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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4월호, 신작수필24인선 I 동정녀들의 수다 - 이송은

신아미디어 2019. 1. 7. 09:46

"요즘 후배는 매일 감사 노트를 쓴다고 한다. 하루 세 가지씩 감사한 일을 적고 있다며 밝은 소리로 전화했다. 신체적 동정녀에서 정신적 동정녀로 성숙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도 감사노트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동정녀들의 수다         /    이송은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셋이 저녁을 먹으며 주제도, 마무리도 없이 이어지는 내용은 비슷하다. 남편과 자식, 친구들, 음식, 사회문제, 건강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야기가 끝나고 다음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말이나 불쑥 튀어 나오고 그걸 또 서로 주고받는다.
   “내 남편은 껌딱지야. 어딜 가든 따라다니고 같이 가자는 데가 많아. 우린 10년 이상 동정이야.”
   늙으면 대개 동정 부부가 된다는 것이다. 방을 따로 쓰거나 같은 침대를 쓰거나 마찬가지란다.
   우스갯소리로 서로 살을 나누지 않으면 생물학적 동정부부라 하고, 그러면 같이 하는 것들이 다 싫어지기 마련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다른 친구가 그 말을 이어받았다.
   남편과 같이 밥 먹기가 싫다고 했다. 찌개에 숟가락을 같이 넣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애 결혼한 친구라 의외였다. 게다가 그동안 친구가 남편을 더 좋아한다고 알고 있었다.
   “나는 늙어 가지만 조심하느라 화장실에서도 소리 안 나게 하려고 물 틀어. 앉을 때도 다리를 오므리고 앉는데 이 남자는 도대체 조심성이 없어. 식탁에서 다리를 지게처럼 벌리고 앉아. 밥알을 입주위에 묻히고 후룩거리며 먹어. 아무데서나 방귀도 뀌고. 지저분해 같이 먹기 싫어. 핑계만 있으면 따로 먹으려고 해.”
   얼마 전 한 후배가 너무 속상하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도 자식도 소용없고 헛살았다며 얘기 좀 하자고 불러냈다. 못 먹는 소맥을 말아 마시더니 내친김에 노래방까지 갔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부르는 노래. ‘여자의 일생’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 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자신이 얼마나 참으며 뒷바라지했는데 지들이 그럴 수 있느냐,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희생했다는 억울함에 번개 맞은 듯 풀어져서 온갖 청승을 다 떨며 흐느끼더니 잠시 후, 스스로 정리에 들어갔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늘 기도했다는 말끝에, 이제는 정신 차리게 혼내주라고 기도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잘 참고 들어주던 나는 그 말끝에 웃어버리고 말았다. 왜 웃느냐는 표정에 설명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미운 사람 혼내주고 죽여 달라는 기도를 다 들어주시면 세상 사람들 거의 다 죽어야 해서 그 기도는 안 들어 주실 거야.”
   마주 보고 한바탕 웃었다. 그러고 났더니 잠시 후, 그의 기분이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친구와 후배의 얘기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무료함이 느껴졌다. 그 별일 없는 삶이, 얼마나 평화로운 것인지 불편한 삶을 겪어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곤 한다. 아니면 기대치가 너무 높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묶이고 끌리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로서보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더 단순하다. 아내나 엄마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착한 엄마, 착한 아내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들이 더 묶인다.
   몸 근육 만들듯 마음 근육을 다듬어야 바람에 부대끼지 않는다. 그러려면 삶을 숙제하듯 고통스럽게 살 것이 아니라, 대단한 업적을 만들려 하지 말고 자신만의 놀이로 살아보아야 한다. 놀이에 몰입되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몰입하다 보면 에너지가 솟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니까.
   요즘 후배는 매일 감사 노트를 쓴다고 한다. 하루 세 가지씩 감사한 일을 적고 있다며 밝은 소리로 전화했다. 신체적 동정녀에서 정신적 동정녀로 성숙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도 감사노트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이송은 님은 수필가. 《에세이문학》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