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품위 쪽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어깨의 짐이 무거우면 몸이 무너지기 쉽고, 머리에 생각의 하중이 지나치게 실리면 마음이 고달파지게 마련이다. 노인네는 더욱 그렇다. 품위며 권위, 체통도 짐일 수 있다. 품위 쪽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다보면, 그 바탕을 해칠 위험성이 따를 수 있다. 높은 품위로 하여 존경을 받는다 해도,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연을 거스르는 무리가 따를 수 있지 싶어 하는 말이다. 이제는, 품위는 비틀거리더라도 제 맘대로 놀라하고, 조용히 화두나 챙기고 싶다. 품위도 그만 내려놓고 싶다."
품위도 내려놓고 / 김선형
내 인생은 늘 품위가 문제였다. 그것은 아킬레스건이고, 멍에이기도 했다. 나는 과격하고 경망한 유전자를 받고 태어나선지, 애초부터 품위가 싹트고 자랄 수 있는 토양이 척박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유달리 품위를 기르고 지킬 것을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살아야 했다. 여기에서 내 인생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10대 말 어느 겨울날이었다. 나는 교수이고 스님이었던 사촌형과 함께 오대산 월정사에서 당대의 동양학의 석학, 탄허 스님을 뵌 적이 있었다. 스님은 대뜸 “너무 강경하고 가벼운 것이 흠”이라고 단정하셨다. 그것은 과격과 경망을 지적하신 것으로 들렸다. 스님께서는 주로 눈과 입을 들어 말씀하셨다.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나서 성깔이 요동치고, 입술이 얇아서 말이 많고 경망하며, 박정한 상이라고 부연하셨다. 그리고 ‘기품’을 길러야 한다면서 단전호흡과 참선을 당부하셨다. 특히 기품을 강조하실 때는 입술 사이에서 가벼운 한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탄허 스님께서 관상 말씀을 하시기 전에도, 과격과 경망의 천성은 이미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파장은 주로 할머니와 맞닥뜨렸다. 내 타고난 성정에 가슴앓이를 하면서 바로잡아보려고 몸부림치신 분은 할머니 평촌 댁이었다. 할머니께서는 내 천성의 대척점을 그리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시선은 품위에 꽂혀 있었다. “점잖고 의젓한 종손”, 이것이 할머니의 화두였다. 11대 종손이면서 독자인 손자가 쌈박질이나 일삼고, 천방지축으로 방정을 떨어대는 것은, 종가의 체통이나 자존심으로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늘 품에 안으신 채 훈도를 일삼으셨고, 학교까지 따라오셔서 “그라면 못 써야”하시면서 눈물을 떨구셨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글을 배운 것은 한문이었다. 네댓 살 적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은, 훈장님으로부터 종아리를 많이 맞은 것뿐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말썽꾸러기였다. 3년을 내리 담임하셨던 나도천 선생님은 “선생 20년 만에 너같이 독하고 방정맞은 놈은 첨”이라고 절규하셨다. 두 선생님 모두 독성과 경솔을 질책하셨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품위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품위나 체통에 민감한 여자와 결혼했다. 아내는 비교적 정중한 편이다. 그래서 아내를 실망시켰고, 그것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아내는 내 성정을 불편해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관심은 갖고 있지만, 이렇다 할 변명거리는 찾지 못하고 있다. 수억 겁에 걸친 업장은 그만두고, 사람이 타고난 습벽이라는 것은, 결심이나 노력만으로 쉬이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천성의 절벽 앞에 속수무책으로 허우적대고 있다.
나는 학문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땟자국으로 찌든 강사보따리를 내려놓고 전임교수가 된 것은, 유신 선포 직후의 서슬 퍼런 시절에 민·군 통합의 국가안보교육기관에서였다. 품위 절름발이가 품위와 권위로 먹고사는 소굴로 진입한 꼴이었다. 학생들은 각 군의 별들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었고, 나이도 나보다 많았으며,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권위까지는 몰라도, 교수로서의 기본 품위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환경이었다. 우선 품위 메이크업이나 페인팅부터 하고 볼 일이었다. 난생 처음 들어본 품위유지비를 받는 것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천성에 더하여 30대 초반의 약소한 몸집의 애송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속에서 타고난 강단과 피나는 노력으로 10년을 버텼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후 품위로 숨 막혔던 권위주의 영역에서 벗어나 I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에 I대학 설립자는 구속된 상태에서 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풀려나 있었다. 그때 천하의 독불장군이었던 설립자와 대학의 명운을 걸고 정면충돌하게 되었다. 여기서 결국 품위로 포장하여 억눌러 놓았던 천성의 화산이 폭발하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은 만용과 무모라 했지만, 나로서는 생을 건 도전이었다. 할머니와 스님께서 걱정하셨던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I대학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품위 위기에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I대학에 복귀하여 정년을 맞는 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모두 그리 얘기했다. 타고난 천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정년으로 교직을 마무리할 때까지도 품위로 하여 갈등을 겪었지만, 그것은 나를 단련시키고 성찰과 고뇌를 거듭하게 한 요인이 된 것만은 분명하지 싶다.
내가 수필을 만난 것은 칠순을 넘긴 후의 일이었다. 어쩌다가 우연한 기회에 선배 교수님의 지도로 동료 몇 사람과 함께 노욕을 부린 셈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품위로부터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관련 자료나 담론에서도 품위는 단골 메뉴였다. 수필의 품위를 강조하는가 하면, 품위가 있어야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생애 마지막 마음공부 삼아 시작한 수필의 앞날도 고달플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이다.
자기 강점이 빛을 보는 환경을 만난 사람은 인정받거나 성공하기가 쉽다. 그런데도 품위 결핍증이라는 허점이 부각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늘 소리를 냈고 파도를 일으켰다. 내가 학문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가르치거나 글 쓰는 일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품위를 요구하는 직종이었기 때문에, 구도자적인 정진과 수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해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해 온 편이다. 아직도 흉내 수준이지만 단전호흡이며 참선을 시작한 지도 50년이 넘는다. 타고난 아킬레스건의 증상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온 힘을 다하여 대응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리 보면, 내 인생은 긴 수련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품위 냄새가 난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틈틈이 고개를 들어 흘러가는 구름만 바라다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품위 쪽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어깨의 짐이 무거우면 몸이 무너지기 쉽고, 머리에 생각의 하중이 지나치게 실리면 마음이 고달파지게 마련이다. 노인네는 더욱 그렇다. 품위며 권위, 체통도 짐일 수 있다. 품위 쪽에 지나치게 관심을 두다보면, 그 바탕을 해칠 위험성이 따를 수 있다. 높은 품위로 하여 존경을 받는다 해도,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자연을 거스르는 무리가 따를 수 있지 싶어 하는 말이다. 이제는, 품위는 비틀거리더라도 제 맘대로 놀라하고, 조용히 화두나 챙기고 싶다. 품위도 그만 내려놓고 싶다.
김선형 님은 2006년 만화 『벚꽃과 천황의 나라 일본』 3권 출간. 2012년 《선수필》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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