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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사색의 창] 하늘이 준 선물 - 허필현

신아미디어 2019. 2. 14. 20:11

"아들 내외는 힘들다고 넋두리한다. 먼저 겪은 어머니라서 빙그레 웃는 여유를 가진다. ‘힘들거든 잠자는 천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렴. 하늘이 준 가장 값진 선물을….’ 조그맣게 접은 짤막한 편지를 며느리 손에 슬쩍 건네주고 병원 문을 나선다. 햇살이 눈부시다."


 




   하늘이 준 선물      -    허필현


   제법 또록또록하다. 연한 고사리 같은 두 손, 앙증맞은 발가락, 가끔 뜨는 실눈, 어느 하나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열 달 동안 며느리의 뱃속에서 지내다가 이제야 세상 구경한다. 나를 할머니로 만든 녀석에게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빼앗겨 안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아직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눈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으니 면회 시간마다 부지런히 쫓아가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앨범을 뒤적여 아들 사진을 찾았다. 태어난 지 보름만에 찍은 첫 번째 사진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한다더니 토실토실한 모습이 사랑스럽다. 신기할 정도로 손자와 판박이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35년 전 기억이 생생히 살아난다.
   밤새도록 진통을 했다. 2시간 간격으로 아프던 것이 차츰 주기가 줄더니 5분마다 통증이 왔다. 남편은 친정엄마께 전화만 해 놓고 50명의 눈동자가 자기를 기다린다면서 근무하러 가버린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뒤통수에 욕을 해댄다. 허겁지겁 달려온 친정엄마의 얼굴에는 원망 섞인 흔적이 역력하다. 아기를 낳아야 할 사람을 버려두고 근무하러 갔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무겁고 아픈 배를 안고 병원으로 향하는 걸음은 무거운 황소처럼 어적거리고 더디기만 하다.
   분만실 침대에 눕자마자 본격적인 산고가 시작된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바위로 누르는 듯도 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통증에 가슴이 바들바들 떨리며 두려움이 엄습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까? 천장이 뱅글뱅글 돌고 노란색이 되어야 아이가 나온다는데….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
   나도 모르게 곁에 있는 어린 간호사를 힘껏 안았다. 간호사는 놀랐는지 동그란 토끼 눈이 되더니 바들바들 떨면서 내 손을 잡아준다. 순간 극심한 통증과 함께 물컹한 것이 퍽 쏟아진다. 고통의 시간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심호흡하는 사이 간호사가 아이의 두 발을 바투 쥐고 엉덩이를 때린다. 첫 울음소리가 미약하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머리털이 쭈뼛 선다. 다행히 “건강한 왕자입니다.” 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어렴풋이 들린다. 이상이 없는 것이 확실한지 되묻고, 건강하다는 답을 듣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백일이 겨우 지난 어느 날, 아기가 밤새 자지러지게 울었다. 놀란 가슴을 안고 달려간 병원에서 탈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수술하면 된다지만, 귀한 선물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남편과 나는 손을 맞잡고 안절부절못했다.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는 손은 내 것이 아닌 양 감각이 없다.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또 얼마나 더디게 가는지 일각이 여삼추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기조차 힘이 든다. 강산이 두 번 바뀐 듯한 20분이 지나고 나온 아기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면 집에는 또 산더미 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젖 먹이랴 장난감 치우랴 허둥대다 어질러진 거실에 주저앉아 엉엉소리를 내 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머니란 이름은 능력 이상의 힘을 쏟게 하는 마력을 지닌 것 같다. 힘들고 짜증 나는 것은 잠시, 귀한 아들 곁에 누우면 세상 걱정이 사라져 버리니 버틸 수 있었던 것이리라.

   병원에 들르니 천사가 눈을 뜨고 누군가를 찾는 듯하다. “할머니다, 할머니.” 힘주어 말해 보지만 유리창이 가로막혀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분명 하늘이 준 선물이다. 배냇짓을 하느라고 입꼬리가 쌜룩거리자 자기 보고 웃는다고 즐거워하는 아들과 며느리도 사랑스럽다.
   아들 내외는 힘들다고 넋두리한다. 먼저 겪은 어머니라서 빙그레 웃는 여유를 가진다. ‘힘들거든 잠자는 천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렴. 하늘이 준 가장 값진 선물을….’ 조그맣게 접은 짤막한 편지를 며느리 손에 슬쩍 건네주고 병원 문을 나선다. 햇살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