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은 어머니가 두 손 벌려 자식을 품듯 모성적인 빛깔이다. 무한정 펼쳐진 잿빛 하늘을 보노라면 한없이 그윽하다."
잿빛이 가슴에 앉다 - 차상주
신문에 난 1호 크기의 1/2에도 못 미치는 아주 작은, 김민정의 수묵화 한 점을 보고 있다. 형제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다. 제일 뒤편에 있는 봉우리는 하늘에 닿은 듯 희부옇다.
섬이 섬을 안고 있는 모습이 안온하듯이, 엄마 산이 새끼 산을 품고 있는 그림은 포근하고 따뜻하다.
요즘 나는 수묵화 보기를 좋아한다. 화집을 받으면 수묵화부터 먼저 살핀다. 이들 중 사군자의 하나인 대나무나 난초를 친 수묵화보다는 산수풍의 수묵화를 즐겨본다. 이 수묵화는 고요하고 담백한 정적인 세계가 화폭 그윽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잿빛은 있는 듯 없는 듯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색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잿빛의 생애만큼 자기희생적인 삶도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파랗게, 노랗게, 빨갛게 자기 얼굴을 내미는 유색의 경연장인데, 잿빛은 한 발 물러나 질펀한 세상의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이들 유색들을 받쳐주고 있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불을 밝혀주는 전봇대가, 이동의 수단인 도로가 잿빛이기에 망정이지, 총천연색으로 도장되어 있다면, 내비게이션이 있다 한들 시각적으로도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일출 광경은 장엄하다. 처음에는 먼 산의 산불처럼 불꽃이 어렴풋이 띠를 두르고 번져나가다가 마침내 둥그런 불덩이가 되어 이글이글 불끈 솟아오른다. 순간 찌든 마음의 혼탁을 잠시나마 정화해 준다.
일몰도 햇살이 기울었다고 그냥 슬며시 넘어가지는 않는다. 장쾌하고 찬란한 광경을 보여주고 나서야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해가 뜨고 짐의 배경에는 끝없이 펼쳐진 잿빛 하늘이 있다. 이런 ‘자연 현상의 과정’들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무대를 만든 잿빛이야 말로 화색 중의 화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었을 때 잿빛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는 벚꽃 봉오리가 분홍색을 띠기 시작하면 가슴이 설렜고, 붉은 장미를 보면 가슴이 달아올랐다. 특히 푸른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멀리멀리 날아가고도 싶었다.
그러다가, 자식 다 떠나보내고 우리 내외만 남았을 때 담백한 색인 잿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잿빛은 담백하고 소박한 색이다. 이 천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사람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마음도 담담해진다.
그래선지 옛날부터 노인들은 회색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고, 안노인들도 회색 치마저고리 입기를 좋아했다. 이 옷을 입으면 기품도 있어 보인다.
스님이 잿빛인 가사 장삼을 입는 뜻도 다른 사람에게 복받이 되고 공덕의 의미가 있어서란다.
잿빛은 본래부터 있었던 색이 아니고 자기 본분을 다하고 사라지기 직전의, 희끄무레한 빛이 아닐까 할 정도로 개성이 없는 색깔이다.
연두색을 페인트칠한 집도 3, 4년 지나면 잿빛으로 변하고, 까만 아스콘을 바른 도로도 몇 년 지나면 희뿌연 잿빛으로 변해 다시 포장하니 말이다.
또한 도장한 집 외벽을 보더라도 위쪽은 연분홍 등 밝은 색을 칠하고 아래쪽은 잿빛인 회색을 칠한 집이 많다. 다른 색을 위에 앉혀 도드라지게 낯을 내준, 잿빛의 너그러움이다.
잿빛은 이렇게 숫제 자기 색깔에 대한 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않고, 무욕으로 자기 생을 보시하며 살기를 작정한 듯, 앞에 나서기보다는 주로 뒷전에만 머물렀다.
우리 인생도 마지막에는 노욕으로 자기주장 펴며 손에 쥔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느니, 차라리 지난 미움의 세월 다 내려놓고 ‘구름에 달 가듯이’ 잿빛 하늘로 떠나감이 어떨까 한다.
잿빛은 어머니가 두 손 벌려 자식을 품듯 모성적인 빛깔이다. 무한정 펼쳐진 잿빛 하늘을 보노라면 한없이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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