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닮아야 하는 어르신이고, 배워야 하는 스승이다."
어르신과 스승 / 육상구
요즘, 어르신이 귀하고 참다운 스승이 없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보다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속담처럼 우쭐거리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그러나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도 유지되는 것은 바른 모습을 몸소 실천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지혜를 일깨워주는 어르신과 스승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근래 나는 우리나라 농업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학자이시고 수필가로 명성을 날린 류달영 박사님의 수상록을 읽으면서 누가 어르신이고 스승인지 눈을 뜨게 되었다.
어느 날, 박사님은 몸이 매우 지친 상태로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이미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차서 앉을 자리커녕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였다. 바로 그때 중학교 모자를 쓴 어린 학생이 일어나더니 자리를 양보했다. 박사님은 고맙다고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학생의 인적사항을 메모했다. 그 시절에는 모자와 교복을 착용하고 있어서 학교와 학년 표시가 있고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교수님은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그 학생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선생님한테 편지를 썼다. 자리를 양보한 학생을 칭찬하고, 그 학교의 모든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도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교장선생님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편지를 소개했을 것이고, 학생은 크게 칭찬을 받았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은 다른 학생들도 양보심을 키우면서 어른들에 대한 공경심이 늘어났을 것이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학생에게 고맙다고만 했을 뿐 그냥 지나쳤을텐데 류 박사님은 교장선생님한테 선행을 알려주고 다른 학생들도 닮도록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 어른으로서의 본을 보여줬다. 박사님 같은 어르신이 있어서 세상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이지 싶다.
그리고 누가 스승인지 알게 해준 일화도 있다. 스승은 반드시 학식과 덕망을 갖추지 않아도 삶을 통해서 얻은 지혜를 알게 해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류 박사님은 어느 언론사의 주관으로 각 분야를 대표하는 33인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행들과 백두산을 등정했다. 일행들의 짐을 날라주는 일꾼들도 합류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도로가 없어서 며칠 동안이나 밀림을 헤치며 걸어가야 했다.
한여름의 무더위에다 비까지 내려서 숲길을 걷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신발에 습기가 차서 발이 부르트고 갈라져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함께 간 의사도 마찬가지여서 옥도정기 같은 물약을 발라줄 뿐 특별한 치료약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지식인들과 달리 짐을 나르는 일꾼들의 발은 멀쩡했다. 그들은 쉬는 틈틈이 모닥불을 피워서 발을 말린다고 했다. 박사님도 일꾼들처럼 모닥불에 발을 말리자 부르튼 부위가 보송보송해지면서 걸음이 가뿐해졌다. 등정을 무사히 마친 것은 물론이다.
류 박사님은 백두산 등정을 다녀온 후, 책상에서 배운 지식이 무기력한데 비해서 무식한 줄 알았던 일꾼들이 삶의 지혜를 일깨워준 스승이라고 했다. 미개척 분야의 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인한테서도 배워야 하지만 경험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축적한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해야 할 스승들이라는 것이다.
공자는 ‘슬기로운 사람한테서 배우지만, 어리석은 사람한테서도 배울게 있다.’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을 보면서 자신도 그 사람을 닮기를 바라고, 미련한 사람을 보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말일 것이다. 또한 논어에도 ‘세 사람이 같이 가면 반드시 그중에 내 스승이 있다.’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그 중에 믿고 따를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이웃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어르신과 스승이 많이 있을 것이다. 소박하지만 지금처럼 살고 있는 것도 어쩌면 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어르신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들이야말로 세상살이에 용기를 갖고,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꿈과 희망을 갖게 해주는 고마운 분들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닮아야 하는 어르신이고, 배워야 하는 스승이다.
육상구 님은 2001년 《한국문인》등단. 수필집: 『오래된 책은 향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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