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은 슬프다. 다시 만나기까지의 시간들은 박제된 듯 멈춰있다. 내가 그를 향하고 그가 나에게 보내는 언어와 눈짓들이 순간순간 갈 곳을 모르고 부유하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그리움이다. 모든 그리움이 슬픔이었다."
엉엉 / 김윤미
“춘자 집 20층 맞지? 공주에서 밤 막걸리 사와서 맛보라고 한 병씩 배달하는 중! 어머, 그런데… 설마 밖이야?”
“응. 나, 밖이야, 신났어!”
동네 횟집에서 자연산 막회에 소주를 한 잔 하고 맥주집으로 막 자리를 옮겼을 때 옥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 친한 친구 엄마들끼리 서로 별명을 붙여 불렀는데 나는 춘자, 그는 옥자였다. 남편은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출장 중이었다. 그 탓에 나 역시 제대로 된 밤마실 한 번 나가지 못한 것이 꼭 두 달째였다.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의외의 외출에 옥자는 “막걸리 집 앞에 두고 갈게, 좋은 시간 보내.”라며 전화를 끊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회는 입에 착착 붙었고 맥주는 더없이 시원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이야기하며 숨이 넘어가듯 웃었다. 두달 만에 아이 없이 외출한 해방감에 가슴 가득 후련함마저 들었다. 정말 신이 났다.
동네 친구의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 꼼짝 없이 아이를 데리고 나서야 했을 상황에 먼저 손을 내민 건 옆 동 언니의 남편이었다. 형부는 아이만 괜찮으면 자기 아이들과 같이 돌보겠노라며 밥도 잘해 먹일 테니 걱정 말고 언니랑 가서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했다. 따뜻하고 반듯한 분이었고 아이도 그러겠다고 해서 9시까지 돌아오기로 약속하고 저녁 6시쯤 언니 집을 나선 것이었다.
흥에 취해 맥주를 마시다 보니 어느덧 9시가 넘어있었다. 덜컥 아이가 걱정돼 괜찮을 거라는 언니를 재촉해 형부에게 전화했다. 다행히 늦은 낮잠을 잔 아이는 피곤한 기색 없이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안도와 함께 내심 기쁜 마음도 들었다.
“형부, 죄송하지만 한 시간만 더 놀고 데리러 갈게요. 죄송하고 감사해요.”
면목 없는 부탁을 하고 전화를 끊는데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아빠가 너무도 그리울 내 아이, 혹시 친구 아빠랑 시간을 보내며 자기 아빠를 생각하지 않을까? ‘우리 아빠도 요리 잘 하는데…’ 하며 그 밥을 먹지 않았을까? 아까 마신 소주의 취기가 슬슬 올라왔다.
승진했다며 단번에 소주를 들이켰던 오늘의 주인공은 맥주잔만 붙든 채 잠이 들어버렸다. 연락을 받은 주인공 남편이 금세 달려와서 ‘못 말리게 귀엽군!’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데려갔다. 남편에게 안겨 집에 가는 뒷모습이 내내 부러웠다. 나는 완전히 취해버렸다.
시계가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무리 천하무적이라도 여덟 살 아이가 버티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술에 취한 나는 이제 그만 내 아이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야지.
“이제 그만 집에 가야겠어. 나 취했어.”
말하고 일어나려는데, 친구들이 팔을 붙잡았다. 이구동성으로 아직 11시 밖에 안 됐다며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했다. 힘 빠진 몸은 의자에 내동댕이쳐졌다. 술김에 더럭 짜증이 솟았다.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또 다시 친구들 손길에 주저앉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분은 점점 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럼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올게.”
누구도 믿지 않을 핑계를 대고 겨우 맥주집을 나설 수 있었다. 비틀비틀 걸어서 아이에게 가는 길, 와락 눈물이 났다. 내 마음 속 화살이 애꿎은 친구들에게 향했다. 나는 데리러 올 남편도 없는데, 내 아이는 다른 아빠 품에 있는데, 나는 취했는데 왜 나를 못 가게 하는 거야? 속으로 생각하며 엉엉 울었다. 걸음을 내딛는 바닥에 뚝뚝 굵은 눈물이 떨어져 얼룩지는 게 보였다.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가, 자정도 안 된 시간에 만취하여, 아파트 단지 안 큰길을, 비틀비틀 걸으며,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헤어짐은 슬프다. 다시 만나기까지의 시간들은 박제된 듯 멈춰있다. 내가 그를 향하고 그가 나에게 보내는 언어와 눈짓들이 순간순간 갈 곳을 모르고 부유하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그리움이다. 모든 그리움이 슬픔이었다.
아직 언니 집까지 반 밖에 못 갔는데 남겨두고 온 친구들이 벌써 눈치 채고 전화를 했다. 아이를 데려다 줄 테니 집으로 바로 가라고 했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집에 와서 물 한잔을 마시며 눈물을 닦고 있었더니 언니가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더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숙취해소제가 어디 있었는데’ 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뜻밖에 냉장고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공주 알밤 막걸리가 능청스럽게 놓여있었다.
“그 와중에 잊지도 않고 잘 챙겼네!”
혼자 중얼거리며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맥주집에 버리고 왔던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좋은 시간 보내!”
옥자의 한 마디가 귓전에서 울리는 듯했다.
김윤미 님은 《한국산문》 등단. 전) 중앙일보 기자. 현)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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