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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월간 좋은수필 2018년 1월호, 신작수필 22인선 I 1분의 여유 - 박세숙

신아미디어 2018. 10. 30. 10:58

"옆 차선을 본다. 주유하기 위해서만 들어가는 우회전 차선에 몇 대의 차가 대기 중이다. 신호등을 지나면 직진차선은 하나뿐인데 조금 빨리 가겠다고 차선 위반을 하고 차간 거리를 제대로 확보할 수 없는 짧은 거리에서 끼어들기를 시도한다. 부딪칠 것 같은 아찔함이 한두 번이 아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곡예 운전은 이제 끝내고 급하면 먼저 가라고 보내주는 아량과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 이젠 우리도 한 템포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보면 어떨까?"

 

 

 

 

 

   1분의 여유         /    박세숙

 

   집에서 시내를 나가려면 몇 개의 신호등을 거쳐야 한다. 큰길 교차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데 직진하던 버스는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넘어가서 정류장에 차를 세웠다.
   곧이어 나도 출발했고 두 번째 신호에서 버스는 직진, 나는 좌회전 차선에서 신호대기 중인데 버스는 슬금슬금 정지선을 넘더니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순간 일 년 전에 있었던 지인의 아들이 당한 교통사고가 떠올랐다.
   설을 쇠러 가려고 농장에 들러 소사료를 주고 나오던 길에 참변을 당한 것이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고 달리던 차를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온 시내버스가 들이받은 것이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설마 했다. 그녀는 사고 나기 하루 전날 만해도 카톡으로 명절 잘 쇠라며 복주머니를 주렁주렁 보내줬는데, 하룻밤 사이에 단란했던 한가정이 무너진 것이다. 버스가 신호만 지켰더라면…….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운전을 하면서 잘하지도 못하는 솜씨로 신호 위반을 가끔 했다. 큰길 교차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지만 횡단보도만 있는 한적한 곳에서는 사방을 둘러보고 사람이 없으면 그냥 통과했다. 건너는 사람도 없는 정지선에 서 있을 때면 뒷차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운전자는 보란 듯이 차선을 바꿔 앞질러 가기도 한다.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위반하는 곳이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어느 날 남편이 그곳에서 단속반에 걸렸는데 시골아저씨의 행색이 불쌍해 보였는지 벌금이나 벌점 부과없이 보내줬다고 했다. 조심하라는 당부에 얼마간은 잘 지켰지만 훈방의 약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날도 일단 멈춤은 했다. 보행자 신호인데 반대편 차량들은 씽씽 달린다. 순간 법을 지키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았다. 빨간 불인데 정지선을 넘었다. 그때 나무 뒤에 서 있는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서지도 달리지도 못하고 주춤거리는데 갓길에 세우라는 손짓을 했다. 내 앞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정지선에서는 단속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차량조회를 한 후 이곳은 사망사고가 잦은 곳이니 꼭 지켜달라며 그냥 보내주었다. 나의 조급함이 누군가의 생명에 위협을 줄 수도 있는데 보는 사람 없다고 지키지 않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미국에 갔을 때 일이다 딸의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느낀 것인데 그들의 운전습관이 참 신사적이다. 큰길 교차로에서는 신호에 따라 움직이니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주택가나 2차선 도로에서 그들의 운전습관은 돋보인다. 단속경찰도 없고 신호기도 없는 교차로에서 먼저 진입한 차가 먼저 출발한다. 한 대씩 질서 있게 보내고 기다리기를 반복한다. 한적한 곳이라도 멈춤 표지판이 있으면 일단 정지했다가 출발한다. 작은 것에도 남을 배려하고 실천하는 것을 보면서 선진국답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보다 짧은 역사를 지녔음에도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종교의 가르침 때문일까. 국민의 75% 이상이 기독교와 카톨릭 신자인 미국은 대통령 선서도 성경 위에 손을 얹고 한다. 보이지는 않지만 무소 부재한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을 벗기 위해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우리는 빨리빨리가 몸에 배었다. 그 결과 급성장은 했지만 잃어버린 것도 많다.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사건 사고도 많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도 무너졌다. 인정이 메마르고 우리가 아닌 나만 아는 이기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조급증만 늘었다. 서민의 발이 되는 시내버스 배차 간격을 좀 더 여유 있게 준다면 위험을 무릅쓴 운전은 하지 않을 것이다.
   1분의 여유를 갖지 못해서 일어난 사고의 파장은 너무나 컸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품을 아이들은 잃어버렸고 많은 이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육신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할 것이다.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사고의 전환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훨씬 따뜻하고 여유로워질 것이다.

   옆 차선을 본다. 주유하기 위해서만 들어가는 우회전 차선에 몇 대의 차가 대기 중이다. 신호등을 지나면 직진차선은 하나뿐인데 조금 빨리 가겠다고 차선 위반을 하고 차간 거리를 제대로 확보할 수 없는 짧은 거리에서 끼어들기를 시도한다. 부딪칠 것 같은 아찔함이 한두 번이 아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곡예 운전은 이제 끝내고 급하면 먼저 가라고 보내주는 아량과 서두르지 않는 느긋함. 이젠 우리도 한 템포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워보면 어떨까?




⁕ 박세숙님은 수필가. 2015년 《좋은수필》로 등단.