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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9년 1월호, 통권207호 I 책머리에]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며 - 허상문

신아미디어 2019. 1. 23. 10:54

"우리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정신과 영혼이 살아 있는 한, 문학에서의 희망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는 생존의 마지막 조건이기 때문이다. 저 상자 속에 담긴 문학이 우리에게 결국 재앙이 아니라 희망을 줄 것이라는 맹목과 오기의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버텨내어야 한다."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며      -    허상문


   다시 새해를 맞았다. 많은 사람들은 산과 바다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의 삶과 문학이 천지개벽하듯 크게 바뀔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새해를 맞아 삶과 문학에 대한 새로운 다짐이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1984≫라는 소설을 발표한 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참혹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소 냉전의 시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때인 1949년이다. 오웰은 이 작품에서 암울한 인간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예견한 바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전 지구는 여전히 전쟁과 자연재해와 고도자본의 위협 속에서 갈수록 심각한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과학기술의 위세에 의해 인공지능이 등장하여 인간성은 갈수록 피폐해져 가고 있고, 미국 패권주의가 상징하는 엄청난 자본의 힘으로 세상은 물상화가 심화되어 간다. 그뿐인가. 지구 곳곳에서는 엄청난 자연재해로 생존의 터전이 무너져 내리고, 내전과 종교분쟁에 의해 갈 길을 잃은 난민들은 철새같이 방황하고 있다.
   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우려하듯이, 지금 지구촌은 전대미문의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우려가 아니다. 반세기 훨씬 전 오웰의 예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과 문학이 도대체 한 걸음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뜻있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다. 세상은 자꾸 발전하며 변화되어 가고 있지만, 삶과 문학에서의 경박함과 획일화는 그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피아彼我가 분명하던 시절에는 적을 물리칠 생각만 하며 살아가면 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야말로 적과 동지가 구분되지 않는 안개 속이다.
   과학기술과 물질주의에 매몰된 채 우리는 정체성의 상실과 획일주의의 끔찍함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것으로 획일화되어 간다. 과학기술이 대량생산으로 만들어 내는 물건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같은 것이 창궐하면서 인간의 이성과 개성마저도 차이와 부정이 없어져 가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함정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인간 스스로 외면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것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그것의 전파를 위해 질주하는 가운데 모든 것은 과잉상태에 빠져 있다. 과잉소통, 과잉생산, 과잉소비, 현대적 삶에서는 ‘정지’가 없다.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한 정지, 무언가 사색을 하기 위한 멈춤이 없다. 나날의 삶은 질주의 연속이다.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면서, 같은 곳으로 달려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창의적 삶이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 무언가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다른 이상을 교환하는 가운데 새로운 삶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드는 획일화와 순응은 궁극적으로 개별적 존재의미마저도 소멸케 한다. 우리는 타자가 타자로서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케 하는 동일자의 지옥에 빠져 있다.
   세상은 ‘반대의 부정성’(T. 아도르노)을 상실해버렸다. 획일화된 사회에서 ‘반대’란 존재할 수 없다. 디지털 시대는 순응과 복종의 심성을 가속화한다. 디지털적인 삶의 상황은 우리를 진지하게 사색하고 고민하는 힘을 앗아 가버린다. 오늘날 소통의 소음,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밀려오는 데이터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존재 망각’(M. 하이데거)에 빠져있다. 소리 없는 고요한 명상이나 인간 사이의 진정한 정신적 교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같은 것의 긍정, 굴종을 강요하는 무언의 폭력 속에서 인간은 뻔뻔하게도 기만적인 자유 의식과 해방감을 즐긴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문학에도 진지함과 심오함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수필 문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금 수필 문학은 다른 어떤 문학 장르보다도 인기를 끌면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근대 이후 우리의 수필 문학의 역사는 이제 거의 백 년이 되어 가지만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의 문학’이라는 본래적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신변잡기적 지루한 일상성의 동어반복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 해에도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지만, 진정으로 존재와 삶과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를 담은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는 자아와 타자 사이, 인간과 세상사이의 진정한 깨달음과 소통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아무리 거대담론이 상실된 시대라고 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문학은 항상 그것을 현재에 살아있게 하는 것, 과거와 미래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적 아픔과 미래를 위한 희망을 전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이런 사정은 수필 작품에 대해 평론을 하는 입장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쓴 작품을 바르게 평가하고 인도해야 하는 평론가들로서는 이 같은 책무에서 더욱더 자유로울 수 없다. 넓은 시각과 인식으로 작가보다 더 진지하게 사유하고 성찰함으로써 문학과 인생에 대한 지침을 주어야 할 평론도 과거의 자리에 그대로 안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지나 오늘날 ‘혼돈의 시대’가 운위되고 있지만, 여전히 평론은 태평성대에 빠져 음풍농월하는 듯하다. 심지어 그 발상지인 서구 문학계에서도 이미 용도 폐기된 지 오래된 구조주의와 형식주의의 구태의연한 비평방법론에 기댄 채 아직도 ‘죽은 비평’을 계속하고 있다. 문학작품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분석하여 무슨 대단한 성과인 양 내세우는 것이야말로 ‘평론’을 가장한 문학주의이며 또 다른 획일주의가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저급한 이데올로기에 굴종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테리 이글턴). 이런 문학적 노력(?)에서 삶과 세상에 대한 어떤 진정한 떨림을 찾을 수 있는가.
   현대적 삶이 그러하듯이, 문학에서도 ‘살아있는 떨림’(D. H. 로렌스)이 없다. 문학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 거칠게 말해서 문학은 이 세상과 인간의 삶을 보다 나은 단계로 이끌어 가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 아닌가.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정말 삶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문학을 한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문학다운 문학을 하지 못하는 것, 이보다 더 치명적인 망실이 또 어디 있겠는가. 문학의 본질적인 고민은 외면한 채, 이 암울한 세상을 위해서 문학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 본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매 순간 삶과 세상을 ‘떨림’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문학을 한다고 한들, 그것이 이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작가와 평론가는 끊임없이 불순한 욕망에 들끓고 있는 이 세상에 맞서 긴장하며 투쟁해야 할 번뜩이는 칼을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담금질에 의해 생산되는 문학이야말로 참되고 경이로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한 낯선 인식과 긴장은 작가와 평론가가 복무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학적 근거이다. 삶과 문학에서 이성과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허위의식’(G. 루카치)은 우리의 삶과 문학의 위기를 가속하는 위장일 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수필 문학은 일상적 글쓰기와 형식적 비평을 반복 답습해왔다. 그리하여 이익을 남기기 위한 자본이 시장에서 승리를 위한 이벤트에 들러리 서듯이, 일상성과 개인성에 매몰된 텍스트와 들러리비평이 난무해왔다. 보다 깊고 넓은 인식으로 작품과 비평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올릴때에야 수필문학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노력은 작가의 몫이면서 동시에 비평가의 몫이다.
   현실의 허구와 부정성이 보편화되어버린 시대에 과연 문학에는 아직도 희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문학의 위기와 문학의 죽음이 운위되는 마당에 지금 새삼스레 ‘문학의 희망’ 운운하는 것은 시체를 껴안고 그것을 살리겠다고 부검을 하는 것에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희망의 원리가 사라져가는 것이 문학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에서는 어떤 숭고한 가치와 이념도 상품과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면 관심의 대상에서 밀려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희망의 논리로서의 문학이 죽었다고 선언되고, 문학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와 미래를 이야기하기 어려워진 시대에 문학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예정된 실패의 길을 가겠다고 자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문학과 작가의 죽음이 선언되는 시대라 하더라도 이 전율적인 비관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것도 문학의 몫이다. 과학기술과 고도 자본이 득세한 이 세상에서, 지상의 언어가 고갈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새로운 언어로 말해야 하고,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죽는 것이야말로 문학이 우리에게 부여한 천형天刑이 아니던가. 우리가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정신과 영혼이 살아 있는 한, 문학에서의 희망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희망은 판도라의 상자에 남아있는 생존의 마지막 조건이기 때문이다. 저 상자 속에 담긴 문학이 우리에게 결국 재앙이 아니라 희망을 줄 것이라는 맹목과 오기의 믿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버텨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