤를 지키며 일생을 마감하는 정교회 수도사‘이까베트’는 평생 동안 성소의 울타리 밖으로 나올 수 없고 그가 죽으면 다른 수도사가 그 직임을 이어받는다.
   시온 마리아 교회는 매년 6차례 신자들을 위해 언약궤 퍼레이드를 펼친 후 특별예배를 개최한다. 내가 신자들 틈에 끼어 그들과 함께 퍼레이드를 한 것 자체가 여행객으로서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2018년 12월 성궤 퍼레이드가 있던 날, 새벽 3시반경부터 신자들이 교회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남성 신자들은 이미 교회 안으로 들어갔고 여성 신자들은 하얀 에티오피아 전통의상인 ‘가비’나 ‘네뗄라’를 걸친 채 광장에서 새벽의 추위를 견디며 언약궤가 나오기만을 손꼽는다. 시온 마리아 교회는 여성들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마지막 황제 는 교회 옆에 같은 이름의 새로운 교회를 세워주었다. 여인들의 손엔 손때가 켜켜이 묻은 낡은 성경책과 촛불 하나가 들려있다. 이들은 성소를 바라보며 땅바닥에 엎드려 입맞춤으로 경배를 올린다.
   시간이 되자 신도들이 촛불을 들고 앞장서서 나오기 시작한다. 이들 뒤를 이어 에티오피아 특유문양의 십자가를 든 사제가 황금무늬가 있는 금제의(金祭衣)를 입고 나온다. 빨간 보자기를 든 또 다른 사제가 그 뒤를 따른다. 그 보자기 안에는 에티오피아 고대언어‘기즈’로 쓰여진 성경책이 들어있다. 그 다음은 언약궤가 따른다. 검은 보자기에 황금색 문양이 박힌 언약궤를 머리에 인 수도사의 얼굴은 긴장한 표정이다. 언약궤 뒤에는 향불을 피우며 또 한 사람의 사제가 따른다.
   언약궤는 가로 112.5 cm, 세로와 높이 각각 67.5 cm로 안팎 모두 금으로 도금되어 있고, 언약궤 뚜껑에는 두 천사들이 마주보며 날개를 앞쪽으로 펼친 조각이 있다고 한다.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법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이 들어있어 상당히 무거워 보인다. 교회를 나온 행렬은 광장에 모여 성궤에 대한 경배를 드린다. 삼삼오오 몰려든 신자들은 광장을 에워싸고 사제가 무슨 말을 하면 모두 언약궤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어떤 신자들은 땅바닥에 입맞춤을 하며 온통 경외감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짓는다. 간단한 경배절차가 끝나면 이들은 악슘 중심도로를 따라 퍼레이드를 시작한다. 흰옷을 입은 신자들은 촛불을 들고 물이 폭포에서 쏟아지듯 거리를 가득 메운다. 나도 신자들 사이에 끼어 걷는다.
   광장으로 돌아오자 나이 지긋한 사제 한 분이 십자가를 들고 사람들의 아픈 부위를 어루만지며 축복을 내린다. 젊은 사제 한 분은 에티오피아 성경책을 들고 신자들에게 입맞춤을 하도록 한다. 나도 그 무리에 끼어 축복을 요청하자 젊은 사제는 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말하자 사제는 북쪽이냐 남쪽이냐 다시 묻더니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성경책을 나에게 내민다. 노쇠한 사제도 십자가를 나의 머리 위에 얹고 축복을 내린다. 에티오피아에서 난 깨닫는다. 신앙이란 믿는 사람에게만 허용되는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와 성경책이 잠시 내 몸을 스쳤는데도 나의 몸 세포들은 활발하게 반응한다. 마치 내가 구름 위에 떠있는 듯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인간의 신체는 정신과 마음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조금 후 언약궤 퍼레이드 행렬이 광장에 다시 도착하고 사제가 본격적으로 예배를 주재한다. 1시간 넘는 시간을 신자들은 조금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예배에만 집중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표정은 엄숙하면서도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태양이 아직 수평선을 넘지 못해 어스름이 가시지 않은 새벽, 아이들의 코에서는 흰 물줄기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예배의 모든 절차가 끝났지만 신자들은 감동이 가시지 않았는지 광장을 떠나지 못한다.
   언약궤를 보관하고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믿음과 자부심은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삶의 원천이 되는 듯 보였다. 아프리카의 예루살렘을 만들겠다는 에티오피아 선조들의 약속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신앙은 삶의 기둥이자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인상이 깊게 남는다. 언약궤 퍼레이드와 예배를 보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자에게는 신비한 경험이자 여행의 큰 축복이었다. 이렇게 흑백의 도시 악슘을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