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세상을 너무 쉽게 살아가려고 하는 건 아닌지. 밖으로 나가며 나는 한 번 더 그 여자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위험한 여자들 / 임옥진
10여 시간을 날아 밴쿠버에 내렸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그가 알려준 곳으로 버스를 타러 갔다. 쾌청한 하늘이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땅을 딛고 공기를 마신다는 것조차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긴 비행이었다. 열흘 동안 여행을 같이 할 사람들은 또 어떨지. 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그 여자들이 보였다. ‘어, 저 경을 칠 인간들이.’ 당황한 여자들이 몸을 돌린다.
조금 전의 일이다. 남편이 짐을 찾는 동안 화장실엘 갔다. 어깨에 멨던 가방을 벽에 기대 놓고 양치질을 시작했을 때, 밖에서부터 떠들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말이다. 곧 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거울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머리가 긴 여자, 사내들처럼 짧게 커트한 여자, 약간 통통한 몸매의 여자. 말을 주로 하는 이는 머리가 긴 여자다. 다른 사람들은 출입구 기둥에 몸을 붙이고 맞장구를 쳤다. ‘저 여잔 인천공항에서도 봤는데, 여기서 만나네.’ 회색 후드티를 입은 짧은 머리 여자를 기억하는 건 독특한 머리 스타일 때문이었다.
긴 머리 여자는 내게 등을 돌리고 서서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 왜 나가지 않고 여기서 수다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때 그 여자가 무릎을 살짝 굽히더니 두 손으로 내 가방을 제 가방인 양 자연스럽게 가슴께로 들어 올렸다.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웃는 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저만큼 떨어진 가방에 내내 신경이 쓰였었는데. 한 발짝쯤 움직였을 때 나는 칫솔을 입에 문 채 가방을 잡았다.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 여자가 허리를 90도로 꺾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연신 허리를 구부렸고 두 여자가 긴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여자들을 잠깐씩 쳐다보고는 그냥 돌아섰다. 부리나케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거울을 통해 보며 천천히 입을 헹궜다.
여권이며 돈이며 카드며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인데 그들이 우리 일행이라니. 여행은 피차 불편할 듯싶었다. 그런데 같이 있어야 할 통통한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팀인가? 페리를 타고 빅토리아 섬으로 가는 선상에서, 주 의사당 앞에서 번번이 마주치는 여자들. 애써 서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무엇 때문에 해외에 나와서 남의 가방에 손을 대는 거지? 여행경비를 좀 더 여유 있게 쓰고 싶어서였을까. 성공은 몇 번이나 한 건지.
로키의 산 아래 들어앉아 있는 에메랄드빛의 호수들과 금빛으로 빛나는 사시나무는 그림보다 곱고 예쁘다. 사흘쯤 지나자 우리는 서로 그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자세도 수정해 주면서 조금씩 친해졌다. 레이크 루이스에서 잠시 머무를 때 누군가가 그 여자들에게 물었다, 둘은 어떤 사이냐고.
“고등학교 친구예요. 마흔 살이 되면 해외여행을 가자고 다른 친구들하고도 약속했거든요, 근데 아~~무도 못 간대요. 결혼은 구속이 확실해요.”
역시나 대답은 긴 머리다. 반 옥타브쯤 높은 목소리가 상큼하고 발랄하다. 저 발랄함 속에 숨어있는 얼굴. 역시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 세상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내 기억 창고에 저장된 그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화장실에서의 수다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저것도 포장일까?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캐나다 플레이스에서 3D 영상을 보기로 했다. 카페에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아침 식사 중에 앞에 앉았던 통통한 두 여자만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이드가 초조한 발걸음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몇 사람은 모이는 곳을 잘 모르고 있는 것 아니냐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캐나다 구스 사러갔으니까 곧 올 거예요. 긴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 둘은 자매예요. 안 닮았죠? 그 언니가 친구......하다가 나를 보더니 말을 끊는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그날 안 보이는 쪽으로 한 명이 더 있었다. 머리가 긴 여자가 들고 나간 가방을 그 한 명에게 건넨다. 그 여자는 받자마자 재빨리 자리를 뜬다. 없어진 가방을 찾으러 뛰어 나가 봐야 세 여자가 손에 든 것 없이 자연스럽게 걸어가면 찾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란 내 추리다. 여기엔 물론 웃음과 수다라는 연기가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화장실에 들어와 볼 일을 보거나 손을 씻는 것도 아니면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경계심을 풀어 놓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인천 공항에서 짐을 찾아 나가는데 컨베이어 벨트 앞에 그 여자들이 서 있었다. 잘 가라고 하자 묵례를 한다. 편치 않았을 여행,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럽게 보인다.
‘아무리 천대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일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어느 장애인의 시를 읽고 가슴이 짠한 적이 있다. 이들은 세상을 너무 쉽게 살아가려고 하는 건 아닌지. 밖으로 나가며 나는 한 번 더 그 여자들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임옥진 님은 《문학21》 등단. 공저: 『너에게 나는 어떤 풍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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