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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수필과비평』[2018년 12월호, 통권206호 I 세상마주보기] 노후대책 - 김남수

신아미디어 2019. 1. 17. 08:45

"자식들이 편안하게 사는 부모를 보면서 마음이 가벼운지, 가끔가다 칭찬을 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노후대책      -    김남수


   잊을 만하면 자식들이 한 번씩 칭찬해줄 때가 있다.
   “엄마 어떻게 상가주택을 다 살 생각을 했어?” 말한다.
“   노후에 편안하게 살려고 샀지.”라고 대답은 하지만 나도 믿기지 않는다.
   사실 상가주택은 남편의 로망이었다. 신혼 때부터 남편은 나중에 돈 생기면 꼭 상가주택을 사겠노라 노래를 불렀다. 정작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코딱지만 한 단칸방에 살면서 어느 세월에 그 큰 집을 사겠다!’ 하는지 꿈도 야무지다며 속으로 비웃었다. 다달이 받아오는 월급만으로 남편 학비와 생활비 쓰기도 빠듯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남편은 모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살림을 늘리기 위해서 전세금을 빼서 땅에다 투자하자고 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던 시절에는 남편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줄 알고 시키는 대로 했다. 남편은 직장의 독신자아파트에 기거하고 나는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한 푼이라도 늘리려고 친정에 갔는데 남편은 본분을 망각했는지 저녁만 되면 가족 곁으로 오는 것이었다. 물론 남자만 있는 숙소에 가기 싫은 것은 이해가 되지만 생활비가 도로에 다 깔리는 것이었다. 애초에 세웠던 계획이 모두 어긋나 버렸다. 저축은 고사하고 도리어 마이너스통장만 끌어안고 다시 직장이 있는 곳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빈털터리라 빚을 내어 전셋집을 얻어야 했다. 한 이 년 가족이 떨어져 살다가 한데 뭉쳐 살게 되니 아이들도 좋아하고 나도 남편 옆에 있으니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빌린 돈으로 방을 얻었으니 매달 이자가 수월찮게 나갔다. 사 놓은 땅은 몇 년이 흘러도 도대체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옛말도 넉넉한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살다 보니 운이 따를 때도 있었다. 무주택자들만 받을 수 있는 작은 평수의 아파트를 분양을 받게 되었다. 대출을 받고 땅을 팔아야 아파트를 살 수 있으므로 손해를 많이 봐도 땅을 팔아야 했다. 돈 있는 사람은 십 년 정도 잊은 듯 던져 놓으면 땅이 보상해준다고 하지만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분답게 이사만 다녔지 친구들보다 형편이 많이 처져 버렸다. 보상심리에서인지 남편은 뭔가를 자꾸 벌이려 했다. 푼돈으로 주식을 사고팔기도 하고 한 번씩 상종가를 치고 있다고 자랑은 하지만, 정작 덤으로 내놓은 것은 없었다. 도리어 공모주를 받는다며 생활비를 축내곤 했다.
   이웃에 형님 아우 부르며 지내는 대선배가 살고 있었다. 연세가 많아 곧 퇴직할 때가 되었다. 선배는 평수가 큰 아파트에 살며, 자녀 공부도 끝나고 걱정 없이 살았다. 퇴직하고 나서 노후에 살 집을 보러 다니느라 바쁘다고 했다. 선배의 여유로운 형편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남편이 오지랖을 떨었다.
   “형님, 목이 좋은 상가주택을 사세요!”
   “마누라가 조용한 곳에 살고 싶다네.”
   이미 마당 넓고 텃밭이 있는 전원주택을 계약해 놓았다고 했다.
   남의 일에 콩이네 팥이네, 나서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집에 와서도 목청을 돋웠다.
   “나이 들면 돈이 최고지 땅만 넓으면 뭐하나?”
   생활의 여유가 없어선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선지 나도 남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놓고 부부가 텃밭도 가꾸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꿈이라고 하던데 어쩐 일인지 우리는 선배의 여유가 아깝기만 했다.
   우리는 노후에 조금이라도 수입이 들어오는 상가주택을 장만하자고 약속했다. 아이들이 겨우 초등학교 다닐 때라 꿈같은 이야기였다. 아이 셋을 중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키려면 첩첩산중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가로젓게 한다. ‘아자 힘내자!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자신을 다독였다.
   운동복 만드는 공장에도 다니고, 이불, 침대 커버도 만들어서 팔고, 홀치기, 수선, 가사도우미, 손으로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미용실에 취직해서 손님 머리를 감기고 바닥 비질하는 일도 했다. 허드렛일을 계속하다 보니 슬그머니 기술 욕심이 생겼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 미용 자격증을 취득해 미용실을 개업했다. 이제나 한숨 돌리려나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남편이 명예퇴직을 했다. 십 년이나 더 남은 직장을 스스로 던지고 나와 버렸다. 아직 자식이 둘이나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라 억장이 무너졌다. 한푼 벌려다 두 푼 잃는 꼴이 되고 말았다.
   집안 살림하랴 미용실 나가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때다. 헛된 욕심이 많은 남편은 퇴직금으로 투자할 곳을 알아보고 있었다. 무심코 투자금융에 따라갔다가 직원들의 친절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사장님, 어르신, 온갖 듣기 좋은 호칭을 붙여가며 극진히 대접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넋 놓고 있었다. 펀드의 이익에 대해 들려주기도 하고 최대한 높은 이자를 주겠다며 고객 유치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남편은 펀드에 관심이 있는 듯 몇 번을 되묻곤 했다.
   또 원룸 쪽도 수입이 높다 하니 대학 가까이 있는 원룸촌도 여러 번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당장은 아니지만, 전망이 높은 전답도 보러 다녔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사는 아파트를 처분하지 않고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남편은 젊었을 때 실수가 생각나 우왕좌왕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전원주택을 선택한 남편의 대선배가 떠올랐다. 선배의 결정을 우리 입장으로 바꾸어 놓고 티격태격 열변을 토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났다.
   “나이 들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노쇠해졌을 때 기본적인 수입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가겠나?”
   “자식들에게 손을 벌리지.”
   “아니야. 저 살기도 힘 드는데 부모라고 번번이 자식에게 손 벌릴 수 있겠나?”
   이런 말을 주고받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들자 믿고 의지하던 남편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침 구원의 손길처럼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급매로 내놓은 상가주택이 있는데 한번 보시려나?” 물었다.
   위치를 물으니 우리 동네였다. 빤한 장소였다. 집도 구경하지 않고 단번에 계약하겠다고 했다.
   상가주택의 수입은 원룸의 반도 미치지 못하지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귀가 얇은 남편이 또 어디로 튈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었다.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또다시 남편의 모험에 빠져 투자에 나선다면 이 나이에 어떻게 다시 일어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주위 환경이 시끄럽고 집이 오래되었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세금을 안고 상가주택을 샀다. 당장은 집에서 나오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또 은행에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렸기에 한 달 이자만 해도 큰돈이 나갔다. 아이 둘을 대학을 마쳐야 하기에 미용 일은 계속해야 했다. 지문이 닳고 굳은살이 박여도 일을 했다. 어영부영하던 남편도 공장, 주유원, 환경미화원 가리지 않고 뛰었다.
   세월이 가니 자식도 졸업하고 취직이 되었다. 부부가 한몸으로 열심히 노력해 대출금도 갚았다. 매달 나오는 집세를 한푼 두푼 모아 아들딸 혼사도 치렀다. 젊었을 때 크게 본 손해가 거울이 되어 남편이 아내 말을 들어주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이제 남편과 나는 기력이 딸려 집에 의지하고 산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밥 먹고 살면 됐지.’ 큰 욕심은 없다. 한 번씩 모임에 나갈 용돈 정도 있고, 손자들 손에 쥐여 줄 푼돈만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언제나 우리들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노후의 내 집이 고맙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듯 집도 사랑한다.
   자식들이 편안하게 사는 부모를 보면서 마음이 가벼운지, 가끔가다 칭찬을 해주는 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