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서러운 것이다. 하지만 숙부님과 사촌누이의 활활 타오르는 군불로 인해 가슴에 맺힌 서러운 응어리가 봄눈 녹듯 녹아내렸을테고 폭풍우처럼 험난한 세상을 헤쳐 성공의 깃발을 휘날리셨다."
K선생님과 군불 / 김수인
한려수도 오십 해리 잔잔한 바다를 내려다본다. 동화처럼 떠있는 저 섬들 중에 어느 곳이 K선생님의 고향일까? 통영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에 올라 잔잔히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니 K선생님의 수필<군불>이 떠오른다.
선생님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한파가 기세를 부리던 한겨울 어느 밤, 선생의 숙부님께선 통영 시내에서 공부하는 조카의 냉방을 데워 주기 위해 외딴 섬에서 통영까지 물살을 저어 오셨다 한다. 손바닥만 한 조각배에다 장작을 가득 싣고 칠흑 같은 밤바다의 물살을 다섯 시간이나 감고 당겨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빛이 환한 항구에 도착하셨다. 달동네 자취방까지 장작을 나르신 후 싸늘한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놓고는 선걸음에 돌아가셨단다. 그날 밤 K선생께선 장작불의 후끈한 열기보다 더 뜨거운 혈육의 정을 느끼며 신열을 앓으셨단다. ‘나에게도 비빌 언덕이 있고 마음의 지주가 있다.’며 밤을 지새워 벽에 붙은 일과표를 고치기 시작했다. 잠자는 시간을 대폭 줄였고 희망의 별을 향해 활시위를 힘껏 당겼으리라. 그날 밤 이후로 숙부님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장작개비를 차마 태워 버릴 수 없어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고 하신다.
그 어른께선 젊은 형님이 남기고 간 혈혈단신 조카를 조개가 진주를 품듯 가슴 아리게 품고 계셨던가 보다. 섬마을의 궁색한 살림살이는 조카 한 명 양육하기에도 힘들었을 테고 가족의 눈치도 살폈으리라. 그래서 조카의 자취방에 장작을 가져다주는 것도 깜깜한 밤바다를 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참으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던가 보다.
여섯 살 때 조실부모하고 숙부님 댁에 얹혀 살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 정의 미학이라 불리어진 선생님의 수필집은 온통 아린 사연들로 엮어졌기에 울먹거리지 않고는 읽을 수 없었다. 어린 소년이 숙부님을 따라 밤바다에 낚시하러 갔을 때 조카의 떨고 있는 모습이 애처로워 외투를 벗어 입혀 주시던 손길을 여태 잊을 수 없다 하신다. 정을 받지 못해 굶주리고 있는 가엾은 조카는 겉옷 한 가지 걸쳐 주는 손길에도 감동이 밀려 와 군불이 되었으리라.
어느 날은 공부는 하지 않고 동네 친구들과 놀기만 한다고 숙부님께서 교과서를 몽땅 불 태워 버렸단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난감했을까. 엉엉 울음을 터뜨리면서 안절부절 발을 동동 굴렀을 선생님. 하나 그날 숙부님의 꾸지람은 훗날 조카의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했고 성공의 지렛대가 되었다. 며칠 후 숙부님께선 통영 시내에 가셔서 교과서를 새로 구입해 안겨 주시며 다시는 놀이에 빠지지 말라고 일침을 놓으셨단다. 그날부터 선생께선 공부에 열심이었고 숙부님 역시 공부할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조카를 불러 내지 않았다고 한다.
숙부님이 집 뒤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잘라 학자금을 마련해 주셨을 때 K선생님은 가슴에 묵직한 바위를 얹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언젠가는 성공해서 갚아 드려야 한다는 중압감도 컸을 테고 한편 눈물 나도록 고마웠으리라. 세상이 힘들어 희망의 등불이 가물거릴 때 숙부님만 떠올리면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군복무 시절 휴가차 내려왔을 때의 일화 또한 눈물범벅이다. 오갈데 없는 선생님은 섬마을 숙부님 댁을 찾아갔는데 이미 멀리 출타하신 후였다. 며칠을 지내고 귀대하던 날 차비가 없어 빈손으로 배에 올랐다. 통통배가 막 떠나려 할 때 산비탈에서 열댓 살의 사촌 누이가 “오빠”를 부르며 쫓아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뱃사공도 짐작을 했는지 뱃머리를 돌려주었단다. 사촌누이 역시 조실부모한 가엾은 처지였고 숙부님 댁에 얹혀살고 있었다. 휴가 온 사촌오빠가 여비 없이 떠나는 걸 알았기에 이웃을 찾아다니며 애걸복걸 사정했던가 보다. 동백의 씨앗을 주워 갚겠다며 간신히 빌린 돈을 건네주려고 허겁지겁 뛰어 내려온 장면을 상상하면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사촌누이의 갸륵한 마음을 받아 들고 전방으로 떠나는 K선생님의 가슴에 또 하나의 군불이 지펴졌던 셈이다.
가난은 서러운 것이다. 하지만 숙부님과 사촌누이의 활활 타오르는 군불로 인해 가슴에 맺힌 서러운 응어리가 봄눈 녹듯 녹아내렸을테고 폭풍우처럼 험난한 세상을 헤쳐 성공의 깃발을 휘날리셨다.
선생께선 먼 훗날 민선시장으로 당선되셨다. 시장 취임식 날 당신이 받은 꽃다발을 숙부님께 안겨 드리며 당당히 소개해 올렸다 하신다.
“감격스런 오늘의 영광을 훌륭하신 숙부님께 바칩니다.”
공표를 하자 통영시민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군불을 지피고 싶다.
김수인 님은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객승』 『달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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