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복인가, 내 복인가. 나의 아들을 구제해 주신 그분들께 감사함을 다시금 전하고 싶다."
어떤 상견례 - 이용구
큰아들의 상견례가 있는 날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가을 하늘은 더욱 파랗고 높아 햇살까지 길고 따스했다. 하늘도 인연이 맺어짐을 축복하시는가. 서진이 가족이 지방에서 오시니, 우리가 먼저 가 있으면 좋겠다고 서둘렀다. 하지만 한 발쯤 늦은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도착했다고 하시며 우리 세 모자를 맞으셨다.
아들은 이십대부터 축구, 야구 등 운동장에서 하는 ‘공놀이’라면 흥이 나서 친구들과 서울 근교까지 원정 경기를 치렀다. 대학 팀, 사회 팀과 어울려 승패에 매이기보다 그런 시간을 즐기는 ‘청춘 발산형’이었다. 다녀온 날엔 얼굴에 희색이 짙었고, ‘나, 싸나이’ 라고 씌어 있었다. 원 없이 뛰다가 들어왔으니, 늘어져 쉬고 있어도 늠름하고 배짱 좋은 표정이었다.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사람은 홀가분하고 마음까지 가뿐해져 세상 걱정이 없어지는 느낌을 경험하곤 한다. 안으로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일순간에 떨쳐버리며 집착하던 것들로부터 놓여나는 ‘해방감’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 아들이 어느새 삼십 대가 되었다. 벤처 기업에 다니는 엔지니어로 팀의 일정을 관리하고 자동차를 설계한다. 규칙적인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일하면서 특별히 밤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밤이 주는 침묵과 적막함을 적절히 활용하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다. 보통 모두 잠든 새벽에 들어와서 정오쯤에야 출근한다. 설계가 지연되면 주말도 따로 없다.
회사 일이 바빠지면서 운동을 뜸하게 하는가 싶더니, ‘여자’에게로 관심이 옮겨갔다. 하지만 토요일, 일요일이어도 일 때문에 바빠서 여자친구들이 정해 놓은 만큼 놀아주지 못했다. 번번이 짜증을 들으면서도 또한 무슨 날이 될 때마다 이벤트를 준비하지 않는 센스 없는 아들이기도 하다. 어느 날부터는 손편지를 바라는 비위를 맞추는지 책상에는 색색의 편지지가 굴러다녔다. ‘그래, 낭만이라곤 없지. 가슴 철렁이게 할 만큼 잘생긴 것도 아니고. 짠한 매력 좀 발하지 않고. 외모를 가꾸든 내공을 쌓든 단정하고 이지적인 모습이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드디어 임자를 만난 모양이었다. 홍서진, 저희들이 하는 말을 빌리자면 ‘홍 양’이다. 아들은 운동하는 날이면 자신의 시간을 보내며 기다려 주는 여인이라고 소개했다. 어떤 날은 응원도 와 준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주말 작업이 있으면 “내가 서진이한테 어쩌고저쩌고….” 하면 된다면서 ‘연애함’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달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그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지 터득하여 도사급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예뻐야 한다던 그런 기준도 달라진 것 같았다. 서진이는 예쁜 것보다 개성 있는 토종에 가깝다. 그런데 아들은 자꾸 보면 귀엽다고 말했다. 엄마도 한번 그걸 느껴 보라며 웃었다. 나는 그런 아들이 더 귀여웠다.
오늘 상견례를 갖기까지 나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1년 동안 열 몇 번쯤은 보았다. 만나면 주로 무엇이든 먹게 되는데, 서진이는 먹는 것마다 혹은 해 주는 것마다 “맛있다 맛있다.” 하면서 자꾸만 정감가게 했다. 통화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으면 말의 시작이 “어머니이~.”였고, 중간쯤에서 “어머니이~.”하고 한번 더 불렀다.
도대체가 어떤 녀석인지 상상하며 앞뒤를 짜 맞춰 보아도 가식적인 말은 아닌 것 같다. 내숭 없이 싹싹하고 눈치 있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왔기 때문이다. 아들들을 키우느라 알지 못했던 “요 맛이구나.” 하는 짧은 깨달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열 몇 번의 만남으로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만 오늘 서진이 부모님을 만나보고 나는 더욱 안도감이 들었다.
서진이네나 나나 아이들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는 입장이긴 하다. 우리 어른들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았다.
“저희가 더 넉넉하면 좋았을 텐데, 서진이가 고생도 덜하고.”
“에구우, 요즘 어디 여자 남자가 따로 있나요? 바깥일이고, 집안일이고 형편대로 하면 되죠.”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서진이가 싹싹하고 친절해서 아들 키우는 맛하고는 영 다르네요.”
“에구우, 훈이가 좀 믿음직한가요. 아주 든든합니다. 잘 컸어요.”
우리 쪽에 아버지 자리가 없어서인지, 서진이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많이 말씀하시며, 따뜻하고 배려 깊게 챙겨 주셨다. 갑자기 아들이 서진이 아버지를 향해 말했다.
“저어, 아버님, 음식이 입에 맞으십니까?”
“어어 그래, 맛있구나. 평소에 잘 못 먹는 것들 아니냐?”
나는 아들이 그런 말솜씨를 보여서 깜짝 놀랐다. 평소에 들어 볼 수 없는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점수를 따기 위해 은근한 작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짐작이 되어 한편 안심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얼굴은 금세 빨개졌지만. 서진이 집에 몇 번 다녀오더니,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다고 자신하는 듯했다.
“오늘 저 시골에서 일찍 출발했지만, 드라이도 하고 왔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얼마 전에 염색하셨어요.”
등등 어려운 자리였지만, 모두 한바탕 웃었다. 자연스럽고 마음이 편안했다. 한 번씩 말이 끝나면 서로 내 딸을 보고 내 아들을 보고 대견해 하는 듯했다. 딸 가진 측에서 “집 있냐? 차 있냐?” 물어보기 시작하면 사태가 심각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으니, 제발 우리들의 이야기는 물처럼 흘러가기를 기대했었다.
우리는 혼수품 그런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집, 아파트, 유산 그런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자식들을 믿고 그들의 결정과 판단에 힘을 실어주자고 했다. 나는 아들을 가진 입장으로서 요즘 세상에 그런 선하신 예비 사돈을 만나게 되었다.
아들 복인가, 내 복인가. 나의 아들을 구제해 주신 그분들께 감사함을 다시금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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