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곳곳에 있는 거미줄도 보기에 나쁘지 않으면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벌레와 같이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살생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신자들은 길 위의 개미 한 마리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쓴다지 않는가. 내게 삶이 허락되는 동안, 모든 생명을 존중하면서 같이 살아가리라 마음 먹어본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귀중하니까."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귀중하다 - 홍영선
나는 벌레가 싫었다. 나뿐 아니라 주변에도 벌레 좋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더운 여름날, 바야흐로 단잠에 빠지려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얼굴에 앉아 잠을 방해하는 파리. 불결한 생각이 들어 더욱 기분이 나빴다. 또 ‘왱’ 하는 소리와 함께 손등에 일침을 놓고 도망가는 모기는 물리면 따갑고 가렵지만 일본 뇌염이나 말라리아 같은 병에 걸릴까봐 두렵기도 했다. 게다가, 실제로는 여섯 개인데도, 마치 60개도 넘을 것 같아 보이는 다리로 염탐꾼처럼 나타났다가 도둑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저 바퀴벌레는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이 불결하고 간교해 보여서 더 싫었다.
어디 그뿐이랴. 마당에 나가면, 장미 잎을 까맣게 덮는 진딧물, 새로 나오는 연약한 배춧잎을 갉아서 여기저기 구멍을 내놓는 배추벌레, 그리고 방심하고 있을 때 여러 번 내 손을 폭격한 말벌. 이런 벌레들이 보기만 해도 싫고 무섭기까지 했다.
중학교 시절. 우리는 매년 단체로 국립묘지에 가서 나무젓가락을 들고 송충이를 잡아야 했다. 산림녹화를 방해하는 해충인 초록색의 송충이.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젓가락으로도 잡기가 무서워 나뭇가지를 쳐서 송충이를 땅에 떨어뜨린 뒤 발로 밟기도 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으나 자연스럽게 벌레를 미워하는 훈련까지 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벌레가 보이기만 하면 반사적으로 신문지를 접어 때리거나 파리채로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독한 살충제로 공격하기도 했다. 벌레를 죽일 때 나는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일종의 쾌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해충을 잡고 내 주변의 청결과 건강을 지켰다는 작은 성취감마저 있었다.
그런데 벌레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몇 년 전 암 진단을 받은 이후의 일인 것 같다. 일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던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고, 독한 항암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운명의 나침반이 삶 쪽으로 가닥을 잡아 주었다.
중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에 가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게도 될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머릿 속 여기저기에서 느닷없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음울하고 낯선 침입자처럼.
천주교 신자인 나에게 수녀님 한 분이 병실로 찾아와 병자성사를 받으라고 권했다.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애써 듣지 않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저 열심히 치료받으면 다시 전처럼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했다.
항암치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로 이사했다. 생전 처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벌레가 있었다. 밭에는 지렁이와 달팽이도 많았고, 날아다니는 벌레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벌레가 전처럼 싫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예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열린 문틈으로 여러 가지 벌레가 들어왔다. 그러나 잡거나 살충제를 뿌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찬찬히 관찰하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작은 몸에 생존을 위한 모든 기관이 다 들어있고 그것들이 열심히 움직이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비스러웠다.
젊은 시절 미국 유학 중에 지도교수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분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유태인이었다. 대화를 하던 중 벌레가 들어오니 종이컵으로 조심스럽게 잡아 살려서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때는 참 낯설게 보였지만 그분은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하찮은 곤충의 생명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어느 날, 말벌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 거실 유리문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전 같으면 의당 살충제를 찾아 뿌렸을 텐데 그날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순간 말벌에게 말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있던 신문지를 집어 말벌이 앉아 있던 유리 밑에 대고 천천히 말했다.
“여기 옮겨 앉아 볼래?”
순간, 놀랍게도 말벌은 신문지 위로 옮겨 앉는 것이었다. 마치 내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벌과의 소통. 기분이 묘했다. 나는 천천히, 벌이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쓰면서 무사히 유리문 밖으로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 일을 경험한 후, 나는 집안에 어떤 벌레가 들어와도 살려서 보낼 방법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웬만한 벌레는 손으로 살짝 잡아 내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창문을 열어두고 기다렸다. 집 곳곳에 있는 거미줄도 보기에 나쁘지 않으면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벌레와 같이 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살생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불교나 자이나교의 신자들은 길 위의 개미 한 마리도 해치지 않으려고 애쓴다지 않는가. 내게 삶이 허락되는 동안, 모든 생명을 존중하면서 같이 살아가리라 마음 먹어본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귀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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